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문자, 서적,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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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15- 05:3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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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문자, 서적,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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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은 1443년 세종대왕이 백성들이 쉽게 글을 익히고 소통할 수 있도록 창제한 위대한 문자이자 그 해설서이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한글의 시초가 되었다. 발음기관을 본떠 만든 세계 최초의 과학적인 글자로 배우기 쉽고 쓰기 편리하다는 장점을 지닌다. 1446년 반포된 후 양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널리 보급되어 오늘날 한국어의 공식 문자로 자리 잡았다. 해례본은 1940년 기적적으로 발견되어 국보 및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며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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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3

[훈민정음 28자 창제]

세종대왕이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게 쓰고 읽을 수 있도록, 기존 한자로는 표현하기 어려웠던 우리말 소리를 담아낼 획기적인 문자, 훈민정음 28자를 직접 만들었다.

이는 백성들이 문맹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뜻을 펼칠 수 있게 한 위대한 발명이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 후 집현전 학자들(성삼문, 신숙주, 최항, 정인지, 박팽년)에게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 발간과 함께 악장 『동국정운』 편찬을 명하고, 최항과 박팽년에게는 『고금운회거요』의 번역을 지시하는 등 새로운 문자에 대한 연구와 활용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444

[훈민정음 반포 반대 상소 발생]

훈민정음 반포를 앞두고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를 비롯한 학자들이 훈민정음이 중국 문화를 모욕하고, 사대부의 기강을 무너뜨릴 수 있다며 강력하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백성을 위한 혁신이 기득권층의 반대에 부딪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세종대왕은 상소에 분노하여 최만리 등을 의금부에 투옥했으나 다음 날 석방했다. 최만리는 이 사건 이후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 과정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일화로 남아있다.

1445

[훈민정음을 활용한 『용비어천가』 편찬 시작]

훈민정음이 공식 반포되기 전부터 이미 이 새로운 문자를 활용하여 『용비어천가』를 편찬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는 훈민정음이 실제 언어 생활과 문학에 적용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시작이자, 그 실용성을 증명하는 사례가 되었다.

1446

[훈민정음 공식 반포 및 『해례본』 간행]

백성들을 위한 혁신적인 문자, 훈민정음이 마침내 공식적으로 세상에 반포되었다.

이때 함께 간행된 『훈민정음 해례본』은 문자의 창제 목적, 원리, 사용법 등을 상세히 담아 그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가치를 더욱 높였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의 보급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하급 관리 채용 시 훈민정음을 시험 과목에 추가하고, 『삼강행실도』 같은 윤리 서적을 훈민정음으로 풀어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심지어 사서(四書) 번역, 백성들의 관가 서류 작성, 형률 번역, 궁중 여인들의 학습 등 전방위적인 사용을 장려했으며, 이 정책들을 조선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명문화하여 훈민정음이 민간에 빠르게 확산되는 기반을 마련했다.

1459

[『월인석보』에 훈민정음 언해본 수록]

세조 5년에 간행된 불경 언해집 『월인석보』 첫머리에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도 훈민정음의 본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로 번역한 『훈민정음 언해본』이 실려 간행되었다.

이는 훈민정음의 실용성과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

『월인석보』에 수록된 훈민정음 언해는 한문 원문 아래 한글 협주와 풀이가 있어 일반 백성들이 훈민정음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이는 한글 보급을 위한 중요한 노력 중 하나였다.

1940

[500년 만에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 안동에서 발견]

조선 시대의 귀중한 기록으로만 알려졌던 『훈민정음 해례본』이 약 500년 만에 경상도 안동의 한 가문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되었다.

이 발견은 한글 창제의 독창성과 과학성을 명확히 밝혀주는 세계적인 보물로 평가받았다.

이한걸 가문이 소장했던 이 해례본은 그의 선조 이천이 세종대왕에게 직접 하사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연산군의 한글 탄압 정책 때문에 앞의 두 장이 찢긴 채 보관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큰 기와집 10채 값에 해당하는 거금인 1만원으로 간송 전형필 선생이 이 책을 입수하여 한국전쟁 중에도 목숨을 걸고 지켰다. 광복 후 영인본을 제작·배포하며 세상에 그 존재를 알렸다.

1962

[『훈민정음 해례본』 국보 제70호 지정]

한글 창제의 원리와 우수성을 담은 『훈민정음 해례본』이 그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다.

이는 한국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1997

[『훈민정음 해례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성을 전 세계에 알린 『훈민정음 해례본』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며 인류 공동의 귀중한 유산임을 공인받았다.

이는 한글의 우수성이 세계적으로 공인된 상징적인 사건이다.

2008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발견 및 소유권 분쟁 시작]

2008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또 다른 『훈민정음 해례본』(상주본)이 발견되었으나, 발견자와 골동품상 간의 치열한 소유권 분쟁에 휩싸였다.

이로 인해 상주본은 여전히 복잡한 법적 다툼 속에 놓여 있다.

대법원은 골동품상의 소유권을 인정했으나, 발견자는 절도 혐의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발견자는 상주본 기증의 대가로 1천억 원을 요구하는 등 무리한 주장을 이어가고 있으며, 보존 상태 또한 간송본에 비해 매우 나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소장처가 불분명한 상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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