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고
역사서, 발해 연구, 남북국시대론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7:46
조선 정조 시대 실학자 류득공이 발해사를 체계화한 역사서입니다. 세계 최초로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으로 칭하는 남북국사관을 제시하며 발해를 우리 민족사에 편입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권본과 4권본이 있으며 특히 4권본은 발해 강역 인식을 현대 역사학과 유사하게 확장한 점이 높이 평가됩니다.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역사 인식을 확립하는 데 기여한 중요한 저작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698
[대조영, 진국왕 즉위 및 발해 건국]
고구려의 장수 대조영이 말갈과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해 동모산을 거점으로 '진(震)'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진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발해의 시작입니다.
고구려의 장수였던 대조영은 진국공 걸걸중상의 아들로, 아버지의 사망과 걸사비우의 죽음 이후 이를 피해 도망하다가 천문령에서 고구려와 말갈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 이해고를 크게 격파했습니다. 이후 걸사비우의 무리를 병합하여 읍루족이 살았던 동모산을 거점으로 말갈과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였고, 성력 원년(698년)에 나라 이름을 진(震)이라고 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진국왕이 되었습니다.
713
[발해국으로 국호 변경]
당 현종이 고왕 대조영을 발해군왕에 책봉하고 그 땅을 홀한주로 삼으면서, 나라 이름이 공식적으로 '발해(渤海)'로 바뀌었습니다.
당나라 당 현종 2년(713년)에 고왕 대조영을 발해군왕에 책봉하고 그 땅을 홀한주로 삼자 이때부터 나라 이름을 발해(渤海)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732
[발해 무왕, 당나라 등주 공격 및 승리]
발해 무왕 대무예는 대장 장문휴를 시켜 당나라 등주를 바다를 통해 공격했고, 등주자사 위준을 죽이며 큰 승리를 거두어 발해의 국력을 과시했습니다.
무왕 대무예는 고왕 대조영의 아들로서 인안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개원 20년(732년)에 대장 장문휴를 시켜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지금의 중국 산동성 봉래, 용구 등의 동쪽 지역)를 공격하여 등주자사 위준을 죽이고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762
[발해 문왕, 발해국왕 책봉]
발해 문왕 대흠무가 당나라 안록산과 사사명의 내란을 소탕하는 데 협조한 공로로 당나라로부터 정식으로 발해국왕에 책봉되었습니다. 이는 당나라가 발해를 공식 국가로 인정한 것을 의미합니다.
문왕 대흠무는 무왕 대무예의 아들로서 당나라에서 안록산과 사사명이 내란을 일으키자 이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을 소탕하는 데 협조했습니다. 이 공로로 보응 원년(762년)에 발해국왕에 책봉되었습니다. 당나라는 이때 비로소 명목적이지만 발해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925
[요나라의 발해 침공 시작]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해에는 수도 홀한성이 함락되며 발해가 멸망하게 됩니다.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는 신책 4년(925년) 발해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해인 천현 원년(926년)에는 발해의 부여성이 함락되고 뒤이어 발해의 수도인 홀한성마저 함락되었습니다. 요 태조 야율아보기는 발해국을 동란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수도인 홀한성을 천복성으로 개칭했으며, 태자인 야율배를 인황왕으로 삼아 발해 지역의 동란국을 통치하도록 했습니다.
934
[발해 세자 대광현, 고려로 망명]
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선의 세자 대광현이 수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려로 망명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은 그들에게 왕실 성명을 하사하고 높은 대우를 해주었습니다.
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선의 세자 대광현이 고려 태조 17년(934년) 7월에 무리 수만 명을 이끌고 고려로 도망했습니다. 태조 왕건은 발해의 세자 대광현에게 왕계라는 성명을 하사하고 왕실 호적에 붙여주었으며, 그에 딸린 관리들에게 작위를 주고 병사들에게는 밭과 집을 하사하여 발해 유민을 포용했습니다.
938
고려 태조 21년(938년)에 발해의 유민 박승이 3천여 호를 이끌고 고려로 도망을 왔습니다.
981
[정안국 왕 오현명, 송나라에 거란 토벌 제안]
발해를 계승한 정안국의 왕 오현명이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거란족 토벌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는 발해 유민들의 독립 의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발해를 계승한 정안국의 왕 오현명은 본래 고구려 땅에 살던 발해 유민으로, 송나라 북송 태종 6년(981년)에 여진 사신을 통하여 표문을 올렸습니다. 그는 최근 부여부가 거란에서 등을 돌리고 정안국에 귀순했으니 곧 거란이 쳐들어올 것이라면서, 송나라와 정안국이 힘을 합쳐 거란을 토벌하자고 제안했습니다.
1018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정안국 사람 골수가 고려로 망명하였다고 합니다.
1287
[이승휴, '제왕운기' 저술 및 발해사를 한국사에 편입]
고려 시대 학자 이승휴가 한국과 중국의 역사를 시로 쓴 '제왕운기'를 저술했습니다. 이 책은 최초로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로 인식하고 편입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큽니다.
고려 시대의 학자 이승휴가 충렬왕 13년(1287년) 한국과 중국의 역사를 시로 쓴 역사책 《제왕운기》를 저술했습니다. 이 책은 최초로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로 보았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습니다.
1675
[북애자, '규원사화' 저술]
조선 숙종 때 북애자가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역사서 '규원사화'가 편찬되었습니다. 이 책의 진위 여부는 현재도 논쟁 중입니다.
조선 숙종 원년(1675년)에 북애자가 저술하였다고 하는 역사서 《규원사화》가 편찬되었습니다. 후대에 조작된 위서라는 주장도 있고, 진서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1784
[류득공, 《발해고》 1권본 완성]
조선 정조 8년에 규장각검서 류득공이 발해에 관한 역사서인 《발해고》 1권본을 완성했습니다. 이는 발해사를 체계화한 중요한 업적입니다.
조선 정조 8년(1784년)에 규장각검서로 일하던 실학자 류득공이 발해에 관해 저술한 역사서 《발해고》의 1권본을 완성했습니다. 류득공은 발해에 대한 체계적인 역사서가 없음을 통탄하며 조선, 중국, 일본의 역사서 24종을 참고하여 직접 저술했습니다. 이 책은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으로 칭하는 남북국사관을 창조한 서적으로 평가받습니다.
1811
조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순조 11년(1811년)에 편찬한 우리나라 강역에 관한 역사지리서입니다.
1935
1935년 만주 랴오둥(遼東)의 역사학자인 진위푸(金毓黻, 김육불)가 저술한 발해의 역사서입니다.
1940
[만주 역사학자 김육불, 발해 대위해왕 존재 확인]
1940년대에 만주의 역사학자 진위푸(김육불)에 의해 발해 대현석왕과 대인선왕 사이에 대위해왕이 있었다는 사실이 비로소 확인되었습니다.
왕 대현석(大玄錫)과 왕 대인선(大諲譔) 사이에 적어도 왕 대위해(大瑋瑎) 한 명이 더 있었다는 사실이 1940년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만주의 역사학자인 진위푸(金毓黻, 김육불)에 의해 확인되었습니다. 류득공이 《발해고》를 저술할 당시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2000
[송기호 교수, 《발해고》 한국어 번역서 출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송기호가 옮긴 《발해고》 한국어 번역서가 홍익출판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이자 발해사 전공자인 송기호가 옮긴 《발해고》 한국어 번역서가 홍익출판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이후 2020년과 2021년 개정판으로도 다시 출간되었습니다.
2018
[김종복 교수, 《정본 발해고》(4권본) 한국어 번역서 출간]
안동대학교 사학과 김종복 부교수가 류득공의 《발해고》 4권본을 옮긴 《정본 발해고》 한국어 번역서를 출간했습니다.
안동대학교 사학과 부교수이자 발해사 및 사학사를 연구하는 김종복이 류득공의 《발해고》 4권본을 옮긴 《정본 발해고》 한국어 번역서가 책과 함께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2021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이자 발해사 전공자인 송기호가 옮긴 《발해고》의 개정판이 2000년과 2020년에 발간된 책의 개정판으로 홍익출판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