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인, 사회운동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7:38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해방 후 언론 사상계를 창간 지성계를 이끌다. 이승만·박정희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의 선봉에 서다. 의문사로 한국 현대사의 미스터리로 남은 행동하는 지식인이자 민족주의자.
- 학생 대표로 독립운동 시위 주도
- 일본군 학도병 자원입대, 그리고 놀라운 탈출 계획
- 쉬저우에서의 극적인 일본군 탈영
- 충칭 임시정부 합류
- 미군 OSS 국내 진공작전 훈련 참여
- 일제로부터의 해방
- 박정희와의 논쟁적 만남 주장
- 임시정부 요인들과 감격적인 귀국
- 대한민국 지성계를 밝힌 월간지 '사상계' 창간
- 한국 문학의 새 지평을 연 '동인문학상' 제정
- 백지권두언으로 자유당 독재에 저항
- 5·16 쿠데타 초기 <사상계>의 입장 선회
- 군부의 첫 탄압과 김종필과의 대면
-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여 '부패 언론인' 오명
- 아시아의 노벨상 '막사이사이상' 수상
-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 투쟁의 선봉
- 사카린 밀수 사건 폭로 및 박정희 '밀수 왕초' 발언
- 대선 유세 중 선거법 위반으로 투옥
- 자서전 '돌베개' 출판
- '헌법개정 백만인 서명운동' 전개
-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 및 중형 선고
- 포천 약사봉에서의 의문 가득한 죽음
-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긴급조치 1호 위반 재심에서 무죄 선고
1918
[독립운동가 장준하 탄생]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장로교 목사이던 아버지 장석인과 김경문 사이 5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신앙심 깊은 가풍 속에서 성장했다.
1920
[가족의 이사]
아버지가 독립운동에 가담하며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자, 가족과 함께 평안북도 삭주군으로 이사했다.
이후 해방 전까지 삭주에서 거주하며 유년기를 보냈다.
1933
[대관보통학교 졸업 및 숭실중학교 진학]
삭주 대관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근무하던 아버지 장석인을 따라 평양 숭실중학교에 재학했다.
1937
[학생 대표로 독립운동 시위 주도]
선천 신성중학교 재학 중, 교장 장이욱이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자 학생 대표로 교장 석방을 위한 동맹 시위 운동을 전개하다 유치장에 갇혔다.
1938
[신성중학교 졸업 및 교사 생활 시작]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숭실전문학교가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폐쇄되자 평안북도 정주 신안소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3년간 교사로 활동했다.
1940
1941
1942
1943
[김희숙과의 결혼 결심]
신안소학교 제자이자 같은 마을에 살던 김희숙과 결혼을 결심했다.
김희숙이 조선총독부의 주목을 받자,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결혼을 확신했다.
1944
[일본군 학도병 자원입대, 그리고 놀라운 탈출 계획]
겉으로는 일본군 학도병으로 입소했지만, 사실은 '중국에만 파견되면 곧바로 탈출해 충칭 임시정부에 합류한다'는 비밀스러운 계획을 품고 자원입대했다.
이는 그의 자서전 <돌베개>에도 기록된 놀라운 결심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족에게 가해질 탄압을 피하고,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자원입대했다. 이는 당시 많은 학도병들이 강제 징집된 것과 대조되는 그의 주체적인 선택이었다.
[쉬저우에서의 극적인 일본군 탈영]
중국 장쑤성 쉬저우에서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극적으로 일본군을 탈영했다.
김준엽, 노능서 등 다른 조선인 청년들과 합류하여 충칭 임시정부를 향한 6천리 대장정의 시작이었다.
탈영 후 수배를 피해 민간인 복장을 갖추고 걸어서 안후이성 임천까지 이동했다. 이때 '하늘의 별을 보고 성경의 돌베개를 떠올리며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조가 되자'고 다짐했으며, 이는 훗날 그의 자서전 <돌베개>의 영감이 되었다.
[중국 중앙군관학교 입교]
안후이성 임천에 도착하여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의 한국광복군 간부 훈련반에 들어가 3개월간 군사교육을 받았다.
1945
[미군 OSS 국내 진공작전 훈련 참여]
미국 CIA의 전신인 전략첩보대(OSS) 대원이 되어 국내 진공작전에 가담했다.
이는 독립을 위한 중요한 군사적 훈련이었다.
[서울 진입 시도 좌절]
광복 하루 전, 이범석 등과 함께 서울로 향하는 미군기에 편승했으나, 미국과 일본의 방해로 회항하며 즉각적인 귀국이 좌절되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
일본의 무조건 항복 선언으로 조국이 광복을 맞이하며 모든 군사작전이 백지화되었다.
대위로 진급하며 독립운동의 결실을 보게 되었다.
[박정희와의 논쟁적 만남 주장]
일부 측근들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 시안에서 박정희를 만나 그의 친일 행적과 기회주의적 태도를 강하게 질타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조갑제나 장호권 등은 이를 부인하며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장준하의 측근 이철우와 백기완은 장준하가 박정희에게 일본식 군대 방침과 일군 장교로서의 과거를 지적하며 '독립군 모자를 쓸 자격이 없다'고 야단쳤다고 주장한다. 반면 조갑제와 장준하의 아들 장호권은 두 사람이 만난 적이 없다고 반박하며, 박정희의 존재는 남로당 사건 때 알았다고 말한다.
[임시정부 요인들과 감격적인 귀국]
김구 주석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내렸다.
해방된 조국 땅을 밟으며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1946
[비상국민회의 서기 선출]
김구가 소집한 비상국민회의에 참여하여 서기로 선출되었고, 이어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비서로 활동했다.
1947
1949
1950
1952
[사상계 일시적 발행 중단]
전쟁 중 자금 조달이 어려워 잡지 <사상계> 12월호(4호)를 끝으로 일시적으로 발행을 중단했다.
1953
[대한민국 지성계를 밝힌 월간지 '사상계' 창간]
한국 현대 지성사의 상징이 된 월간지 <사상계>를 창간했다.
당시 자유당 정권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내며 4·19 혁명의 단초를 제공하는 등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952년 12월호 발행 후 재정 문제로 잠시 중단되었던 <사상계>를 부산에서 다시 발행한 뒤, 1953년 9월 서울로 옮겨 계속 발행하며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지로 자리매김했다.
[사상계 서울 이전]
사상계 1953년 9월호를 끝으로 부산 시대를 마감하고 서울 종로 한청빌딩에 사무실을 입주하여 발행을 이어갔다.
1956
[한국 문학의 새 지평을 연 '동인문학상' 제정]
소설가 김동인을 추모하며 '동인문학상'을 제정했다.
이 상을 통해 선우휘, 김승옥, 이청준 등 수많은 신인 소설가들을 발굴하며 한국 문단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57
[최남선 추모 특집호 발행 논란]
최남선 사망 후 <사상계>에 '육당 기념호'를 발행하며 그를 옹호하는 글을 게재했다.
이는 대표적인 친일 문인을 기렸다는 점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장준하는 권두언에서 최남선을 '친근한 벗이요 경애하는 스승'이라 칭하며 그의 지조에 대한 오해를 지적했으나, 이는 그의 결벽적 배일주의와 모순되는 행동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1958
[함석헌의 글로 인한 연행]
<사상계>에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을 실었다가 함석헌과 함께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1959
[백지권두언으로 자유당 독재에 저항]
2.4 보안법 파동에 맞서 <사상계> 권두언을 백지로 발행하며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언론 탄압에 강력하게 항거했다.
이는 독재에 대한 상징적인 저항이었다.
1960
[3·15 부정선거 신랄하게 규탄]
3·15 부정선거를 자행한 자유당을 <사상계> 권두언에서 신랄하게 규탄하며 4·19 혁명 전야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중앙집행위원]
4·19 혁명 이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중앙집행위원에 피임되었고, 이후 홍보분과위원장을 역임했다.
[장면 내각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의원]
장면 국무총리의 요청으로 장면 내각의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의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61
[국토건설단 기획부장]
미취업 대졸자들을 위한 국토건설단 기획부장에 발탁되어 사실상 운영을 총괄하며 학생들의 정신 교육을 담당했다.
[5·16 쿠데타 초기 <사상계>의 입장 선회]
박정희 등의 5·16 군사 쿠데타 발생 직후, <사상계>는 권두언을 통해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라며 초기에는 지지 입장을 표명했다.
이는 친미 노선을 걸을 것이라는 기대와 장면 정권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다.
이후 장도영 일파와의 관련성 의혹, '부패 언론인' 규정으로 인한 정치활동 금지 등 군정과의 충돌을 겪으며 박정희 비판 노선으로 전환하게 된다. <사상계>의 1961년 6월호는 박정희와 장도영의 사진을 싣기까지 하여 후에 '사상계 정신을 가장 크게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군부의 첫 탄압과 김종필과의 대면]
<사상계> 7월호에 함석헌의 군사혁명 우회 비판 글을 실은 뒤 군부에 연행되어 김종필과 대면했다.
김종필은 '정신분열자 같은 영감쟁이의 글'이라며 격분했으나, 장준하는 '군사혁명을 위한 충언'이라고 맞섰다.
[부정축재자 혐의로 소환]
장면 내각 재무부 장관 김영선에게 사상계 부채 해결을 위해 1천만 환을 빌린 것을 문제 삼아 군사정권의 부정축재자 처리위원회에 불려갔다.
이후 여러 차례 조사를 받으며 고초를 겪었다.
1962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여 '부패 언론인' 오명]
김영선에게서 받은 돈 1천만 환 때문에 정치활동정화법에 걸려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다.
'부패 언론인'으로 규정되어 <사상계>의 판매 부수가 급락하는 치욕적인 멍에를 짊어지게 되었다.
정치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그에게 정치정화법 적용은 큰 충격이었으며, 이후 그는 윤보선을 지지하는 등 박정희 정부에 대한 반대 노선을 강화하게 된다.
[아시아의 노벨상 '막사이사이상' 수상]
필리핀에서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 언론·문학 부문을 수상했다.
이는 한국 언론인으로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사례 중 하나였다.
1963
[본격적인 야당 활동 시작]
군사정권의 출범과 함께 윤보선, 함석헌 등과 함께 야당 활동에 뛰어들어 박정희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1964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 투쟁의 선봉]
<사상계>와 함께 박정희 정부의 한일회담을 '대일 굴욕외교'로 규정하며 반대 시위의 선봉에 섰다.
전국 순회 강연을 통해 박정희와 한일회담 주체 세력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한일회담을 '신 을사조약'에 비유하며, 일본 제국주의 군인 출신이 전범 집단과 매국 협상을 하는 것이라고 맹렬히 비판했다. <사상계>는 '한일회담의 제문제'와 '신 을사조약의 해부' 등 증간호를 발행하여 반대 진영의 이론적 교두보 역할을 했다.
1966
[사카린 밀수 사건 폭로 및 박정희 '밀수 왕초' 발언]
대구에서 열린 민중당 주최 규탄대회에서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폭로하며 '우리나라 밀수 왕초는 바로 박정희'라고 발언했다.
이 발언으로 구속되어 한 달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또한 '존슨 대통령 방한은 박정희 씨가 잘났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 한국 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 오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베트남전 파병의 본질을 지적했다. 이 발언은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그는 징역 6월을 선고받았지만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보석으로 석방]
사카린 밀수 사건 관련 구속 이후 보증금 5만원과 주거 제한 조건으로 보석 허가를 받아 석방되었다.
1967
[야당 후보 단일화 주선 노력]
야당의 후보 단일화를 위해 백낙준-윤보선-유진오-이범석 4자회담을 주선했으나, 각 정당 대선 후보 간 이견으로 의견 조율에 실패했다.
[대선 유세 중 선거법 위반으로 투옥]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을 지지하며 유세 중 '박정희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 맹세한 친일파' 등의 발언으로 선거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3개월간 투옥되었다.
그는 박정희를 '남로당 군사조직책으로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조직원을 팔아 희생시켰다'고 비판했으며, '우리나라 청년들을 베트남에 팔아먹고 피를 판 돈으로 정권을 유지한다'며 베트남 파병을 맹렬히 비난했다.
[제7대 국회의원 당선 및 의정활동 시작]
신민당 공천으로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 국회 의정활동을 시작했다.
국회 경제·과학분과 위원과 국방분과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68
1969
[4.19 기념 강연 및 침묵 시위]
4.19 10주년 기념 강연을 마친 뒤 침묵 시위에 들어가며 민주주의 수호 의지를 표명했다.
1970
1971
[자서전 '돌베개' 출판]
자신의 학병 탈출과 광복군 참여 시절을 회고한 자서전 <돌베개>를 출판했다.
'현대사의 증언'임을 밝히며 일부 광복군 출신 인사들의 행적을 비판하기도 했다.
[국민당 창당 참여]
윤보선, 박기출 등과 함께 국민당 창당에 참여했다.
이는 신민당 김대중 후보 선출에 반발한 윤보선과 뜻을 같이한 움직임이었다.
1972
[7·4 남북공동성명에 대한 입장]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자 '모든 통일은 선'이라며 환영했지만, 동시에 숨겨진 배경을 경계해야 한다며 박정희의 남북회담 대표직 제의를 거절했다.
1973
['헌법개정 백만인 서명운동' 전개]
YMCA회관에서 개헌청원운동본부를 전격 발족하고 '헌법개정 백만인 서명운동'을 벌였다.
이는 유신 독재에 맞선 대규모 민주화 운동의 시작이었다.
1974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 및 중형 선고]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헌법개정을 빙자하여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의 불안을 조성했다'는 죄목으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긴급조치가 기본권 탄압이라며 비판하고 개헌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2013년 1월 24일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39년 만에 명예를 회복했다.
[병세 악화로 형집행정지 출감]
심장협심증과 간경화 증세 악화로 10개월 20일 만에 형집행정지로 출감하여 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학생들을 놔두고 혼자 나오니 가슴이 아프다'고 소회를 밝혔다.
1975
[포천 약사봉에서의 의문 가득한 죽음]
유신정권에 저항하는 모종의 '거사'를 계획하던 중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최후를 맞았다.
그의 죽음은 공식적으로 실족사로 발표되었으나, 타살 의혹이 끊이지 않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사망 며칠 전 중경 임시정부 태극기를 대학 박물관에 기증하고 아내와 천주교식 혼례 의식을 치르는 등 신변 정리를 서둘렀다. 아들 장호권은 '박정희를 깨는 것은 민중의 힘으로 역부족이니 게릴라전으로라도 박을 제거해야 한다. 군부 쪽에도 상당한 연계가 되어 있다'는 장준하의 발언을 증언하며 암살 의혹을 제기했다. 사고 현장의 손바닥 상처는 경찰에 의해 추락 증거로 왜곡 보도되었다는 증언도 있다.
[약사봉 추모비 제막]
사고 현장인 약사봉에서 후학 및 민주화운동 동지 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비 제막식이 열렸다.
비문에는 '이 말없는 골짝은 장준하 선생이 원통히 숨진 곳'이라고 적혀 있다.
1991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광복절을 맞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1999
2012
[파주 장준하 공원으로 유해 이장]
나사렛 천주교 공동 묘지에 안장되어 있던 유해가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에 건립된 장준하 공원으로 이장되었다.
2013
[긴급조치 1호 위반 재심에서 무죄 선고]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사건이 39년 만에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에서 무죄를 선고받으며 명예를 회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