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 사회운동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7:40
- 불교 개혁과 조국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민족의 사표. -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로서 다방면에 걸쳐 활약. - 3.1운동 민족대표로 참여 옥중에서도 독립 의지 표명. - 시집 《님의 침묵》으로 한국 저항문학의 금자탑을 세움. - 불교 대중화와 자주화 승려의 생활 개선을 주장한 선구자. -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저항 정신을 유지.
- 탄생
- 소년 시절과 사회 변동의 목격
- 불교 입문
- 정식 출가와 '만해' 아호 사용
- 일본 유학 및 신문물 시찰
- 조선불교유신론 집필 시작
- 불교 경전 한글화 노력
- 승려 결혼 자유화 주장
- 친일불교동맹 반대 및 조선불교유신론 탈고
- 임제종 창립 및 친일불교 규탄
- 만주 독립군 지원 활동 및 총상
- '만해' 필명 첫 사용
- 조선불교유신론 출판
- 조선불교청년동맹 결성
- 불교대전 간행
- 월간 잡지 《유심》 창간
- 3.1 운동 준비 참여
- 3.1 운동 민족대표로 투쟁하다
- 시집 《님의 침묵》 출판
- 신간회 결성 주도 및 활동
- 광주항일학생운동 지지 시도
- 비밀결사 만당 영수 추대
- 대처승으로서 재혼
- 월간 《불교》지 인수 및 활동
- 장편소설 《흑풍》 연재
- 만당사건으로 재투옥 및 친일파 배척
- 일제의 강요에 대한 비타협적 저항
- 김동삼 장례 주관
- 전쟁 및 학도병 거부 운동
- 창씨개명 반대 운동
- 조선인 학병 출정 반대 운동
- 심우장에서 입적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1879
[탄생]
충청도 결성현(현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양반 사대부 가문 출신인 한응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한학을 배웠고 9세에 문리에 통달해 신동이라 칭송받았다.
1894
[소년 시절과 사회 변동의 목격]
16세에 고향 홍성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갑오농민운동과 청일전쟁 등 격동의 시기를 겪었다.
이듬해 부친이 동학군 방어 활동 후 사망하면서 삶에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1896
[불교 입문]
18세에 고향을 떠나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하여 불교에 귀의했다.
세상에 대한 관심과 생활 방편으로 머슴살이를 시작했으나, 곧 정식 승려가 되었다.
이는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운동 등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오세암에서 불교 기초 지식과 선(禪)을 닦으며 대장경을 열람하는 등 교학적 관심에 집중했다.
1898
[첫 번째 결혼]
20세에 전정숙과 결혼했으나, 이후 승려의 길을 걷게 되면서 아들을 얻고도 백담사로 출가하여 외면하게 된다.
1904
[아들 한보국 출생]
첫 번째 부인 전정숙과의 사이에서 아들 한보국이 태어났다.
그러나 이미 백담사에서 출가한 상태였고, 이후 아들과의 관계는 소원했다.
1905
[정식 출가와 '만해' 아호 사용]
강원도 백담사에서 김연곡 스님을 은사로 정식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이때 법호는 '용운', 아호는 '만해'로 정했다.
이후 불교 활동에 전념하며 양치차오의 저서 등을 통해 근대 사상을 접했다.
[을사늑약 체결 목격]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현실을 목도하며 세계 동향을 알기 위해 해외여행을 계획했으나 실패하고 귀국하여 석왕사에서 참선 생활을 했다.
1908
[일본 유학 및 신문물 시찰]
명진학교(현 동국대학교) 수학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등을 주유하며 신문물을 시찰하고, 조동종대학에서 불교와 서양 철학을 공부하며 최린 등 독립지사들과 교류했다.
이는 그의 불교관과 독립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09
[조선불교유신론 집필 시작]
《조선불교유신론》 집필을 시작하며 불교 개혁에 대한 그의 사상을 체계화하기 시작했다.
이 저서는 1913년에 간행되어 불교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10
[불교 경전 한글화 노력]
불교 경전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여 대중에게 널리 보급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방대한 대장경을 쉽게 옮기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역설하며 불교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아무리 좋은 말씀도 이해를 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라 주장하며, 한문이나 산스크리트어로 된 경전을 한글로 풀어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했다.
[승려 결혼 자유화 주장]
승려의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치며 중추원에 관련 문건을 제출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금혼은 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친일불교동맹 반대 및 조선불교유신론 탈고]
친일 성향의 이회광이 추진하는 한일불교동맹에 맞서 이를 분쇄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백담사에서 한국 불교 개혁의 방향을 제시한 역작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했다.
1911
[임제종 창립 및 친일불교 규탄]
친일 불교 행위를 규탄하기 위해 박한영 등과 함께 송광사, 범어사 등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했다.
이 과정에서 송광사에 임제종 종무소를 설치하고 관장에 취임하며 한국 불교의 자주화를 이끌었다.
[일제 사찰령 공포에 맞서다]
일제가 한국 불교를 억압하기 위해 제정한 사찰령이 공포되자, 이에 맞서 한국 불교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노력을 더욱 강화했다.
1912
[만주 독립군 지원 활동 및 총상]
만주 동북삼성의 독립군 훈련장을 방문하여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고취하는 데 전력했다.
이 과정에서 일진회 첩자로 오해받아 목에 총상을 입고 마취 없이 총알을 제거하는 고통스러운 수술을 감수했다.
1913
['만해' 필명 첫 사용]
자신의 대표 저서인 《조선불교유신론》의 일부를 조선불교월보에 기고하며 '만해생'이라는 필명을 문헌상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는 그가 '만해'라는 이름으로 대중과 소통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중요한 지점이다.
[조선불교유신론 출판]
한국 불교의 침체와 낙후성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한 역작 《조선불교유신론》을 정식 출판했다.
이는 당시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며 그의 불교 사회 혁신 사상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14
[조선불교청년동맹 결성]
불교 포교의 보편화와 대중화를 위해 조선불교청년동맹을 결성하고 정교분리, 불교 종단 통일, 불교의 사회적 진출 등을 강령으로 제시했다.
청년 운동을 통해 대중불교를 확산하고자 했다.
[불교대전 간행]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에 입각하여 불교 개혁과 현실 참여를 주장하는 《불교대전》을 간행했다.
이는 대장경의 요지를 발췌하여 한글로 옮긴 것으로, 한국 불교 대중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불교대전》은 현대 한국 불교 이론서와 성전들의 효시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18
[월간 잡지 《유심》 창간]
제자 춘성 등과 함께 월간 불교잡지 《유심》을 창간하여 불교 논설뿐 아니라 계몽적 글과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를 발표하며 문학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는 불교 홍보와 함께 계몽, 자각, 민족정신 고취에 기여했다.
1919
[3.1 운동 준비 참여]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동하여 1월부터 전국적인 만세 운동 준비에 참여했다.
백용성 등 불교 지도자와 손병희 등 천도교, 기독교 지도자들과 연대하여 독립선언서 내용을 논의했다.
[3.1 운동 민족대표로 투쟁하다]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탑골공원에서 만세 운동에 가담했다가 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었다.
옥중에서도 '조선 독립의 서'를 집필하는 등 독립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독립선언서 내용에 대해 최남선과 의견 충돌을 겪었으나, '최후의 일인까지 쾌히 우리의 의사를 발표하자'는 공약 제3조가 수용되었다. 수감 중 나약한 민족대표들에게 인분을 퍼부었다는 일화는 그의 강인한 정신을 보여준다. 옥중에서 작성된 '조선 독립의 서'는 극비리에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 보도되어 세계에 알려졌다.
1922
[전조선학생대회 강연]
전조선학생대회에 초빙되어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강연을 펼쳤다.
그의 연설 능력은 탁월하여 청중의 열광을 이끌어냈고, 결국 다음 연사가 강연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1926
[시집 《님의 침묵》 출판]
한국 저항문학의 금자탑이자 대표작인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했다.
시집 속 '님'은 조국, 부처, 연인 등 다의적 의미를 지니며 일제의 검열을 피하면서 민족적 현실과 이상을 노래했다.
산문시 형태를 통해 근대 자유시 완성에도 기여했다.
《님의 침묵》은 충청도 방언과 토속어가 사용되어 향토적 정감을 더하며, 민중정신을 반영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님은 갔습니다'로 시작하는 이 시집은 당시 자유주의적 연애시와 달리 민족의 주체적 자세를 담아 높은 수준의 민족문학을 보여주었다.
1927
[신간회 결성 주도 및 활동]
종교, 사회단체를 망라한 사회단체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28년에는 신간회 경성지회 회장으로 피선되어 허정숙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29
[광주항일학생운동 지지 시도]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민족적·민중적 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총독부 밀정에 발각되어 무산되었다.
1930
[비밀결사 만당 영수 추대]
김법린 등이 조직한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이는 불교계를 통한 항일 운동의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1931
[대처승으로서 재혼]
53세의 나이에 13살 연하의 유숙원과 재혼하며 자신이 주장했던 승려의 결혼 자유화를 몸소 실천했다.
유숙원은 결혼 전 간호사로 일했다.
[월간 《불교》지 인수 및 활동]
월간 《불교》지를 인수하여 불교사 사장으로 취임하고 많은 논설을 발표하며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비판하고 승려의 자질 향상, 생활불교 등을 제창했다.
1933
[심우장 건립 시작]
김벽산 스님이 기증한 터에 심우장 건립을 시작했다.
이때 총독부 돌집을 마주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짓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후 심우장은 그의 여생을 보낸 곳이자 서울시 기념물이 되었다.
1935
[장편소설 《흑풍》 연재]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청나라를 배경으로 억압에 대한 투쟁 정신과 여성 해방 문제를 은유적으로 묘사하여 일제의 검열을 피하면서도 항일 정신과 반봉건 사상을 드러냈다.
1937
[만당사건으로 재투옥 및 친일파 배척]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의 배후자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재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친일로 변절한 최남선에게 '내가 아는 육당은 이미 죽었소'라며 냉정하게 대하는 등 절개를 지켰다.
[일제의 강요에 대한 비타협적 저항]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 참배와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고, 일본식 호적에 이름조차 올리지 않는 등, 식민 통치에 대한 비타협적인 저항을 이어갔다.
[김동삼 장례 주관]
서간도 독립운동 지도자 김동삼이 경성감옥에서 사망하자, 아무도 거두지 않는 그의 시신을 홀로 수습하여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렀다.
이는 그의 강직한 지조와 동지에 대한 의리를 보여주는 일화다.
1938
[전쟁 및 학도병 거부 운동]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반대하며 학도병 거부 운동을 벌였다.
일제에 협력하는 글이나 강연을 일체 거부하며 굴하지 않는 독립사상을 견지했다.
1940
1943
[조선인 학병 출정 반대 운동]
일본이 조선인 학생들을 전쟁에 동원하려 하자 학병 출정을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하며 끝까지 민족의 독립을 외쳤다.
1944
[심우장에서 입적]
평생을 조국 독립과 불교 개혁에 헌신하며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다가, 성북동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고생하다 입적했다.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의 독립을 1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1945
[조국 광복, 염원 끝에 찾아오다]
그가 입적한 지 불과 1년 후, 일본 제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며 조선은 광복을 맞이했다.
평생 염원했던 조국의 독립을 끝내 생전에 보지 못하고 영면했다.
1962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지대한 공헌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며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1967
[만해대선사비 건립]
그가 독립 선언서를 낭독했던 탑골공원에 승려 운허에 의해 '용운당 만해 대선사비'가 세워져 그의 정신을 기리게 되었다.
1989
[생가지 기념물 지정 및 복원]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의 생가지가 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되었다.
이듬해인 1990년에는 생가가 복원되고 기념관이 건립되어 그의 발자취를 되새기는 공간이 마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