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 군인, 독재자, 경제성장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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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07- 12: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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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 군인, 독재자, 경제성장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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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제5~9대 대통령. -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 후 18년간 대한민국 한강의 기적을 이끌며 경제 성장의 주역으로 평가받음. -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건설 및 새마을운동 등 국가 근대화를 이룸. - 한편 3선 개헌과 유신헌법 제정 등 권위주의 통치로 민주주의 후퇴와 인권 탄압 논란이 끊이지 않았음. -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당하며 격동의 생애를 마감함.

연관 연혁
주요사건 목차
주요사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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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출생]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동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마루에서 굴러 화로에 떨어져 화상을 입기도 했다.

1926

[구미공립보통학교 입학]

가난한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교장의 설득으로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학창 시절 독서를 즐겼으며, 특히 나폴레옹과 이순신 위인전을 탐독하며 군인을 동경했다.

1932

[대구사범학교 합격]

구미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에 응시, 1070명 중 51등으로 합격하여 가족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진학의 길을 열었다.

[대구사범학교 진학]

100명 정원에 조선인 90명, 일본인 10명으로 구성된 대구사범학교 4기생으로 입학하여 대구 시내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3년간 성적은 하위권이었으나, 군사 및 체육 교과목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1936

[김호남과 첫 결혼]

21세에 3살 연하의 김호남과 결혼했으나, 신혼 이후 성격 차이로 거의 얼굴을 보지 않는 사이로 지내다 1950년 이혼했다.

1937

[대구사범학교 졸업]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 부임]

문경공립보통학교 4학년 담임 교사로 부임하여 학생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다.

열등아나 사고아의 가정을 자주 방문하고, 월사금을 내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자신의 월급을 떼어 도와주기도 했다.

제자 이영태는 박선생이 조선어 시간에 태극기에 대해 가르쳐 주었고, 황성옛터와 심청이의 노래도 가르쳤다고 증언했다. 또한 일본인 교사나 순사들과 자주 언쟁을 벌였으며, 특히 일본인에게 지기 싫어하는 강한 성격을 보였다.

[장녀 박재옥 출생]

첫 부인 김호남과의 사이에서 장녀 박재옥이 태어났다.

1938

[부친 박성빈 사망]

부친 박성빈이 67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1939

[만주군 지원 혈서 보도 (진위 논란)]

민족문제연구소는 <만주신문>에 박정희가 '일본인으로서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이라는 편지와 혈서를 썼다는 기사가 실렸다고 공개했다.

하지만 혈서 내용과 날짜에 대한 증언 및 자료 간의 충돌로 진위 논란이 있다.

유증선씨는 1938년 5월경 박정희가 '진충보국 멸사봉공' 혈서를 썼다고 증언한 반면, 만주신문 기사는 1939년 3월 31일자 기사에서 '일사봉공' 혈서와 편지가 3월 29일 도착했다고 밝혀 시점과 내용이 불일치한다. 또한 혈서 문화가 당시 일본군뿐 아니라 한국 독립운동가(안중근, 남자현)에게도 존재했음을 명시하며 일방적인 친일의 증거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1940

[만주로 떠나 만주군 입대]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 합격 통보를 받은 후, 교사직을 의원면직하고 '긴 칼 차고 싶어서'라는 단순명쾌한 대답과 함께 만주로 떠났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입교]

만주국 신징 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했다.

본래 1기 지원에서 나이 초과로 탈락했으나 재지원하여 입학에 성공했다.

1942

[만주국 군관학교 수석 졸업]

만주국 신징 군관학교 2기 예과 졸업생 240명 중 수석으로 졸업하여 만주국 황제 푸이에게 기념으로 금시계를 하사받았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편입]

신징 군관학교 졸업 후 5개월간의 현장 실습을 마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57기로 편입했다.

1944

[일본 육사 3등 졸업]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를 300명 가운데 3등으로 졸업했다.

이후 수습사관 과정을 거쳐 만주국군 보병 제8단에 배속되었다.

[만주국 육군 복무 시작]

열하성(熱河省) 주둔 만주국군 보병 제8단에 배속되어 중국 공산당 팔로군 토벌 작전에 참가했다.

하지만 단장 부관으로 승진한 후에는 직접 전투보다는 술자리가 많았다고 동료들은 증언했다.

좌파계열 독립군들이 팔로군에 가담하였으므로 독립군 토벌에도 참여한 셈이라는 주장이 존재한다. 그러나 당시 공산군의 만행으로 만주 지역 조선인 영향력이 위축되었고, 공산군과 독립군 간의 복잡한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반론도 있다.

[만주국 육군 소위 임관]

만주국 육군 소위로 정식 임관했다.

1945

[광복]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며 광복을 맞았다.

소속 부대가 없어진 상황에 처했다.

[한국광복군 편입 및 활동]

동료들과 베이징으로 건너가 장교 경험자를 찾던 한국광복군에 편입, 김학규가 지휘하는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활동했다.

만주국군 출신이 광복군에 바로 입대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일본군 내 조선인 장교들에게 살포된 비밀 선전문(겉으로는 친일 활동을 하라는 내용)과 관련 짓는 주장도 있다.

1946

[한반도 귀국]

미 해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을 통해 한반도로 귀국했다.

빈털터리 상태로 돌아와 고향의 가족들조차 반기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조선경비사관학교 입학]

고향에서 넉 달간 휴식을 취한 뒤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여 단기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셋째 형 박상희 피살]

대구 항쟁 사건 중 구미 경찰서에서 시위대와 진압대 중재 중 경찰의 총에 맞아 사살되었다.

이 사건은 박정희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고, 남로당 가입 권유의 계기가 되었다.

[조선경비사관학교 졸업 및 임관]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한국 군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2기생 194명 중 3등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1947

[육군 대위 진급]

국군 초의 연대 단위 기동 훈련을 기안한 공로로 중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대위로 진급했다.

1948

[육군 소령 진급]

육군 소령으로 진급하여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게 되었다.

[남로당 연루 혐의 체포 및 숙군]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로 군대 내 공산주의자 색출 작업인 숙군 과정에서 남조선로동당 군부 하부조직책으로 의심받아 체포되었다.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백선엽 등의 보증으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남로당 가담 혐의자 4000여 명 중 12명이 최종 사형판결을 받았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박정희였고, 백선엽의 요청으로 극적으로 살아남았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공식적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1949

[강제 예편 및 문관 복무]

남로당 연루 혐의로 군에서 강제 예편되었으나, 백선엽 국장의 배려로 육군 정보국에서 무급 문관으로 근무를 이어갔다.

[모친 백남의 사망]

모친 백남의가 사망했다.

1950

[한국 전쟁 발발 및 현역 복귀]

한국 전쟁 발발과 함께 파면된 민간인 신분에서 육군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했다.

[육군 중령 진급]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될 때 대구로 올라가는 육군본부의 수송지휘관을 맡으며 중령으로 진급했다.

[제9보병사단 참모장 임명]

장도영의 추천으로 제9보병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김호남과 이혼]

첫 부인 김호남과 이혼 절차를 마무리했다.

[육영수와 재혼]

육종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육영수와 대구의 한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는 대구시장 허억이, 신부의 손은 육종관 대신 박정희의 대구 사범 스승 김영기가 잡았다.

1951

[육군 대령 진급]

육군 대령으로 진급했다.

[육군정보학교 교장]

육군정보학교 교장으로 보직 변경되었다.

1952

[차녀 박근혜 출생]

육영수 여사와의 사이에서 차녀 박근혜가 태어났다.

[이승만 축출 계획 가담 (미수)]

군부 내 이승만 대통령 축출 시도에 주동적 역할은 아니었지만, 이용문 준장 등을 보좌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 계획은 미수로 끝났고, 이용문은 1년 뒤 의문의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1953

[육군 준장 진급]

육군 준장으로 승진하여 장군이 되었다.

이후 제2군단 포병사령관을 지냈다.

1954

[3녀 박근령 출생]

육영수 여사와의 사이에서 3녀 박근령이 태어났다.

1955

[제5사단 사단장]

제5사단 사단장으로 보직 변경되었다.

[폭설 사태 문책성 대기 발령]

예기치 않은 폭설로 인한 장병 사고 발생 후 문책성 인사 조처로 대기 발령되었다가 육군대학에 입교했다.

1957

[제6군단 부군단장 및 제7사단 사단장 부임]

육군 소장 진급 심사에서 곽영주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김정렬의 설득으로 통과되어 제6군단 부군단장, 이어 제7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육군대학 졸업]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육군 소장 진급 심사 대상이 되었다.

1958

[육군 소장 진급]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장남 박지만 출생]

육영수 여사와의 사이에서 장남 박지만이 태어났다.

1959

[육군 제6관구사령관]

육군 제6관구사령관으로 보직 변경되었다.

1960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발령받았다.

이 시기 군내 부패가 극에 달했으나, 박정희는 군수 비리가 없도록 엄격히 관리했다.

전 비서관 김종신은 박정희가 사령관 시절 군용 물품을 탐하지 않고, '부대 것'이라며 개인적으로 가져가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이승만 하야 및 4.19 혁명]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4·19 혁명이 발생하며 정치적 격변기를 맞았다.

이 시기 박정희는 부산군수기지 사령관으로 정변을 염두에 두었다고 알려졌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자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으로 부임했다.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 전보]

미국 측의 사상 문제 제기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에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

이 시기 김종필 중령을 비롯한 지지 세력을 규합하며 군사정변을 준비했다.

1961

[4.19 1주년 군사정변 시도 (미수)]

4·19 혁명 1주년 기념식을 거사일로 잡았으나, 학생들의 대대적인 시위가 발생하지 않아 계획이 무산되었다.

일각에서는 당시 시국정화단이 학생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데모를 막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5·16 군사정변 주도]

새벽, 당시 제2군 사령부 부사령관으로서 반공·친미·구악 일소·경제 재건 등을 명분으로 5·16 군사정변을 주도하여 장면 내각을 붕괴시키고 권력을 장악했다.

정변 직후 장도영을 의장으로 하는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 자신은 부의장에 취임했다. 윤보선 대통령은 정변을 묵인하며 '올 것이 왔다'는 태도를 보였고,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의 진압 제안에도 응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의 비호받던 정치 깡패들을 색출하여 군사재판에 회부, 조리돌림 후 사형시켰다.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하고, 장도영이 내각 수반이 되면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했다.

[중앙정보부 발족]

비밀 첩보 기관이자 동시에 국민 감시 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를 발족시켰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취임]

'군 일부 반혁명사건'(알래스카 토벌작전)을 일으켜 군부 내의 반대 세력을 숙청하였고, 장도영마저 이에 관련지어 의장직에서 추방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추대되었다.

[육군 중장 진급]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수출조합법 공포]

수출 진흥을 위한 수출조합법을 공포했다.

[공업표준화법 제정]

수출과 공업화를 위한 공업표준화법을 제정했다.

[케네디 대통령 지령으로 한일회담 준비]

미 존 F.케네디 대통령의 일본 이케다 총리 면담 지령에 따라, 6차 한일회담 준비를 위해 배의환, 정일영 교수를 급거 귀국시켜 회담 의제와 일본의 반응에 대해 준비했다.

[구황실재산법 개정]

장면 정권 때 날림으로 만들어진 ‘구황실재산법 제4조 시행에 관한 건’의 대상을 개정·확대하여 대한제국 황족의 범위를 축소했다.

[독도 영유권 강화 지시]

독도 영유권과 국토 관리를 확고히 하고자 '독도를 정확히 측량하여 토지대장에 등록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고 특별 지시했다.

[육군 대장 진급 및 예편]

육군 대장으로 진급한 후 예비역으로 예편했다.

[이케다 총리와의 한일회담]

이케다 총리가 현금 대신 산업 건설을 제안하자, 박 의장은 '우리는 구걸하려는 것이 아니라 받을 것을 받는 것'이라며 충분한 법적 근거가 있는 청구권임을 강조했다.

[문맹퇴치운동 전개]

이듬해 4월까지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했다.

[학사고시 제도 도입]

학사 자격 국가고시 제도를 도입하고 첫 시험을 실시했다.

1962

[독립운동가 훈장 추서]

이승만 정권 때 훈장 추서가 미뤄지던 김구, 안중근, 이승훈 등 독립운동가 285명에게 건국훈장을 비롯한 독립공로훈장을 추서했다.

[수출진흥법 공포 및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행]

수출진흥법 등 16개 법령을 공포하며 수출진흥정책을 수립하고,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행하며 경제 발전을 모색했다.

울산 공업 단지 건설도 시작했다.

[대통령 권한대행 취임]

구 정치인을 정죄하는 ‘구 정치인 정화법’ 발표에 반발한 윤보선 대통령의 사퇴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역대급 통화개혁 단행]

구 환율을 10대 1로 축소하는 통화개혁을 단행했다.

부정 축재 자금 세탁 방지, 화교 세력의 한국 내 영향력 약화, 중공업 육성 자금 마련을 목표로 했으나, 경제난을 야기하며 실패했다.

당시 한국의 금융 상업적 경제 구조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정책은 예금 동결 조치를 불러왔고, 전체 공장의 45%가 가동을 중지하는 등 사태가 악화되어 결국 철회되었다.

[겸임 내각 수반]

김현철을 후임으로 임명하기 전까지 공석인 국무총리급의 지위인 내각 수반으로도 활동했다.

[5·16 장학회 설립 (정수장학회 논란)]

개인 재산을 기부하여 장학재단인 5·16 장학회(現 정수장학회)를 설립했다고 알려졌으나, 중앙정보부가 김지태에게 부산일보, MBC 주식 및 토지 10만 평을 강제 헌납토록 하여 설립했다는 논란이 존재한다.

이 사건은 당시 최고 권력자의 언론 장악 의도에 의해 언론 자유와 사유 재산권이 중대하게 침해당한 사건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김지태의 차남은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고 45년간 관리한 점은 높이 평가한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울릉도 방문 및 독도 용사 훈장 수여]

동해안 해병대 상륙작전 훈련 참관 후 주문진으로 이동하여 역대 지도자 중 유일하게 울릉도를 방문하고, 이후 독도 의용수비대 출신 용사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전두환, 차지철 등 인재 등용 시도]

인재 등용의 일환으로 전두환과 차지철 등 부하 장교들을 정치권에 끌어들이려 시도했다.

차지철은 국회의원이 되었고, 군에 남겠다는 전두환에게는 특별히 총애를 보였다.

1963

[보리·밀 품종 개발 성공]

식량 자급자족을 위한 보리와 밀 품종 개발에 성공했다.

[3.16 성명 발표]

군정 연장과 함께 구 정치인들의 정치활동 금지를 해제하는 3.16 성명을 발표했다.

이는 군정 연장을 반대하는 야당과의 갈등을 초래했다.

[4.8 선언 발표]

국민투표를 보류한다는 4·8 선언을 했다.

[근로자의 날 제정 지시]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 공표를 지시했다.

[군 전역 및 정치 참여 선언]

군에 복귀하겠다는 혁명 공약과는 달리 강원도 철원 군탄리에 위치한 비행장에서 전역식을 갖고 예비역 육군 대장으로 예편, 정계 참여를 공식화했다.

[국사교육 통일방안 선포]

국사교육의 통일 방안을 선포했다.

[공산주의자 사상 검증 논란]

김준연은 박정희의 공산주의자 의혹을 공개적으로 제기했고, 윤보선은 과거 좌익 활동 경력과 함께 그의 민주주의 신봉 여부를 의심하며 사상 공세를 펼쳤다.

윤보선은 박정희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구민주주의는 대한민국에 맞지 않는다'는 발언과 버트런드 러셀 찬양, 히틀러 평가 등을 들며 논란을 부각시켰다. 박정희는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라며 반박했다.

[직업재활원 개원]

직업훈련기관인 직업재활원을 개원하여 미취직자 구제와 근로여건 개선을 도모했다.

[제5대 대통령 당선]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84.99%의 투표율 속에서 470만 2700여 표(유효투표의 약 46.7%)를 얻어 윤보선을 15만 표차로 꺾고 당선되었다.

특히 농촌 지역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케네디 대통령 장례식 참석]

미 존 F.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조문했다.

[서독 국빈 방문 및 아우토반 시찰]

서독을 국빈 방문하여 에르하르트 수상과 면담 시 한국에 대한 경제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 때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을 보고 한국의 고속도로 건설을 계획하게 되었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라인강의 기적'을 예로 들며 고속도로, 제철, 자동차, 정유, 조선 산업 건설 및 한일협정 체결을 자문했다. 서독으로부터 광부와 간호사 파견을 통해 1억4000만 마르크를 차관으로 도입하기도 했다.

[제5대 대통령 취임 및 제3공화국 수립]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대한민국 제3공화국을 수립했다.

제2대 민주공화당 총재에도 취임했다.

1964

[시도 단위 교육자치제 실시]

시도 교육청에 교육행정권을 위임하는 시도 단위 교육자치제를 실시했다.

[베트남 파병 요청 수락 및 계획 발표]

미국으로부터 베트남 파병 지원 요청을 수락하고, 일부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1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 파월을 시작으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단행했다.

파병은 한국 경제의 활로를 트고 군을 현대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한국군의 목숨을 담보로 한 미국의 용병이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식량증산 7개년계획 발표]

식량 증산을 위한 7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1965년부터 시행했다.

1965

[존슨 대통령과 한미정상회담]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존슨 대통령과 한미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미국 측이 독도를 한일 공동 소유하자는 방안을 제의했으나,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한일기본조약 체결]

막대한 개발 자금 확보를 위해 일본과의 유무상 차관 도입을 전제로 하는 대일 청구권 자금 협상과 연계된 한일 국교 정상화 협상을 적극 추진하여 한일기본조약 등 25개 협정을 정식으로 조인했다.

하지만 이 협상을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 협정으로 일본으로부터 청구권 자금 3억 달러가 1966년부터 10년간 무상 지급되었으며, 이는 포항제철 건설 등 국가 기틀 마련에 사용될 수 있었다. 하지만 '독도를 폭파하자'는 일본의 협박, 독도 밀약설, 개인 청구권 무시 등 논란이 존재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 정권이 6개의 일본 기업으로부터 민주공화당 총예산 2/3에 해당하는 6,600만 달러를 제공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승만 사망]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이 사망했다.

박정희는 그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결정했으나 이승만 측근과 일부 단체들의 반발로 논란이 있었다.

1966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

미국이 원조한 1000만 달러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설립하고, 한 달에 한두 번씩 연구소를 찾아 연구원들과 대화하며 격려했다.

해외에서 뽑아온 박사들에겐 집과 대통령 자신의 몇 배의 봉급을 제공하고 국내에 없던 의료보험을 가입할 수 있도록 하는 등 파격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67

[제6대 대통령 재선]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경제 개발의 성과와 비전을 내세워 윤보선을 116여만 표의 근소한 차로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이 때도 공산주의자 경력, 친일 경력 의혹 등 사상 공세에 시달렸다.

윤보선은 박정희의 친일 경력을 쟁점으로 꺼내며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 광복군의 총부리를 겨누었다'고 비판했고, 베트남 파병을 '미국의 청부 전쟁'이라고 비난했다.

[제6대 대통령 취임]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같은 해 산림청 개청을 추진했다.

[김학규 장군 별세 및 국립묘지 안장]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다 투옥되었던 독립운동가 김학규 장군이 자택에서 별세하자, 정부는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그를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농어촌개발공사 설립]

농어촌 발전을 위한 농어촌개발공사를 설치했다.

1968

[국민교육헌장 제정]

학자들을 초빙하여 바람직한 한국인상과 국적 있는 교육의 전개를 강조하는 국민교육헌장을 제정 반포했다.

이는 국민교육의 기틀이 되었으나 전두환 정권 때 폐지되었다.

[1·21 사태 (김신조 간첩 침투)]

조선인민군 특수부대 31명이 청와대 습격과 정부 요인 암살 지령을 받고 휴전선을 넘어 수도권에 잠입했다.

이들은 경찰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며 교전이 발생, 경찰관과 시민들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반공의식이 급속하게 높아졌다.

침투한 공비 중 김신조 한 명만 생포되었고, 5명은 사살, 나머지 2명은 도주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사건으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순직했다.

[향토 예비군 창설]

자주국방 정책의 일환으로 향토 예비군을 창설했다.

[중학입시 폐지 등 교육 개혁안 발표]

1971년까지 중학입시시험을 폐지하는 등 입시 개혁안을 발표했다.

[대학교 입시 예비고사제 실시]

대학교 입시 예비고사제를 1969년부터 실시하게 했다.

1969

[포항제철 건설 계획 난항]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이 피츠버그에서 KISA 회원사들을 만나 제철소 필요성을 역설했으나, 경제적 타당성 부족을 이유로 국제 차관 도입이 난항을 겪었다.

[농업 기계화 8개년 계획 확정]

농업 기계화를 위한 8개년 계획을 확정했다.

[포항제철 프로젝트 재검토 논란]

박충훈 부총리가 '종합제철 프로젝트 재검토' 발언을 했고, 이튿날 신문에는 '차라리 제철소를 짓지 말고 철을 수입하라'는 사설이 실리기도 하며 논란이 됐다.

[박충훈 부총리 경질]

제철소 건설에 대한 비판적 발언으로 박충훈 부총리를 경질하고 김학렬 경제수석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경제기획원 내에 종합제철건설전담반을 설치했다.

[미국 순방 및 주한미군 철수 갈등]

미국을 방문하여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만났으나, 닉슨 독트린에 의거한 주한 미군 철수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

[포항제철 건설 자금 확보]

제3차 한일각료회담에서 '선조들의 피의 대가'인 대일 청구권 자금의 포항제철 건설 전용 문제에 대해 양국 정부가 각서에 서명하며 최종 합의를 이끌어냈다.

[3선 개헌 국민투표 통과]

대통령 3선 개헌을 골자로 한 개헌안을 국민투표를 통해 통과시켰다.

투표율 77.1%, 찬성률 65.1%를 기록했다.

[구미 전자공업단지 조성 계획 발표]

구미에 외국인 투자 100% 허용, 5년간 법인세, 소득세, 취득세 면제 등 파격적인 조건으로 전자공업단지 조성 계획을 발표했다.

구미 전자공업단지는 1973년 10월에 1,874천 평 규모로 완공되었다.

[농어촌근대화촉진법 승인]

농어촌의 근대화를 위한 촉진법을 승인했다.

1970

[경부고속도로 준공]

국토 대동맥 역할을 하는 경부고속도로를 준공하여 경제 발전의 핵심 기반을 마련했다.

이는 서독 방문 시 아우토반을 보고 영감을 얻어 추진된 것이다.

[무기개발위원회 창설 및 핵개발 결정]

닉슨 독트린과 주한 미군 철수 통보에 대한 대응으로 무기개발위원회(WEC)를 창설하고, 70년대 초반 만장일치로 핵무기 개발을 결정했다.

김종필의 증언록에 따르면, 박정희는 미군이 언제 떠날지 모르니 원자폭탄을 연구하고, 핵무기를 개발하다 미국이 방해해 못 만들게 되면 언제든지 만들 수 있는 수준의 기술이라도 갖춰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수출 10억 달러 달성]

대한민국의 수출액이 10억 달러를 달성하며 경제 성장 동력을 증명했다.

[국방과학연구소 설립]

자주국방 정책의 일환으로 국방과학연구소를 설립했다.

이는 1970년대 핵무기 개발의 핵심 기관이었다.

[장기종합교육계획시안 발표]

1986년까지 의무교육 확대 및 9년 연장, 교육세 신설 등을 포함한 장기종합교육계획시안을 마련 발표했다.

[새마을 운동 제창]

농촌 근대화를 목표로 새마을 운동을 제창, 시작하여 전국민적 운동으로 확산시켰다.

'새마을노래'가 방송을 통해 방영되고 성공 사례가 일간신문에 소개되는 등 적극적인 홍보가 이루어졌다.

새마을 운동은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을 모방한 것으로 파시즘 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였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또한 미신 타파를 명분으로 전통문화 탄압과 석면을 이용한 농촌 가옥 개량 등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관세청 개청]

수출입 관리 및 관세 행정을 담당하는 관세청을 개청했다.

1971

[아르헨티나 농업 이민 프로젝트 (실패)]

대한민국의 농업 확대를 위해 아르헨티나 여의도 70배 규모의 땅을 구매하고 신원 조사를 거쳐 엄선한 농민들을 파견했으나, 기후 부적합과 황무지 등으로 사실상 실패했다.

[한국과학원 설립]

서울 홍릉에 한국과학기술원의 전신인 한국과학원을 설립했다.

[서울 지하철 건설 착공]

서울 지하철 건설 착공식을 개최하며 도시 교통 인프라 확충에 나섰다.

[제7대 대통령 재선]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약 95만 표차로 이기고 3선에 성공했다.

김종필은 1971년 선거에서 박정희 당선을 위해 무려 600억원이나 썼다고 밝혔고, 강창성 당시 보안사령관은 총 대선 자금이 700억원이었다고 밝혔다. 이는 당시 국가 예산의 1할을 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제7대 대통령 취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내수용 생산업체 수출 의무화]

내수용 생산업체에도 수출을 의무화할 것을 지시하여 수출 증진을 독려했다.

[전국 최초 민방공훈련 실시]

전국에서 첫 민방공훈련을 실시하여 국민 안보 의식을 높였다.

1972

[제3차 인력개발 5개년 계획 확정]

제3차 인력개발 5개년 계획을 확정하여 인력 양성 정책을 추진했다.

[통일벼 개발 및 녹색혁명 추진]

녹색혁명을 추진하며 통일벼를 개발했다.

이를 통해 1976년 쌀의 자급자족을 달성하며 식량 문제 해결에 기여했다.

[새마을운동 현장 시찰 강화]

서울시와 경기도 일대 마을을 순방하며 새마을운동을 직접 시찰하고 관리 감독하며 추진력을 높였다.

[만원권 지폐 도안 논란]

만원권 지폐 도안을 석굴암 불상과 불국사로 정하고 친필 서명까지 했으나 기독교계의 반대로 무산, 세종대왕으로 교체되었다.

[최초의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한 간의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여 평화 통일 분위기를 조성했다.

[8.3 긴급 조치 발표]

기업 재정 지원 및 채무 탕감을 위한 8.3 조치를 발표하여 경제 불황에 대응했다.

[10월 유신 단행 및 제4공화국 수립]

대한민국 제3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고, 긴급 조치권, 국회의원 임명권, 간선제 등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는 6년 연임제의 제4공화국 헌법을 제정 통과시켰다.

이로써 18년간의 유신 체제가 시작되었다.

유신 선포 직전 북한에 이를 두 차례 예고하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내각 수상이 권력을 갖고 있는 동안 통일을 이룰 것이며, 이를 위한 '질서 구축'이 우선이라는 입장이었다.

[월성 1호기 건설 계획 확정 및 핵 개발 추진]

한국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월성 1호기 건설 계획을 확정하고 사흘 뒤 캐나다에 원자로 구매 향서를 발송했다.

그가 도입하려던 중수로형 원자로는 플루토늄 추출이 용이하여 핵무기 개발을 염두에 둔 행보로 미국의 반발을 샀다.

1973

[기능공 양성정책 수립]

산업 발전을 위한 기능공 양성 정책을 수립하고, 공장 근로자들을 위한 야간 중학 개설 및 이공계 실업학교 부설을 지시했다.

[중화학공업정책 육성 선언]

중화학공업정책 육성을 선언하고 공업진흥청을 신설했다.

이는 한국 경제의 산업 구조를 고도화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5개 대단위 공업단지 조성 계획 수립]

중화학공업 기반 확충을 위해 온산, 창원, 여수~광양, 군산~비인, 구미 등 5개 대단위 공업단지 조성 계획을 수립했다.

[새마을지도자 연수원 신설]

경기도 수원에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을 신설 건립하여, 농촌 지도자 교육과 양성을 맡게 했다.

[김대중 납치사건]

김대중 당시 민주화 운동가가 일본 도쿄에서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국제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새마을운동 공장 도입 토의]

경제 4단체가 새마을운동을 생산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공장에 도입하는 방안을 토의했다.

[이리 수출자유지역 착공]

이리 수출자유지역 착공을 시작하여 수출 증진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했다.

[제1차 새마을 지도자 대회 개최]

새마을운동을 범국민적으로 확산시킬 것을 결의하는 제1차 새마을 지도자 대회가 열렸다.

1974

[잠실 뉴타운 계획 수립]

330만 평 부지에 25만 인구를 수용하는 잠실 뉴타운 계획을 수립했다.

이와 함께 강남 개발을 촉진하기 위한 다양한 부동산 정책이 추진되었다.

1963년 강남 지역이 서울에 편입된 후, 1967년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 완료와 함께 강남 일대 900만 평이 토지계획지구로 지정되었다. 체비지 사업을 통해 개발 자금을 확보했으며, 강남 집값은 단기간에 폭등하는 제1차 부동산 투기 붐을 겪었다. 정부는 1967년 '부동산투기억제 특별조치법'을 제정했으나, 투기 열풍을 막지는 못했다.

[육영수 여사 피격 사망]

광복절 기념사 도중 재일교포 문세광의 저격으로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머리에 총을 맞고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날 오후 7시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한일 관계가 냉각되었으나 일본의 사과로 정상화되었다.

범인 문세광은 일본 파출소에서 탈취한 권총을 사용했으며, 위조 여권을 소지하고 밀입국한 사실이 밝혀졌다.

1975

[2차 유신헌법 재신임 투표]

2차 유신헌법 찬반 재신임 투표에서 73.1%의 찬성표를 받아 재신임을 받았다.

[인혁당 재건 사건 사법살인]

인혁당 재건 사건 관련자 8명이 대법원 확정 판결 18시간 만에 전격 사형 집행되어 '사법 살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육영수 여사 추모 시 '일수' 창작]

육영수 여사 피격 1년 뒤,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저도 청해대에서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인생의 회한을 담은 시 '일수'를 창작했다.

이 시는 2004년 음반으로도 출시되었다.

그가 쓴 이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님과함께 놀던 곳에 나 홀로 찾아오니 / 우거진 숲속에서 매미만이 반겨하네 / 앉은자리 밟던자국 모래마다 밟던자국 / 저도섬 백사장에 체온마저 따스해라 / 파도소리 예와같네 짝을 잃은 저기러기 / 나와함께 놀다가렴'

[핵무기 포기 각서 제출]

미국의 강력한 압력으로 슐레진저 미 국방장관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핵무기 포기 각서를 써주었다.

이는 자주국방의 웅대한 꿈이 현실적으로 포기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했다.

박정희는 캐나다로부터 플루토늄 추출이 용이한 중수로 원자로 도입을 추진했으며, 프랑스에서는 재처리 시설을 구입하려는 교섭을 계속했다. 미국은 한국의 핵무장 계획을 경계하며, 핵개발을 고집할 경우 안보 지원을 중지하겠다고 강경하게 맞대응했다.

[간도 및 독도 영유권 연구 지원]

국회에서 발간한 '간도 영유권 관계 발췌문서'에 특별 예산을 지원했으며, 1978년에는 독도를 종합 연구하는 데 거액의 예산을 지원하는 등 영유권 확보에 관심을 기울였다.

[김옥선 의원 제명 파동]

신민당 김옥선 의원이 국회에서 '안보 논리로 공안 정국을 조성했다'고 비난하자, 여야 갈등이 심화되며 김옥선이 의원직에서 제명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함대함 미사일 시험 발사 성공]

국방력 증강을 위한 무기 개발 노력의 일환으로 함대함 미사일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

1976

[국비 장학생 유학 제도 신설]

국비 장학생을 선발하여 유학 보내는 제도를 신설, 인재 양성에 힘썼다.

[노동자 야간중학 개설 지시]

노동자에 대한 교육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야간중학 개설을 지시했다.

[쌀 완전 자급자족 달성]

통일벼 개발 및 식량 증산 노력으로 쌀의 한국 자체 생산 및 완전 자급자족을 달성했다.

1977

[무기 국산화 선언]

핵무기와 전투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를 국산화하고 있음을 천명하며 자주국방 의지를 보였다.

[핵개발 추진 포기 공개 선언]

미국의 강력한 압력에 직면하여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이는 핵무기 개발을 통한 자주국방의 꿈이 현실적으로 포기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했다.

[부가가치세 시행]

안정적인 세원 확보와 거래 투명화를 위해 부가가치세를 시행했다.

이는 비자금 마련이 어려워진 대기업과 서민 자영업자들의 반발을 초래하여 1978년 총선 참패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

일부 학자들은 박정희 정부의 이러한 결단이 한국 정부의 안정적인 세입 확보를 가능하게 하여 1997년 외환위기 때도 대응할 재정 여력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코리아게이트 사건 보도]

워싱턴포스트가 한국 정부가 박동선을 내세워 미국 상하원 의원들에게 거액의 자금을 제공했다고 보도했다.

박동선은 도주했고, 미국은 그의 송환을 요구했으나 박정희는 청와대 도청 문제를 들어 거절했다.

이는 박정희의 인권 탄압과 카터 대통령과의 갈등 심화에 영향을 미쳤다. 결국 한미 양국은 박동선이 전면 사면권을 받는 조건으로 증언에 응할 것이라는 합의를 보았고, 사건은 일부 미국 민주당 의원의 징계로 종결되었다.

[전국 국민학교 교과서 무상 지급 확정]

1978년부터 서울을 제외한 전국 국민학교 학생들에게 교과서를 무상으로 지급하는 제도를 확정했다.

1978

[박동선 코리아게이트 증언]

한미 양국 합의에 따라 박동선이 미국으로 건너가 미 국무부와 상하원에서 증언했다.

[세계 7번째 국산 유도탄 시험 발사 성공]

세계 7번째로 국산 장거리 유도탄 및 다연발로켓 시험 발사에 성공하며 자주국방력 강화의 큰 이정표를 세웠다.

[제9대 대통령 당선 (간선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로 제9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어 5선에 성공했다.

이는 유신 체제의 지속을 의미했다.

[제9대 대통령 취임]

제9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취임일은 임시공휴일로 지정되고 통행금지 해제, 수감자 가석방 등 선심 조치가 취해졌다.

1979

[핵개발 88% 완성 언급]

핵개발이 88% 이상 완성되었으며 1983년에는 핵미사일 완성이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보았으나, 그는 그 해 암살당했다.

[카터 대통령과의 한미정상회담 갈등]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의 한미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군 철수 문제로 대립각을 세웠다.

박정희는 45분간 주한미군이 동아시아 방위에 중요함을 '강의'하며 갈등은 심화되었다.

결국 카터 행정부는 주한 미군의 감축 규모를 3000명가량 감축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었다. 박정희는 카터의 방한 기간 동안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회고된다.

[YH 무역 사건 발생]

YH 무역회사 여공들이 신민당사를 점거하고 농성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8월 10일 박정희가 강제 진압을 재가했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이 추락해 사망했다.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

YH 사건에 항의하며 박정희 정권을 강도 높게 비판하던 신민당 김영삼 총재를 박정희가 제거하기로 결정하여 의원직에서 제명시키는 파동이 발생했다.

이는 부마 항쟁의 원인이 되었다.

김영삼의 제명에 미국은 주한미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박정희는 카터와 김영삼에 대한 경멸감을 정책으로 표현하며 갈등은 심화되었다.

[부마민주항쟁 발발]

부산에서 민주화 요구 시위인 부마 민주 항쟁이 시작되어 마산, 창원 등으로 확산되었다.

박정희는 이 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고자 했다.

[부마항쟁 진압을 위한 계엄령 선포]

사태 악화에 따라 부산직할시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부마 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게 하였다.

[암살 (10·26 사건)]

오후 7시경, 궁정동 안가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연회를 하던 도중 김재규의 총에 저격당하여 61세로 사망했다.

이는 한국 현대사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최초 정부 발표와 달리, 발포 직후 7시 55분 미국의사가 운영하는 병원에 먼저 도착했다는 사실이 2016년 공개된 미국무부 해제 비밀문서에서 드러났다. 김재규는 재판에서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거사의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했다. 하지만 사건 며칠 전 CIA 한국지부장을 만난 점, 암살 당일 주한미국대사를 만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며 미국의 개입설 등 여러 배후 의혹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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