잉글랜드 내전
내전, 혁명, 종교 전쟁, 정치 투쟁, 왕정 복고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00:18:41
잉글랜드 내전은 17세기 잉글랜드 국왕과 의회 간에 벌어진 대규모 갈등입니다.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는 국왕 찰스 1세와 의회가 충돌하며 발발했습니다. 크게 세 차례의 내전을 거쳐 왕당파가 패배하고 공화정인 잉글랜드 연방이 수립되었습니다. 올리버 크롬웰의 독재로 이어졌지만 영국 역사상 의회가 군주에 대항한 첫 사례로 기록됩니다. 이 전쟁은 이후 명예혁명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의회 중심의 정치 체제를 확립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628
[권리청원 서명: 국왕과 의회의 첫 줄다리기]
찰스 1세가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인한 재정난을 해결하고자 의회를 소집했습니다.
의회는 세금 부과에 동의하는 대신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권리청원'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고, 국왕은 결국 이에 서명하며 의회의 승인을 얻었습니다.
권리청원은 1215년 대헌장의 정신을 계승하여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구체적인 목록을 담고 있었습니다. 주요 내용은 의회 동의 없는 세금 징수 금지, 병사 숙박 금지, 평화 시 계엄령 선포 금지, 합법적 판결 없는 체포/구금/재산권 박탈 금지 등 왕의 독단적인 통치를 견제하는 조항들이었습니다.
1639
[주교 전쟁 발발: 왕권을 압박한 뜻밖의 사건]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하고 11년간 독재를 펼치던 중, 장로교 국가인 스코틀랜드에 성공회 전례를 강요하다 '주교 전쟁'을 촉발했습니다.
이 전쟁의 비용 조달을 위해 그는 어쩔 수 없이 의회를 다시 소집하게 됩니다.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에 패배하여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물게 되면서 찰스 1세는 심각한 재정 압박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그는 다시금 의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며, 이는 의회의 권한이 다시 부상하는 계기가 됩니다.
1640
[의회 재소집: 왕권을 옥죄는 법안들]
주교 전쟁의 패배로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된 찰스 1세는 다시 의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회는 이를 기회 삼아 국왕의 실정을 비판하고, 3년마다 정기적으로 의회를 개최하고 의원 동의 없이 해산할 수 없도록 하는 등 국왕의 권한을 대폭 제한하는 법안들을 통과시켰습니다.
의회는 또한 국왕이 임의로 징수하던 선박세 등이 위법임을 인정하게 했으며,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서 왕 편에 섰던 귀족들을 처형하며 왕권을 더욱 압박했습니다. 이는 의회가 왕권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를 명확히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1641
[국왕의 의회 진입 시도: 피할 수 없는 전쟁의 서막]
의회가 찰스 1세의 실정을 규탄하는 '대간주'를 채택하고 아일랜드 반란 연루 의혹까지 제기하며 국왕을 압박하자, 위협을 느낀 찰스 1세는 근위병 500명을 이끌고 의회에 진입해 자신을 비판한 의원들을 체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의원들은 이미 도주한 뒤였습니다.
이 사건은 국왕과 의회 간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몰고 갔습니다. 국왕이 의회의 권위를 직접적으로 침해하면서, 대화의 여지는 완전히 사라지고 무력 충돌은 불가피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1642
[잉글랜드 내전 발발]
국왕 찰스 1세가 외국 용병으로 구성된 우세한 군대를 이끌고 의회파에 맞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왕권과 의회권이 충돌하는 잉글랜드 왕국의 운명을 건 피비린내 나는 내전의 서막이 올랐습니다.
1646
[의회파의 결정적 승리: 찰스 1세의 몰락]
의회파의 핵심 전력이었던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정예 '철기군'이 옥스퍼드를 함락시키며 전세가 의회파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습니다.
패배한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로 피신했지만, 스코틀랜드는 50만 파운드를 받고 그를 의회파에 넘겨주었습니다.
찰스 1세는 이후 와이트 섬에 유배되면서 왕권의 위신은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1차 내전의 사실상 종결을 의미하며, 왕권의 몰락과 의회 권력의 부상을 상징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649
[잉글랜드 연방(공화국) 수립: 세계 최초 군주 없는 공화정]
잉글랜드 의회는 왕정 폐지와 함께 공화정을 선포하고, '잉글랜드 연방'을 수립했습니다.
내전의 승리자이자 의회파의 수장이었던 올리버 크롬웰이 '호국경'으로 선출되며 공화정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잉글랜드 역사상 처음으로 왕이 없는 공화국이 탄생하는 세계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왕권신수설에 대항하여 의회의 권한이 비약적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며, 향후 유럽 각국의 정치 체제에 큰 영향을 미칠 선례가 되었습니다.
1651
[우스터 전투: 잉글랜드 내전의 최종 종결]
프랑스로 망명했던 찰스 2세를 지지하는 왕당파가 의회파와 마지막 내전을 이어갔으나,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군에 의해 '우스터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격파되었습니다.
이 전투로 9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잉글랜드 내전은 마침내 막을 내렸습니다.
1653
[크롬웰의 독재 시작: 공화국의 역설]
호국경에 오른 올리버 크롬웰은 잉글랜드 연방의 정치를 이끌었으나, 점차 의회와 마찰을 빚었습니다.
결국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사실상 군사 독재 체제를 구축하며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이로 인해 크롬웰은 잉글랜드 역사상 군사 독재자로 기록되게 됩니다. 그의 독재는 아이러니하게도 왕권에 대항하여 의회의 권한을 쟁취하려던 혁명의 목표와는 상반되는 결과였으며, 공화정 체제의 불안정성을 드러냈습니다.
1658
[크롬웰 사망: 공화정의 종말]
강력한 호국경이었던 올리버 크롬웰이 사망하자, 그가 이끌던 잉글랜드 연방은 지도력을 잃고 결국 붕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왕 없이 유지되던 공화정 체제는 그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습니다.
크롬웰의 사망 이후, 각 정파들은 서로에게 절대 권력을 주지 않기 위해 격렬한 대립을 이어갔습니다. 이는 결국 새로운 정치적 대안을 모색하게 만들었으며, 왕정 복고의 길을 열게 됩니다.
1660
[왕정 복고: 찰스 2세의 화려한 귀환]
크롬웰의 사망으로 공화정이 붕괴되자, 잉글랜드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습니다.
결국 의회는 프랑스로 망명해 있던 찰스 2세를 불러들여 왕위에 복귀시켰습니다.
런던에 입성한 찰스 2세는 잃어버렸던 왕권을 되찾으며 화려한 귀환을 알렸습니다.
찰스 2세는 즉위 후 자신의 아버지 처형에 서명했던 판사 13명을 처형하고, 올리버 크롬웰의 무덤을 파는 등 보복 정치를 펼쳤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재정난과 네덜란드와의 전쟁 패배 등으로 인기가 떨어지자,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가톨릭에 관용적인 정책을 추진하여 이후 명예혁명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