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식

독립운동가, 민족 지도자, 교육자, 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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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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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민족 지도자, 교육자, 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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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간디’로 불린 민족 지도자 조만식은 일제강점기 교육 언론 물산장려운동 등을 통해 비폭력 저항을 실천했습니다. 해방 후 북한에서 공산주의 정권 수립에 반대하고 신탁통치에 단호히 맞서며 민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강직한 신념과 희생정신은 오늘날까지 큰 울림을 주며 분단된 역사 속에서 한 인물의 숭고한 선택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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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

[민족 지도자, 고당 조만식 탄생]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독자로 태어난 조만식은 어린 시절부터 강인한 정신력을 길렀습니다.

이는 훗날 그가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04

[러일전쟁 속 신앙의 길]

러일전쟁을 피해 피난 중 급우의 전도로 22세에 개신교에 귀의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술과 담배를 끊고 방탕한 생활을 정리하며 철저한 금욕주의를 실천하게 되었습니다.

1905

[평양 숭실중학교 입학]

신앙적 감화 후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며 학업에 매진했습니다.

이 시기 교장이었던 배위량 박사의 가르침은 그의 금욕주의를 더욱 공고히 했고, 훗날 그의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08

[일본 유학, 간디 정신 계승]

숭실중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 정칙영어학교에서 공부하며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는 간디의 삶의 방식과 복장을 따르며 '조선의 간디'로 불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10

[메이지 대학 진학 및 경술국치 분노]

일본 메이지 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잠시 귀국 중 경술국치 소식을 접하고 치욕스러운 합방에 분노했으나, 아버지의 만류로 격정을 참는 것이 진정한 용기임을 깨달았습니다.

이 시기 송진우, 김성수 등과 교류하며 독립 의지를 다졌습니다.

1913

[오산학교 교사 및 교장 역임]

메이지 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 1915년 교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이승훈의 투옥으로 위기에 처한 학교를 8년간 무봉급으로 봉직하며 교육자로서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1919

[3·1운동 참여와 옥고]

오산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3·1운동에 적극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1년간 복역했습니다.

수감 중 가석방을 거부하며 불법 구금에 대한 불명예를 거부하는 강직한 신념을 보여주었습니다.

1922

[조선물산장려회 결성과 '조선의 간디']

국산품 애용과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독려하기 위해 조선물산장려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취임했습니다.

이를 통해 민족 자본 육성에 힘썼으며, 이 운동을 적극 주도하여 '조선의 간디'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1923

[민립대학 설립 운동 주도]

김성수, 송진우 등과 함께 연정회를 조직하여 민족 교육을 위한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설립하려 했습니다.

이는 일제강점기 민족의 실력 양성을 위한 중요한 시도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되었습니다.

1932

[조선일보 사장 취임과 신념 고수]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의 제8대 사장으로 취임하여 언론 활동에 나섰습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및 지원병 제도 협조 요청을 단호히 거부하며 민족 언론의 기조를 지키려 했으나, 9개월 만에 사임했습니다.

1938

[도산 안창호 선생 장례 주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다 별세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장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일제의 감시와 방해 속에서도 서울에서 장례를 집행하며 민족 지도자로서 동지에 대한 깊은 애도를 표했습니다.

1943

[학도병 지원 강요 거부와 기사 조작]

일제 총독부의 학도병 제도 협조 요청을 단호히 거부하고 조선군 사령관과의 면담도 거절하며 구금되었습니다.

이후 그의 이름으로 학도병 지원 독려 기사가 총독부 기관지에 날조되어 실렸으나, 이는 명백한 도용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친일청산 문제 연구가 김삼웅은 이 학병권유문이 매일신보 평양지사장에 의해 날조된 것이며, 당시 그 지사장이 자살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조만식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용당했음을 강조했습니다. 조만식은 일제 말기까지 끊임없이 감시와 협박을 당하며 지조를 지킨 우국지사였습니다.

1945

[광복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취임]

광복 직후 일본 총독부의 차량을 거부하고,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북한 지역의 치안과 행정을 수습했습니다.

평양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이뤄졌으며, 북한 지역에서 가장 신망 높은 인물로 부상했습니다.

[소련군과 협력,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한 후, 소련군의 권고에 따라 조선공산당과 함께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 선출되었습니다.

당시 소련군 정치담당관이 '평양은 조만식의 판이었다'고 회상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김일성과의 첫 대면]

소련군 정치장교의 소개로 김일성을 만났습니다.

김일성은 조만식을 '선생님'이라 부르며 극진히 대했으나, 뒤로는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워 소련군 장교들을 놀라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만남은 북한 정세의 주요 전환점 중 하나였습니다.

[조선민주당 창당과 반공 노선]

비공산계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최초의 개신교 정당인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당수에 취임했습니다.

그는 반공 노선과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펼치며 북한 지역에서 50만 명의 당원을 확보할 정도로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신탁통치 단호히 반대]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안에 대해 '통일 임시정부 수립'에는 찬성했으나 '후견'이라는 명칭에도 강력히 반발하며 단호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소련 군정의 파격적인 제안과 권총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켰습니다.

소련군은 조만식이 신탁통치 결정에 협력한다면 조선 정부의 고위직, 심지어 대통령 자리까지 제안했으나 그는 "그 말이 그 말"이라며 거절했습니다. 스티코프 소련군 정치장교가 권총을 빼들고 위협하자 자신의 옷자락을 헤쳐 보이며 "그래, 쏘아라"고 맞받았다고 합니다. 이 강직함에 질려 소련군 측은 결국 물러섰습니다.

1946

[신탁통치 반대로 인한 연금]

신탁통치 협정문 안건에 대한 사회를 거부하면서, 북한에서 정권을 잡은 김일성 세력에 의해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에서 축출되고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일본 첩자'라는 누명이 씌워지는 등 정치적 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족과의 눈물겨운 이별]

남한과 북한의 단독 정부 수립이 확실시되자, 자신의 비극적인 최후를 예감하고 연금 상태에서 밀사를 통해 후처 전선애와 세 자녀를 불렀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월남을 권하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건네주는 등 눈물겨운 작별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북한의 저명 인사들이 월남을 권유했으나, 조만식은 "이북 동포들이 고통 받고 있는데 나 혼자만 월남할 수 없다"며 거부했습니다. 그는 가족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는 민족 지도자로서의 깊은 책임감을 보여주었습니다.

1950

[민족 지도자의 비극적 최후]

한국 전쟁 중 퇴각하던 북조선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평양 대동강변 내무성 정보처에서 총살형이 집행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한동안 유엔군 및 한국군에 의한 학살로 주장되기도 했으나, 북한 정권에 의한 희생임이 밝혀졌습니다.

1970

1970.08.15 사후 2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조국에 대한 헌신과 독립운동의 지대한 공로를 인정하여 최고 등급의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을 추서했습니다.

1991

1991.11.05 사후 41년

[국립서울현충원에 유발 안장]

연금 중 아내에게 건넸던 머리카락이 그의 유발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이는 비록 시신은 찾지 못했으나, 그의 희생과 불굴의 정신을 기리고 민족의 품으로 돌아온 것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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