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대한민국 대통령, 군인,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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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07- 19:2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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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통령, 군인,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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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이자 제6공화국의 첫 대통령. - 전두환과 함께 12·12 군사반란과 5·17 비상계엄 확대에 깊숙이 관여. - 1987년 6·29 민주화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등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며 한국 현대사의 전환점을 마련. -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소련 중국 등 공산권 국가와의 북방외교를 통해 국제 관계를 확장. - 재임 중 범죄와의 전쟁 선포 지방자치제 부활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등 다양한 정책 추진. - 퇴임 후 비자금 사건 및 12·12 5·18 관련 재판으로 구속되었으나 특별 사면되었고 추징금을 완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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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

[출생]

경상북도 달성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부터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학업에 열중했습니다.

1950

[한국 전쟁 학도병 참전]

한국 전쟁 발발과 함께 학도병으로 참전하며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1955

[육군사관학교 졸업 및 임관]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며 전두환, 정호용 등 훗날 역사의 중심에 설 동기들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1959

[김옥숙과 결혼]

친구 김복동의 누이인 김옥숙과 결혼하며 평생의 반려자를 맞이했습니다.

1961

[5.16 군사정변 지지]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육군 대위 신분으로 전두환 등 동료 장교들과 함께 군사혁명을 지지하는 행진에 참여했습니다.

1967

[베트남 전쟁 참전]

맹호사단 재구대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퀴논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을지무공훈장을 수훈했습니다.

맹호사단 재구대대장으로 참전하여 퀴논 전투에서 북베트남 군대를 전멸시킨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1979

[12.12 군사반란 주도]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전두환과 함께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하여 군부를 장악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9사단 병력을 서울로 급파해 최규하 대통령 주변을 장악하는 등 대범함을 보였습니다.

노태우는 신군부의 2인자로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체포 작전을 성공시키며 전두환이 군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1980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관여]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강력히 주장하여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는 데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국군보안사령관 취임]

전두환의 후임으로 막강한 권한을 가진 국군보안사령관직에 올랐습니다.

이는 훗날 그가 권력 핵심으로 부상하는 발판이 됩니다.

1981

[육군 대장 예편 및 정계 입문]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며 26년간의 군인 생활을 마감하고 정계에 전격적으로 입문했습니다.

[대통령 특사 및 부총리 대우 시작]

대통령 특사로 유럽, 미국, 아프리카를 순방하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한국 방문을 성사시키는 등 외교적 역량을 발휘했습니다.

이때부터 '부총리급' 대우를 받으며 전두환의 핵심 측근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스페인, 이탈리아, 바티칸 시국, 나이지리아, 부르키나파소, 서독, 네덜란드 등을 방문하며 대한민국 외교의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했습니다.

1982

[내무부 장관 역임]

제41대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4무(무사명, 무책임, 무소견, 무기력) 추방' 구호를 내걸고 행정 혁신을 추진하며 주목받았습니다.

대한체육회 회장직을 겸임했으며, 눈치보기 퇴근, 일 미루기 행위 등을 금지하는 등 공직 기강 확립에 힘썼습니다.

1983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장]

서울 올림픽대회 임시 조직위원장에 이어 조직위원장을 맡아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한 초석을 다졌습니다.

서울 아시안게임 임시 조직위원장도 겸임하며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유치를 지원하는 등 국제 스포츠 행사 유치 및 준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85

[국회의원 당선 및 민정당 대표]

제12대 국회의원(전국구)에 당선된 후, 곧바로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에 임명되며 여당의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총재인 전두환으로부터 당권 전권을 위임받아 야당과의 타협론을 내세웠으나, 군부 강경파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습니다. 또한 제12대 국회 개원 협상의 민정당 대표로 야당을 설득해 국회 개원을 이끌어냈습니다.

1987

[민정당 대통령 후보 선출]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민주정의당 전당대회에서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공식 선출되었습니다.

당시 대안으로 거론되던 노신영, 정호용을 제치고 최종 낙점된 것입니다.

[6·29 민주화 선언]

전국적인 6월 민주항쟁의 압력에 직면하여, 전두환 대통령에게 직선제 개헌 수용을 건의하고 이를 담은 8개항의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민주화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으며, 군사정권의 위기를 극복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선언의 주요 내용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 복권 및 구속자 석방, 언론 자유 창달, 지방자치제 부활 등 민주화 요구의 전면 수용이었습니다. 당시 그의 결단은 고독한 것으로 선전되었으나, 전두환의 기획과 지시에 의한 연출이라는 주장도 존재합니다.

[제13대 대통령 당선]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김대중 '양김' 후보의 분열에 힘입어 36%의 득표율로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나, 이 사람! 보통 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라는 유세 문구는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대선 당시 광주 지역 유세에서 '광주 학살의 원흉'이라는 항의 시위대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기도 했으나, '민주주의의 양념'이라며 관련자 처벌을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1988

[제13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이자 제6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취임사에서 '민족자존의 새 시대'를 선언하며 민주주의와 북방 외교 추진을 핵심 국정 방향으로 제시했습니다.

취임 직후에는 '5공 청산' 여론에 직면했으나 전두환 처벌에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며 '5.5공화국'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청와대 군 출신 인사를 대거 해임하고 민간 전문가들을 기용하는 인적 쇄신을 단행했습니다.

[7·7 선언 발표]

'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인 7·7 선언을 발표하며 남북 교류 추진, 북한의 미·일 관계 개선 협조 등 적극적인 대북 및 북방정책을 천명했습니다.

'중공'을 '중국'으로 공식 호칭 변경 지시도 포함되었습니다.

[서울 하계 올림픽 개막]

서울에서 하계 올림픽이 성대하게 개막되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은 공산 국가들과 외교 관계조차 없었으나, 소련, 중국 등 160개국이 참가하는 사상 최대 규모의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대한민국의 발전한 위상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공동 개최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불참했고, 쿠바 등 일부 친북 국가들도 보이콧했습니다. 이 대회를 통해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은 크게 높아졌습니다.

1989

[헝가리와 공식 수교]

북방정책의 첫 결실로 동구권 국가 중 최초로 헝가리와 공식 수교하며 냉전 시대 외교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이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와도 수교를 이어갔습니다.

[보안사 '청명계획' 수립 및 민간인 사찰]

보안사령부가 '청명계획'을 수립, 친위쿠데타에 방해될 반정부 인사 923명의 정보를 담은 '청명카드'를 작성하고 사찰했습니다.

이는 5공화국의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과 유사하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청명카드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인사의 인적사항, 예상 도주로, 예상 은신처, 체포조 등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1990년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으로 이 사실이 폭로되며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전교조 불법화 선언 및 탄압]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창립대회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해산 및 단속을 천명했습니다.

이로 인해 1,500여 명의 교사가 해직되는 등 교육계의 큰 논란을 낳았습니다.

1990

[3당 합당 합의]

여소야대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김영삼, 김종필과 전격적으로 3당 합당에 합의했습니다.

이로써 218석을 가진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이 탄생하며 한국 정치 지형을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이 합당은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을 정치적으로 고립시켰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노무현 등 민주화 세력의 이탈을 초래했습니다.

[한-소 국교 정상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의 역사적인 한-소 정상회담을 거쳐 소련과의 국교를 정상화했습니다.

이는 냉전 시대 종식을 상징하는 북방정책의 가장 중요한 성과로 기록됩니다.

1990년 6월 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비밀 회담을 가졌고, 이를 통해 국교 정상화의 물꼬를 텄습니다. 이후 서울에 주 소련 대사관이 개설되었습니다.

[범죄와의 전쟁 선포]

심각해지는 범죄 문제에 대응하여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10.13 특별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국가 공동체를 위협하는 범죄와 폭력에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동원해 소탕하겠다고 천명했습니다.

이 선언은 각종 흉악범, 폭력조직, 마약, 인신매매 등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내용으로 했으며, 실제로 2년 뒤 범죄율 감소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1991

[지방자치제도 부활]

야당과 시민단체의 지속적인 요구를 전격 수용하여 30여 년 만에 지방자치제도를 부활시키고 지방선거를 시행했습니다.

이는 한국 민주화의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됩니다.

이 정책으로 분당, 일산 등 1기 신도시 건설을 통해 주택 공급을 확대하고 부동산 가격 안정을 꾀하는 등 경제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강경대 학생 사망 사건]

명지대학교 학생 강경대가 시위 중 경찰 폭력으로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전국적인 규탄 시위와 함께 김영균, 박승희 등 연이은 학생들의 분신으로 이어지는 '분신정국'을 초래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노태우 정권의 민주화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에 국민적 분노가 폭발했고, 정권은 '유서 대필 사건' 조작 시도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북한과의 관계 개선 노력 끝에 국제 사회에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유엔 회원국으로 동시에 가입하는 쾌거를 이루어냈습니다.

이는 보수 세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강행된 외교적 성과였습니다.

이후 1991년 12월 13일에는 남북기본합의서가, 12월 31일에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채택되는 등 남북 관계 진전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반도 비핵화 선언]

대한민국 핵 개발의 최종 포기를 선언하는 '한반도 비핵화'를 공식 선언했습니다.

이는 이전 정권들의 핵 개발 시도와는 대조되는 정책 방향이었습니다.

1992

[중국과 국교 수립]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하며 중국 건국 43년 만에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는 역사적인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로 인해 오랜 우방이었던 중화민국(대만)과는 단교하게 됩니다.

양상쿤 국가주석 등 중국 고위층과 직접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외에도 몽골, 베트남 등 다수의 국가들과 수교를 맺으며 북방외교를 완성했습니다.

[민자당 탈당 및 중립내각 선언]

김영삼과의 대권 갈등 끝에 민주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당을 탈당하며 거국중립내각 구성을 선언했습니다.

이는 대선 직전 대통령이 여당을 탈당하는 전례 없는 선례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김영삼에게 대권과 당권을 넘겼으며, 정치적 중립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모든 당직을 내려놓았습니다.

1993

[대통령 퇴임]

김영삼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고 연희동 자택으로 퇴임하며 5년간의 대통령 임기를 마무리했습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새로운 문민 정부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1994

[비자금 조성 의혹 제기]

퇴임 직후부터 금융실명제 시행으로 비자금 보유설이 확산되었고, 서석재 국회의원에 의해 4천억 원 규모의 비자금 조성 의혹이 공식적으로 제기되며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초기에는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으나, 1995년 박계동 의원의 추가 폭로와 검찰 수사 착수로 인해 비자금 수수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1995

[광주 민주화 운동 망언 및 비자금 사실 인정]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문화대혁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망언하여 국민적 거센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후 비자금 조성 사실을 대국민 담화로 인정하며 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망언을 부인했으나 녹음 테이프가 공개되자 스스로도 놀랐다며 공식 사과했습니다. 검찰 수사 결과, 재임 중 기업체로부터 5,000억 원 가량의 비자금을 받아 사용했음을 시인했습니다.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 수감]

대통령 재직 시 조성한 비자금 수수 및 뇌물 조성 혐의로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혐의가 적용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서울 구치소에 구속 수감되었습니다.

항소심에서는 징역 15년에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받았으며, 이는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초유의 일이었습니다.

1997

[대법원 최종 선고]

12.12 군사반란, 5.18 민주화 운동 및 대통령 비자금 사건 관련 대법원 최종 선고 공판에서 징역 17년형과 추징금 2,688억 원을 확정 선고받았습니다.

[특별 사면 및 복권]

복역 중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 사면을 받고 복권되었습니다.

이는 김대중 정부의 동서 화합 명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후 각종 국가 행사에 국가 원로 자격으로 초청되기도 했습니다.

2013

[추징금 완납]

동생 노재우가 나머지 추징금 150억 4,000만 원을 납부하며 총 2,625억 원의 잔여 추징금을 16년 만에 모두 완납했습니다.

이는 그의 사돈 신명수 전 신동방그룹 회장의 80억 원 납부에 이은 조치였습니다.

2021

[서거]

전립선암 수술 후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 입퇴원을 반복하다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집중 치료를 받았으나, 향년 88세를 일기로 서거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박정희 대통령 서거일과 같은 날이었습니다.

정부는 그의 장례를 5일 동안 국가장으로 치른다고 발표했으며, 김부겸 국무총리가 장례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장지는 파주시 동화경모공원으로 확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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