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쿠사
도시, 고대 도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7:50
시칠리아의 유서 깊은 고대 도시 시라쿠사는 기원전 734년 코린토스인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지중해 세계의 주요 세력이자 수학자 아르키메데스의 고향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로마 비잔티움 이슬람 노르만 등 다양한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663년부터 668년까지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역사적 건축물과 유적지로 유명합니다.
- 시라쿠사 건설
- 가모로이 권력 회복과 겔론의 참주 등극
- 히메라 전투 승리
- 히에론의 참주 등극 및 쿠마에 전투 승리
- 민주주의 정치 체제 도입
- 시켈리아 원정에서 아테네 격퇴
- 대 디오니시오스 1세의 카르타고 전쟁
- 티몰레온의 민주주의 체제 수립
- 아가토클레스의 참주 등극
- 히에론 2세의 평화와 번영 시대 개막
- 로마군의 시라쿠사 포위와 아르키메데스의 활약
- 시라쿠사의 로마 항복 및 아르키메데스 사망
- 비잔티움 제국의 시라쿠사 회복
- 비잔티움 제국 수도 역할
- 아글라브 토후국에 함락
- 노르만인의 시라쿠사 점령
- 하인리히 6세의 시칠리아 왕국 차지
- 시칠리아 만종 전쟁에서 아라곤 편 승리
- 1693년 시칠리아 대지진
- 현도 지위 회복
- 허스키 작전과 시라쿠사 점령
-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등재
BC 10C
[고대부터 인류 거주]
시라쿠사 주변 일대에서 스텐티넬로, 오니나 등 고대 마을들의 출토물이 발견되어, 고대 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했음을 보여줍니다.
시라쿠사와 그 주변 일대는 스텐티넬로 (Stentinello), 오니나 (Ognina), 플렘미리오 (Plemmirio), 마트렌사 (Matrensa), 코초판타노 (Cozzo Pantano) 그리고 미케네 그리스와 이미 관계를 맺었던 탑소스 (Thapsos) 등의 마을에서 나온 출토물들을 보았을 때, 고대 시대 이후로 인류가 거주해왔다.
BC 8C
[시라쿠사 건설]
고대 코린토스와 테네아에서 온 아르치아스가 이끄는 그리스 정착자들이 시라쿠사를 세웠습니다. 도시의 명칭은 인근 습지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집니다.
시라쿠사는 기원전 734년이나 733년에 오이키스테스 (식민지 개척자) 아르치아스가 이끄는 고대 코린토스와 테네아에서 온 그리스 정착자들이 세웠다. 시라쿠사 도시 명칭에는 Συράκουσαι ''시라코우사이'', Συράκοσαι ''시라코사이'' , Συρακώ ''시라코'' 등 여러 가지 증명된 변형들이 있다. 비비우스 세퀘스테르가 인용한 시라쿠사의 명칭 기원 추정에 첫 번째로는 스테파누스 비잔티우스가 ''시라코''라고 불린 시라쿠사의 습지 (λίμνη)가 있어서 그랬다는 것과 두 번째로는 마리키아노스의 ''페리에게시스''에서 아르치아스가 인근 습지의 이름을 도시에 붙였고, 따라서 ''시라코'' (그로 인한 ''Syrakousai'' 및 다른 이름)를 시라쿠사의 이름으로 갖게 되었다는 것이며, 이는 에피카르무스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시라쿠사 정착은 귀족 계층의 강인한 지도자 아르치아스가 정착자들에게 어떻게 재산을 분배할 것이고, 뿐만 아니라 정착지의 도로들을 어떻게 배치해야 하는지, 얼마나 넓어야하는지에 대한 계획들을 제시하는 등 계획된 일이었다.
BC 7C
시라쿠사는 성장하고 번성하여, 일부 시기에는 지중해에 있는 그 어떤 그리스 도시들 중에 가장 강력한 도시이기도 했다. 추가적으로 식민지들이 아크라이 (기원전 664년)에 세워졌다.
시라쿠사는 성장하고 번성하여, 일부 시기에는 지중해에 있는 그 어떤 그리스 도시들 중에 가장 강력한 도시이기도 했다. 추가적으로 식민지들이 아크릴라이 (기원전 7세기), 헬로루스 (기원전 7세기)에 세워졌다.
시라쿠사는 성장하고 번성하여, 일부 시기에는 지중해에 있는 그 어떤 그리스 도시들 중에 가장 강력한 도시이기도 했다. 추가적으로 식민지들이 카스메나이 (기원전 643년)에 세워졌다.
BC 6C
시라쿠사는 성장하고 번성하여, 일부 시기에는 지중해에 있는 그 어떤 그리스 도시들 중에 가장 강력한 도시이기도 했다. 추가적으로 식민지들이 카마리나 (기원전 598년)에 세워졌다.
BC 5C
[가모로이 권력 회복과 겔론의 참주 등극]
겔라의 통치자 겔론의 도움으로 하급 계층에게 축출되었던 최초 정착자 후손인 가모로이들이 권력을 되찾았으며, 겔론이 시라쿠사의 참주가 됩니다.
''가모로이''라 불린, 최초 정착자들의 후손들은 ''킬리키로이''라 불린 시라쿠사의 하급 계층들에게 축출당할 때까지 권력을 지녔었다. 그러나 젤라의 통치자 겔론의 도움 덕에, 기원전 485년에 가모로이들은 권력을 되찾았다. 겔론은 직접 시라쿠사의 참주가 되었으며, 겔라, 카마리나, 메가라의 많은 거주민들을 시라쿠사로 데려왔고, 티케 (Tyche)의 새로운 구역들과 도시 성벽 외각의 네아폴리스를 지었다. 그의 새 건설 계획에는 다모코포스가 설계한 신설 극장이 포함되었는데, 이 극장은 시라쿠사에 번성하는 문화를 만들어냈으며, 아이스킬로스, 메팀나의 아리오, 코린토스의 에우멜로스 같은 인물들을 끌어들였다.
[히메라 전투 승리]
아그리젠토의 테론과 동맹을 맺은 겔론이 하밀카르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에 대승을 거두고, 이를 기념하여 아테나 신전이 세워졌습니다.
강해진 시라쿠사는 시칠리아섬의 서쪽을 지배했던 고대 카르카고인들과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히메라 전투에서 아그리젠토의 테론과 동맹을 맺은 겔론은 하밀카르가 이끄는 카르카고군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 아테나에게 헌정된 신전 (오늘날에는 성당의 터)이 이 승리를 기념하며 시라쿠사에 세워졌다.
[히에론의 참주 등극 및 쿠마에 전투 승리]
겔론의 형제 히에론이 참주 자리를 이어받았으며, 쿠마에 전투에서 에트루리아를 상대로 승리했습니다. 그의 통치기는 시인들에게 찬양받았습니다.
겔론의 뒤를 기원전 474년에 쿠마에에서 에트루리아와 맞서 싸웠던, 그의 형제 히에론이 이어받았다. 그의 통치는 케오스의 시모니데스, 바킬리데스 그리고 히에론의 궁전을 방문했던 핀다로스 같은 시인들의 찬송을 받았다.
시라쿠사의 트라시불로스가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도입했다(기원전 467년).
[시켈리아 원정에서 아테네 격퇴]
시라쿠사인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아테네의 시켈리아 원정을 물리치고 승리하여 아테네 함선을 파괴하고 아테네군이 아사하게 만들었습니다.
기원전 5세기 후반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쓸 더 많은 자원을 구하던 아테네와 전쟁에 돌입하기도 했다. 시라쿠사인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의 적인 스파르타 출신의 장군의 도움을 얻어, 아테네군을 물리치고 그들의 함선을 파괴시키며 시칠리아섬에서 이들이 아사하게 내버려두었다 (시켈리아 원정 보기).
기원전 401년에, 시라쿠사는 키루스의 만병대에 300명의 호플리테스 부대와 장군 한명을 기여하였다.
BC 4C
[대 디오니시오스 1세의 카르타고 전쟁]
참주 대 디오니시오스 1세가 카르타고와 다시 전쟁을 벌였고, 카르타고군이 시라쿠사를 포위했으나 역병으로 물러났습니다.
그 뒤인 기원전 4세기에, 참주 대 디오니시오스 1세는 고대 카르타고와 다시 전쟁을 했고, 겔라와 카마리나를 상실했으나, 시칠리아섬 전역의 지배권을 유지했다. 분쟁이 끝나고나서 디오니시오스는 오르티기아에 거대한 요새를 짓고 시칠리아 모든 일대에 22a km 길이의 성벽을 쌓았다. 또다른 확장기에 낙소스, 카타니아, 렌티니가 파괴되자, 시라쿠사는 다시 한번 카르타고와 전쟁에 돌입했다 (기원전 397년). 여러 전운이 오고 간 후, 카르타고군은 가까스로 시라쿠사 공성전에 들어갔으나, 결국에는 역병으로 물러났다.
[영토 확장 및 무역 도시 건설]
조약을 통해 아드라논, 틴다리온, 타우로메노스 등 도시를 세우고 레기온을 정복하며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아드리아해 무역을 위해 안코나, 아드리아, 이사를 세웠습니다.
기원전 392년에 맺은 조약으로, 시라쿠사는 아드라논, 틴다리온, 타우로메노스 등의 도시를 세우고, 대륙에 있는 레기온을 정복하며 영토를 더욱 늘리게 되었다. 아드리아해에서 무역을 촉진시키기 위해 디오니시오스는 안코나, 아드리아 이사를 세웠다.
디오니시오스의 뒤를 소 디오니시오스가 이었으나, 기원전 356년에 디온에게 축출당하고 만다.
그러나 디온의 폭정은 그의 축출로 이어졌고, 디오니시오스가 기원전 347년에 권좌를 되찾았다.
디오니시오스는 기원전 344년에 시라쿠사를 시라쿠사인 장군 히케타스에게 포위당한다.
[티몰레온의 민주주의 체제 수립]
코린토스인 티몰레온이 디오니시오스를 몰아내고 히케타스를 패배시킨 후 시라쿠사에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세웠습니다.
다음 해에 코린토스인 티몰레온이 디오니시오스를 몰아내고 히케타스를 패배시킨 후에 시라쿠사에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세웠다.
[크리미수스 전투 승리]
티몰레온이 크리미수스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을 무찌르며 시라쿠사 세력 간의 내부 갈등을 해결하려 노력했습니다.
시칠리아섬에서 시라쿠사의 힘은 오랜 내부 갈등으로 약화되었고, 티몰레온은 크리미수스 전투 (기원전 339년)에서 카르타고군을 무찌르며, 이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다.
티몰레온이 죽고나자, 시라쿠사 세력들 간의 분쟁이 재발했고 기원전 317년에 쿠데타로 권력을 차지한 또다른 참주 아가토클레스의 등장으로 끝이 난다.
[아가토클레스의 시라쿠사 탈출 및 아프리카 공격]
아가토클레스가 시라쿠사 포위 중 소규모 함대로 도시를 탈출하여 카르타고의 아프리카 본토를 공격했습니다.
그는 카르타고와 전쟁을 돌입했다. 기원전 311년에 시라쿠사를 포위당했지만, 소규모 함대로 도시에서 탈출을 해낸다. 그는 카르타고의 아프리카 본토를 전쟁에 끌어들이며, 적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혀, 개연적 성공을 거뒀다. 시라쿠사 수비군은 자신들을 포위하던 카르타고군을 전멸시켰다. 하지만 아가토클레스가 결국엔 아프리카에서 패하고 만다.
BC 3C
[아가토클레스 사망 후 강화 조약]
아가토클레스 사망 후 강화 조약으로 카르타고가 시칠리아섬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얻어냈습니다.
이 전쟁은 아가토클레스가 사망한 이후 (기원전 289년) 카르타고가 시칠리아섬에 간섭하는 것을 막지 않겠다라는 강화 조약으로 끝이 났다.
카르타고군은 기원전 278년테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시라쿠시 공성전을 벌였다. 카르타고군은 시라쿠사의 도움 요청을 받아 에페이로스의 피로스 왕이 도착하자 물러섰다.
[히에론 2세의 평화와 번영 시대 개막]
히에론 2세가 권력을 장악하며 50년간의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 시기 시라쿠사는 고대 시대 가장 유명한 중심지 중 하나가 됩니다.
에페이로스의 짧은 통치 기간이 지난 후, 히에론 2세가 기원전 275년에 권력을 장악했다. 히에론은 50년 간의 평화와 번역의 시기를 열었으며, 이 시기 시라쿠사는 고대시대 가장 유명한 중심들 중 한 곳이 되었다. 그는 ''히에로니카 법전''을 간행했는데, 이 서적은 이후 로마인들이 시칠리아 행정 관리를 위해 채택되었다. 그는 또한 극장을 확장시키고 "히에론의 아라"이라는 거대하고 신설 제단을 지었다. 그의 통치기에 가장 유명한 시라쿠사인이며, 수학자이자 자연 철학자 아르키메데스가 살았다. 문학 관련 인물로는 테오크리토스 등 인물들이 있다.
[히에로니모스의 로마 동맹 파기]
히에론 2세의 후임인 히에로니모스가 로마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칸나에 전투에서 로마가 패하자 카르타고의 지원을 받아들였습니다.
히에론의 후임자인 젊은 시라쿠사의 히에로니모스 (기원전 215년부터 제위)는 로마가 칸나에 전투에서 패하자 로마와 동맹을 파기하고 고대 카르타고의 지원을 받아들인다.
[로마군의 시라쿠사 포위와 아르키메데스의 활약]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집정관이 이끄는 로마군이 시라쿠사를 포위했습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이 포위에 맞서 아르키메데스 갈고리 등 다양한 군사 장비를 발명하여 사용했습니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집정관이 이끄는 로마군은 기원전 214년에 시라쿠사를 포위했다. 그의 많은 발명품들 중에는 기원전 214년에 로마의 시라쿠사 포위에 맞서 사용된 아르키메데스 갈고리를 포함한 다양한 군사 장비들이 있었다.
[시라쿠사의 로마 항복 및 아르키메데스 사망]
3년간의 저항 끝에 시라쿠사가 로마군에 항복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르키메데스가 살해당하고 도시는 약탈당했으며, 로마의 시칠리아 통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시라쿠사는 3년 간을 버텼으나, 기원전 212년에 항복하고 만다. 로마군의 포위를 물리치는 시라쿠사인들의 성공들이 그들을 자만하게 했다. 기원전 212년, 로마군은 시라쿠사인들이 해마다 열리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축제에 참여한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소수의 로마군 병력이 밤을 틈타 도시에 접근하여 도시 외각으로 들어가기 위해 가까스로 성벽에 올라갔고 지원병력과 함께 곧 도시를 장악한다. 이 과정에서 아르키메데스가 살해당했지만, 주요 요새는 완강히 버텼다. 교섭과 같이 8달 동안의 포위를 한 후, 모에리스쿠스 (Moeriscus)라는 이름의 이베리아인 지휘관이 아레투사 분수 인근에 있던 로마군을 들여보냈다고 전해진다. 견제 공격이 일어나는 동안에, 정해진 신호에 모에리스쿠스는 요새문을 열었다. 친로마 세력의 주택에 경호 병력을 세운 뒤, 마르켈루스는 시라쿠사 약탈을 하였다. 수 년 간에 걸쳐 서서히 쇠퇴하고 있음에도, 시라쿠사는 로마의 시칠리아 통치 중심지이자 법무관의 근무지 지위를 유지했다.
469
469–477년간 반달족, 476–491년까지 오도아케르, 491–526년까지 테오도리크의 지배를 받은 후, 시라쿠사와 시칠리아섬은 535년 12월 31일부터 비잔티움 제국의 벨리사리우스에 의해 로마의 지배권으로 회복되었다.
535
[비잔티움 제국의 시라쿠사 회복]
비잔티움 제국의 장군 벨리사리우스에 의해 시라쿠사와 시칠리아섬이 로마의 지배권으로 회복되었습니다.
469–477년간 반달족, 476–491년까지 오도아케르, 491–526년까지 테오도리크의 지배를 받은 후, 시라쿠사와 시칠리아섬은 535년 12월 31일부터 비잔티움 제국의 벨리사리우스에 의해 로마의 지배권으로 회복되었다.
663
[비잔티움 제국 수도 역할]
콘스탄스 2세 황제의 거처였을 뿐만 아니라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및 모든 시칠리아 교회의 메트로폴리스 역할을 하게 됩니다.
663년부터 668년까지 콘스탄스 2세 황제의 거처였을 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의 수도 및 모든 시칠리아 교회의 메트로폴리스였다
827
시라쿠사는 827–828년에 거의 1년 간을 아글라브 토후국에게 시라쿠사 공성전을 포위당했으나, 비잔티움의 지원 병력이 함락을 막아냈다.
878
[아글라브 토후국에 함락]
점점 증가하는 이슬람교도의 시칠리아 정복에 대한 비잔티움의 저항 중심지였던 시라쿠사가 아글라브 토후국에게 함락되었습니다.
878년 5월 20/21일에 벌어진 또다른 공성전에서 아글라브 토호국에게 함락되기 이전까지 점점 증가하는 이슬람교도의 시칠리아 정복에 대한 비잔티움의 저항 중심지였다.
1038
[비잔티움 제국의 시라쿠사 탈환]
비잔티움 제국의 장군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가 시라쿠사를 탈환하고, 성녀 루치아의 성물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습니다.
1038년에 비잔티움 제국의 장군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는 시라쿠사를 탈환해내고, 성녀 루치아의 성물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다.
1085
[노르만인의 시라쿠사 점령]
시칠리아의 루지에로 1세와 그의 아들 오트빌의 주르댕이 이끄는 노르만인들이 오랜 포위 끝에 시라쿠사에 입성하여 점령했습니다.
1085년에 노르만인들은 시칠리아의 루지에로 1세와 시라쿠사 후작으로 임명받은 그의 아들 오트빌의 주르댕이 여름 기간 오랜 포위 끝에 남아있는 아랍의 요새들 중 하나였던 시라쿠사에 입성했다.
1194
1194년에,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6세는 시라쿠사를 포함한 시칠리아 왕국을 차지했다.
1205
교역 성장의 해택을 받기도 했던, 악명높은 제독이자 해적 알라만노 다 코스타의 관할하 제노바 공화국인들의 짧은 통치기 (1205–1220) 이후, 시라쿠사내 왕의 권위를 프리드리히 2세가 재차 주장하였다.
1298
[시칠리아 만종 전쟁에서 아라곤 편 승리]
시칠리아 만종 전쟁에서 시라쿠사가 아라곤 편을 들어 앙주 세력을 몰아내고 스페인 정권으로부터 큰 특권을 얻었습니다.
시칠리아 지배권을 두고 카페 앙주 가문과 아라곤 왕조 간에 일어난 시칠리아 만종 전쟁에서, 시라쿠사는 1298년에 아라곤 편을 들고 앙주 세력을 몰아내어, 보상으로 스페인 정권으로부터 큰 특권들을 얻었다.
1542
시라쿠사는 1542년과 1693년 두 차례의 파괴적인 지진, 그리고 1729년의 역병에 타격을 입었다.
1693
[1693년 시칠리아 대지진]
파괴적인 지진으로 발 디 노토 전체와 함께 시라쿠사의 모습이 영원히 바뀌었고, 이후 시칠리아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되었습니다.
시라쿠사는 1542년과 1693년 두 차례의 파괴적인 지진, 그리고 1729년의 역병에 타격을 입었다. 17세기의 파괴는 발 디 노토 전체 뿐만 아니라 시라쿠사의 모습을 영원히 바꿔놓았고, 이후에 이 도시들은 남부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예술 표현 중 하나로 여겨지는 시칠리아 바로크의 전형적인 형식을 따라 재건되었다.
1729
시라쿠사는 1542년과 1693년 두 차례의 파괴적인 지진, 그리고 1729년의 역병에 타격을 입었다.
1837
[콜레라 발병과 폭동]
콜레라 발병이 부르봉 정권에 반대하는 폭동으로 이어졌고, 이에 대한 처벌로 현도가 노토로 바뀌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1837년 시라쿠사의 콜레라 발병은 부르봉 정권에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이에 대한 처벌로 현도를 노토로 바꿨지만, 시라쿠사인들이 1848년 시칠리아 독림 혁명에 동참하는등, 동요는 완전히 잦아들지 않았다.
1865
1865년 이탈리아 통일 이후, 시라쿠사는 현도 지위를 되찾았다.
1870
1870년에 시라쿠사의 성벽을 허물고 본토와 오르티기아섬을 연결하는 다리가 세워졌다.
1871
다음 해에 철도의 접속로가 세워졌다.
1943
[허스키 작전과 시라쿠사 점령]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허스키 작전')으로 영국군이 시라쿠사를 점령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도시는 폭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인 1943년에 연합군과 나치 독일 양측의 폭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의 암호명 ''허스키 작전''이 영국군의 시칠리아섬 남동쪽 공격과 함께 1943년 7월 9-10일 사이 밤에 이뤄졌다. 작전 계획은 버나드 로 몽고메리의 제8군 휘하 부대인 영국 제5 보병 사단이 침공 첫 날에 시라쿠사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 작전은 계획에 따라 성공적으로 이뤄졌고, 영국군은 작전 첫 번째 밤에 시라쿠사를 점령해낸다. 시라쿠사의 항구는 영국 왕립 해군의 기지로 쓰였다.
2005
2005년 이래로, 시라쿠사 도시 전체는 시라쿠사도에 있는 판탈리카 바위 네크로폴리스와 같이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되어있다. 세계 문화 유산 등재는 세계인의 공동 유산으로 뛰어난 문화적 환경적 중요성을 지닌 지역을 분류하고 지명하고 보존하는 데 목표를 하고 있다. 잠재적 후보들을 평가하는 등재 결정 위원회는 시라쿠사를 선택한 이유를 "시라쿠사에 위치한 기념물과 고고학적 유적(오르티지아의 핵심부와 도시 지역 전체에 위치해 있는 유물)은 그리스 문화, 고대 로마, 바로크 등 여러 문화를 아우르는 훌륭한 건축 창조물의 가장 훌륭한 예"이고 그 뒤를 이어 고대 시라쿠사는 "탁월한 보편적 의미를 가지는 사건, 사상, 문학 작품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