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매일신보

신문, 언론사, 항일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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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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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언론사, 항일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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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언론의 상징 대한매일신보! 1904년 영국인 베델이 창간하여 일제의 검열을 피하며 민족 의식을 고취했습니다. 양기탁 신채호 박은식 등 애국지사들의 붓끝으로 민족의 독립 정신을 일깨웠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며 전 국민적 저항을 이끌어냈습니다.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1910년 한일병합까지 항일 논조를 유지했으나 결국 일제에 의해 매일신보로 강제 전환되며 그 역할이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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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

[일제의 눈을 속인 영리한 전략, 전 국민의 지지를 얻다!]

사장이 영국인 베델이었던 덕분에, 대한매일신보는 통감부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자유롭게 항일 논설을 실으며 일반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고, 당시 가장 많은 발행 부수를 자랑했습니다.

양기탁, 신채호, 박은식, 장도빈 등 애국지사들이 주요 논설진으로 참여했습니다.

양기탁은 편집과 경영의 실질적인 책임을 맡았으며, 대부분의 주요 논설을 직접 집필했습니다.

[항일 언론의 깃발, 대한매일신보가 세상에 나오다!]

러일전쟁 취재를 위해 대한제국에 머물던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이 양기탁 등 민족 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습니다.

이 신문은 이후 일제강점기에 '서울신문'의 전신인 '매일신보'로 이름이 바뀌게 됩니다.

영문판 제호는 《The Korea Daily News》였습니다.

1907

[탄압에도 굴하지 않는 저항! 일제에 맞서다.]

대한매일신보가 일제 침략에 정면 저항하자, 일제는 창간주 어니스트 베델을 1907년과 1908년에 걸쳐 두 차례나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실질적 책임자 양기탁도 국채보상 의연금 횡령이라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으나, 결국 무죄로 풀려났습니다.

이러한 탄압 속에서도 대한매일신보는 한일병합 직전까지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의 부당함을 비판하며 끈질긴 항일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나라를 구하려는 불꽃,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다!]

대한매일신보는 전 국민적인 애국운동인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이를 주도했습니다.

1907년 4월에는 국채보상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할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직접 설치했습니다.

신문은 일제 침략을 비판하는 항일 논조를 꾸준히 유지하며,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신교육 및 애국계몽운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908

[발행인 명의 변경]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 명의가 영국인 앨프리드 W.

마넘(Alfred W.

Marnham)으로 변경되었습니다.

1909

[대한매일신보의 방패, 베델 서거!]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인이자 핵심적인 방패막이 역할을 했던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이 서거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신문의 운명에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10

[슬픈 종말의 시작, 통감부의 기관지가 되다]

베델의 서거 후, 대한매일신보는 결국 통감부에게 매수되어 그들의 기관지로 전락했습니다.

이는 항일 언론으로서의 생명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슬픈 전환점이었습니다.

[새로운 발행인 체제]

통감부 매수 후,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이 이장훈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매일신보로 강제 전환되며 역사 속으로…]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이후, 대한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관지인 《매일신보》로 강제 전환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로써 대한민국 언론사에 길이 남을 항일 언론의 역할은 막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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