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목사, 사회운동가, 통일운동가, 시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8- 02:02:34
- 한국의 개신교 목사이자 사회운동가 시인. - 민중신학을 주창하며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했고 일곱 차례 투옥되는 등 고난의 길을 걸었음. - 성서학자로서 공동번역성서 번역에도 참여했으며 윤동주 시인과 절친한 친구로도 알려져 있음. - 불의에 저항하며 민족과 민중을 위해 살았던 상징적인 인물로 평가됨.
- 통일과 민주화의 상징, 문익환 목사 탄생
- 신학자로서의 첫걸음
- 구약학 전문가로 성장: 프린스턴 신학석사 취득
- 모두가 읽는 성서를 꿈꾸다: 공동번역성서 번역 참여
- 문학적 재능의 발현: 시인 등단
- 친구의 죽음이 부른 분노: 민주화운동의 길로 들어서다
- 독재에 대한 멈추지 않는 저항
- 재야 민주세력의 중심에 서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
- 열사의 분신, 그리고 다시 구속되다
- 출옥 그리고 민주화 열사들의 이름
- "통일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 무단 방북과 투옥
- 북한으로부터 '조국통일상' 수여
- 투옥과 석방의 반복: 풀려나다
- 공안 정국 속 다시 감옥으로
- 국제적인 인정: 노벨 평화상 후보 추천
- 다시 자유의 몸으로: 통일 운동 재개
- 북한의 '프락치' 비난과 격렬한 논쟁 속 실신
- 늦봄, 영원히 잠들다: 심장마비로 서거
- 국가가 인정한 공로: 국민훈장 모란장 수훈
1918
[통일과 민주화의 상징, 문익환 목사 탄생]
중화민국 지린성 룽징시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룽징에서 일제강점기 저항 시인 윤동주, 독립운동가 장준하와 어린 시절부터 절친한 동무로 지내며 운명적인 관계를 맺었다.
1938
[지성의 문을 열다: 일본 신학교 입학]
부친의 권유로 도쿄의 일본 신학교에 입학하여 새로운 신학적 관점을 접했다.
당시 생소했던 성서비평학을 접하며 깊은 고민에 빠졌으나, 결국 학문적 포용력을 기르는 계기가 되었다.
축자영감설에 익숙했던 문익환에게 성서를 학문적으로 비평하려는 성서비평학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교수의 '자신과 다른 생각을 경청하지 못하면 학문을 할 자격이 없다'는 충고를 받아들여 성서비평학을 존중하게 되었다.
1947
[신학자로서의 첫걸음]
해방 후 한국신학대학교(현 한신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며 본격적인 신학 연구와 사회 활동의 기반을 다졌다.
이는 그의 평생에 걸친 활동의 시작점이 되었다.
1954
[구약학 전문가로 성장: 프린스턴 신학석사 취득]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구약성서신학을 전공하며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한국신학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서 구약성서학을 강의하며 전문성을 키웠다.
1970
[모두가 읽는 성서를 꿈꾸다: 공동번역성서 번역 참여]
1970년대, 개신교와 천주교의 역사적인 공동번역성서 번역사업에 개신교 대표로 참여했다.
그는 당시 한자 위주로 번역되어 어렵던 성경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현대어로 바꾸고자 노력했다.
문익환 목사는 당시 개역한글판 성경이 한자를 모르는 독자들에게 너무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는 공동번역 성서를 통해 '솔로몬 왕의 성전건축' 등 복잡한 구절들을 더 쉽고 명확하게 전달하며 대중의 접근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72
[문학적 재능의 발현: 시인 등단]
《월간문학》을 통해 〈추억의 커피잔〉,〈미켈란젤로의 고독〉 등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그의 시는 히브리 정신에 한국적인 감성을 융합하여 독특하고 섬세한 시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74
[친구의 죽음이 부른 분노: 민주화운동의 길로 들어서다]
절친한 동지이자 사회운동가였던 장준하의 의문사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아 민주화 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게 되었다.
그는 유신 독재에 저항하며 여러 차례 투옥되는 고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74년 명동구국선언 직전, 윤보선 전 대통령이 김대중이 초안한 선언문이 미온적이라며 서명을 거절하자, 문익환 목사가 직접 '강도가 높은' 선언문을 작성하여 윤보선을 찾아가 서명을 받아냈다. 이는 그의 과감하고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는 일화로 남아있다.
1978
[독재에 대한 멈추지 않는 저항]
군부독재정권의 유신헌법이 비민주적임을 강력히 비판하는 등 꾸준히 정권에 저항하여 수차례 투옥되었다.
1985
[재야 민주세력의 중심에 서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
재야 민주세력의 결집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의 의장으로 선출되며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다.
1986
[열사의 분신, 그리고 다시 구속되다]
서울대학교 5월제에서 연설하던 중, 민주화를 열망하던 이동수 학생의 분신 투신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문익환 목사는 또다시 구속되었다.
1987
[출옥 그리고 민주화 열사들의 이름]
형집행정지로 출옥한 다음 날, 고(故) 이한열 열사의 영결식에 참석하여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를 비롯한 모든 민주화 열사들의 이름을 절절히 호명하며 그들의 희생을 기렸다.
1989
["통일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 무단 방북과 투옥]
'통일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는 신념 아래, 정부와의 사전 협의 없이 단독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역사적인 회담을 가졌다.
이로 인해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다시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다.
평양 도착 성명에서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한국 정부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반국가단체잠입죄'가 적용되어 논란이 일었다.
1990
[투옥과 석방의 반복: 풀려나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투옥된 상태에서 형집행정지로 석방되며 잠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
1991
[공안 정국 속 다시 감옥으로]
정부에 의해 조성된 공안 정국 속에서 또다시 수감되며 그의 민주화·통일 운동은 계속되는 시련을 겪었다.
1992
[국제적인 인정: 노벨 평화상 후보 추천]
그의 평화와 통일을 향한 헌신적인 노력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1947년 노벨 평화상 수상 기관인 미국 친우 봉사회(AFSC)로부터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이는 그의 업적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았음을 의미한다.
1993
[다시 자유의 몸으로: 통일 운동 재개]
장기간의 투옥 생활을 마치고 석방되어 활발한 통일운동과 강연 활동을 재개하며, 생의 마지막까지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위해 혼신을 다했다.
1994
[북한의 '프락치' 비난과 격렬한 논쟁 속 실신]
통일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며 '민족회의' 구상을 추진했으나, 북한으로부터 '안기부 프락치'라는 터무니없는 비난에 직면했다.
이로 인한 격렬한 언쟁 중 실신하며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는 비극을 맞았다.
1990년대 초부터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의 운영을 두고 북한 당국과 갈등을 겪었다. 그는 범민련이 북한 대남공작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는 논란에 회의를 느끼고, 대한민국 정부와도 협력할 수 있는 독자적인 통일운동 조직인 '민족회의'를 만들 구상을 했다. 북한은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문 목사가 안기부의 사주를 받아 범민련을 해체하려는 책동을 펴고 있다'는 내용의 팩스를 보냈고, 이 내용이 남측 진영에 유출되면서 문 목사는 심각한 비난에 시달렸다. 사망 전날 점심 식사 자리에서 모 인사와 이 문제로 언쟁을 벌이다 음식물이 기도로 넘어가 실신한 것이 결국 사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증언이 다수 존재한다.
[늦봄, 영원히 잠들다: 심장마비로 서거]
향년 77세의 일기로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만주국군 장교 출신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정일권 전 국무총리도 사망하여, 언론은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인물의 삶과 죽음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시인 고은이 추모시를 기고하는 등 수많은 지식인과 시민들의 추모가 이어졌다. 문익환 목사의 영결식은 한신대학교에서 시작해 대학로, 동대문에 이르는 수십만 명의 시민이 참여한 '노제'로 치러졌고, 이는 정치인 위주로 진행된 정일권의 영결식과 비교되며 그의 삶이 대중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주었다. 문익환 목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해방 후에는 성서학자로, 그리고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사회운동가로 활동하며 총 7번의 옥고와 11년간의 감옥살이로 인해 건강이 좋지 않았다.
2002
[국가가 인정한 공로: 국민훈장 모란장 수훈]
그의 사회 및 통일 운동에 대한 지대한 업적이 사후에 인정받아 서남동, 안병무와 함께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받았다.
2007
[그의 시 정신을 기리다: 한신대학교 시비 건립]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그의 시 정신을 기리는 시비(詩碑)가 임옥상 화백의 작품으로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