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

시인,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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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시인,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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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행동으로 시를 썼던 불꽃 같은 저항 시인. 수감번호 264에서 영감을 얻은 육사라는 필명처럼 그의 삶 자체가 투쟁의 기록. 의열단 가입 무장 투쟁 훈련 대구 격문 사건 등 치열한 항일 활동 전개. 루쉰 추도문 발표와 작품 번역으로 문학을 통해 시대의 어둠에 저항. 빼앗긴 조국에 대한 깊은 고뇌와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시로 승화.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하며 삶의 마지막까지 저항의 정신을 지켜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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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

[이육사 탄생]

일제강점기 문학사이자 독립운동가 이육사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한학을 수학하며 신학문을 접하며 성장했습니다.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이원록이며, 본관은 진보(眞寶)입니다.

1925

[의열단 가입]

스무 살 무렵, 대구로 이사 온 이육사는 형제들과 함께 불꽃같은 독립 투쟁을 꿈꾸는 의열단에 가입합니다.

이는 그의 뜨거운 저항 정신이 본격적으로 불타오르는 계기가 됩니다.

20대 초반에 가족이 대구로 이사한 뒤 형제들과 함께 의열단에 가입했으며, 이 시기에 베이징에 있던 공립 중궈 대학(中國大學)에서 문과 수업 등을 청강하기도 했습니다.

1927

[첫 투옥, 의열 투쟁의 시작]

동지 장진홍 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형제들과 함께 생애 첫 투옥을 경험했습니다.

일제의 압제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그의 저항 정신이 단단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큰형 이원기, 맏동생 이원일과 함께 처음 투옥되었습니다.

1929

['육사' 필명의 탄생]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한 후,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는 혁명적 의미의 필명 '戮史(육사)'를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집안 어른의 권유로 '육지 육(陸)'에 '역사 사(史)'를 쓴 '陸史'를 사용하게 됩니다.

이는 그의 투쟁 의지를 담으면서도 깊은 고뇌를 엿볼 수 있는 이름입니다.

그의 수인 번호 264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이원록의 필명은 이활(李活), 대구이육사(大邱二六四), 육사(戮史), 육사(肉瀉)를 거쳐 최종적으로 육사(陸史)로 정착했습니다. 특히 '육사(戮史)'는 '일제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는 의미였고, '육사(肉瀉)'는 당시 일제 강점 상황을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 시절 약령시 기사를 연재할 때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1930

[문단 등단과 언론 활동]

<조선일보>에 시 '말'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습니다.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중국과 대구, 경성을 오가며 항일 운동을 펼쳤고,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으로 활발히 작품을 발표하며 문학으로 독립을 노래했습니다.

《조선일보》에 시 〈말〉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으며, 언론인으로 일하면서 항일 운동을 하고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으로 작품도 발표했습니다.

1931

[대구 격문 사건 연루 및 옥고]

1929년 광주학생항일투쟁의 연장선상에서 대구에서도 학생들의 동맹휴학이 이어지자, 이육사는 이 '대구 격문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다시 한번 옥고를 치렀습니다.

1930년 10월 대구농림학교, 1931년 1월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동맹휴학에 돌입하는 '대구 격문 사건'이 발생했고, 이육사는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수차례 체포, 구금되었습니다.

1932

[무장 독립운동의 길로]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인 항일 군관 훈련반(제6대대)이 있던 중국 국민당 군사학교에 입학하여, 보병 육성과 특수 부대원 훈련을 받으며 무장 독립운동의 역량을 키웠습니다.

중화민국 국민당 군사위원회에서 난징에 창설한 군사학교에 입학하여 보병 육성과 특수 부대원 훈련을 받았고, 이듬해 1933년 4월에 졸업했습니다. 관련 인물로는 김원봉, 윤세주 등이 있습니다.

1934

[국내 공작 활동 중 체포]

중국에서 군사간부로 훈련받은 이육사는 국내에서 공작 활동을 펼치던 중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일본 경찰은 그를 '요주의 인물'로 규정하고 주시했습니다.

일본 경찰은 육사가 만주로 사라진 1932년 4월 이후 그를 계속 추적하고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체포 후 6월 23일 기소유예로 풀려났으나, 안동경찰서 보고에는 그가 '배일사상, 민족자결을 몽상하고 암암리에 주의를 선전할 염려가 있음'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1936

[루쉰 추도문 발표, 문학을 통한 저항]

중국의 대문호 루쉰이 서거한 후, 조선일보에 '루쉰추도문'을 연재하며 그의 생애와 문학을 깊이 있게 분석했습니다.

이는 문학을 통해 시대의 혼란에 맞서고 진실을 묘사하는 문학의 힘을 강조한, 그의 문학적 저항 정신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육사는 1936년 10월 19일 루쉰이 사망한 지 4일 만인 10월 23일부터 27일까지 조선일보에 추도문을 연재했습니다. 그는 추도문에서 루쉰 문학의 깊이와 혼란한 중국 사회 현실에 맞선 진실한 묘사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또한 이육사는 루쉰의 대표적인 단편소설인 「고향故鄕」을 우리말로 세계 최초로 번역하여 1936년 『조광朝光』 12월호에 발표했습니다.

1943

[체포와 베이징 압송]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小喪)을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마지막 저항이자 생의 끝을 예고하는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943년 늦가을, 동대문 형사대와 헌병대에 검거된 후 베이징으로 압송되었습니다.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1944

[베이징 감옥 순국]

베이징에 위치한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41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며 순국했습니다.

그의 동지 이병희 여사가 시신을 거두어 화장하고, 유골은 동생 이원창에게 인계되어 고향에 안장되었습니다.

베이징 네이이구 동창후뚱(東廠胡同) 1호에서 순국했습니다. 이곳은 당시 일제의 문화특무공작기관인 동방문화사업위원회가 있던 곳입니다. 유골은 처음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0년에 고향인 안동 원촌 뒷산으로 이장되었습니다.

1946

[유고시집 '육사시집' 출간]

순국 후, 문학평론가였던 둘째 동생 이원조가 형 이육사의 시를 모아 '육사시집'을 출간했습니다.

이 시집은 그의 혁명가적 정열과 불굴의 독립 의지가 담긴 짧지만 강렬한 30여 편의 시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원조는 시집 출간 당시 형의 시작 활동에 대해 "혁명가적 정열과 의욕으로 시에 빙자해 꿈도 그려보고 불평도 폭백한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이육사 본인은 생전 "나는 이 가을에도 아예 유언을 쓰려고는 하지 않소. 다만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따름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라고 시작에 대한 생각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1990

[독립유공자로서의 예우]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헌신적인 항일 투쟁 활동과 문학적 공헌을 기려 '건국포장', '건국훈장 애국장',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며 독립유공자로서 최고 예우를 표했습니다.

특히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2004

[이육사 문학관 건립 및 기념사업]

탄신 100주년이자 순국 60주년을 기념하여 고향인 안동에 '이육사 문학관'이 건립되고 시문학상이 제정되었습니다.

그의 숭고한 정신과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 후세에 계승하기 위한 중요한 발자취입니다.

또한 안동시는 안동 강변도로를 '육사로'로 명칭하여 그의 이름을 영원히 기리고 있습니다.

2018

2018.05.08 사후 74년

[친필원고 '편복' 국가등록문화재 지정]

그의 유산인 친필원고 '편복(蝙蝠)'이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713호로 지정되며, 그의 문학적 가치와 역사적 중요성이 다시금 확인되었습니다.

2018.12.10 사후 74년

[친필원고 '바다의 마음' 국가등록문화재 지정]

또 다른 친필원고인 '바다의 마음' 또한 국가등록문화재 제738호로 지정되어, 이육사의 문학적 유산이 국가적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2023

2023.04.05 사후 79년

[묘소 이장]

선생의 묘소가 고향 원촌 뒷산에서 이육사 문학관 옆으로 이장되어, 그의 발자취를 기리는 공간과 더욱 가깝게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기존 묘소는 도보 40분 거리였으나, 이장 후에는 도보 5분 거리로 접근성이 좋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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