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
독립운동가, 정치인, 교육자, 학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7:11
독립운동의 큰 별 우사 김규식. 불우한 어린 시절을 딛고 미국 유학 로노크 대학 명예박사이자 프린스턴대 석사로 빛나는 학자가 되었습니다. 파리강화회의 한국 대표로 국제 무대에 데뷔 임시정부 학무총장과 부주석을 역임하며 독립 외교를 이끌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에 몸 바치며 민족 통합을 꿈꿨지만 6.25 전쟁 중 납북되어 비운의 최후를 맞이한 시대의 지성이자 통일 운동가입니다.
- 김규식, 경상도 동래부에서 태어나다
- 언더우드 선교사와의 운명적인 만남
- 한성 관립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
- 미국 유학, 새로운 세상으로
- 서재필의 독립신문사에 합류
- 로노크 대학교 졸업 및 프린스턴 대학원 입학
- 프린스턴 대학교 석사 학위 취득 및 귀국
- 인삼 장사를 명목으로 중국 망명
- 몽골에서 무역상으로 활동하며 독립군 양성 모색
- 여운형 등과 신한청년당 창립에 참가
- 뇌종양 수술, 건강 악화에도 독립운동 매진
- 파리강화회의 한국 대표단 수석 대표로 파견되다
- 파리 도착, 한국 독립의 당위성 홍보
- 각지 임시정부의 요직에 선임되다
- 미국으로 건너가 구미위원부 활동 시작
-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회의에서 '아시아 혁명운동과 제국주의' 발표
- 모교 로노크 대학교로부터 명예 법학 박사 학위 수여
- 상하이에 남화학원 설립, 교육 활동 매진
- 소련의 배신으로 강제 추방, 외세 불신 강화
- 난징에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 조직
- 만주사변 계기로 독립운동 일선 복귀, 통합 노력
-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으로 복귀
- 난징을 피해 쓰촨대학교 영문학 교수로 봉직
- 조선민족혁명당 재창립, 중앙집행위원회 국민부 부장 역임
- 임정 외무부장직 사퇴 후 조선민족혁명당 주석 취임
-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장으로 선출
-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으로 재선출
- 조국의 광복, 진정한 독립을 위한 고뇌 시작
- 대한민국 임시정부 1진으로 고국에 돌아오다
-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에 반발, 반탁운동 참여
- 비상국민회의, 민주의원으로 개편되며 부의장 추대
- 미소공동위원회 협력 강조, 입장 변화
-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 본격적으로 주도
-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으로 선출
- 좌우합작 동지 여운형의 암살에 비탄
- 민족자주연맹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
- 경운동 천도교 강당에서 민족자주연맹 결성
-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국 거부로 남북 분열 심화
- 김구와 공동 명의로 김두봉에게 남북 지도자 회담 제안
- 유엔 소총회 결정에 반대, 총선 불참 공동성명
- 예상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남북협상 참석 위해 북행
- 김구, 김일성, 김두봉과 '4김 회동'에서 주요 현안 논의
- 북한의 약속 불이행, 송전 중단으로 남북협상 실패
- 김구 국민장 장의위원회 부위원장
- 한국 전쟁 발발, 북한 인민군에 의해 납북
- 심장병 및 천식 악화로 평안북도 만포진에서 사망
-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 북한에서 조국통일상 추서
1881
[김규식, 경상도 동래부에서 태어나다]
조선 경상도 동래부에서 아버지 김지성(김용원)과 어머니 경주 이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경상도 양산과 강원도 홍천을 오가며 성장했습니다.
1886
[언더우드 선교사와의 운명적인 만남]
4살 무렵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김규식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고아원으로 보내졌습니다.
잠시 친척에게 돌아갔으나 심한 열병을 앓자 언더우드가 다시 거두어 극진히 간호했으며, 이후 언더우드 학당에서 기독교와 영어를 배우며 성장했습니다.
1894
[한성 관립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
언더우드 학당을 마친 김규식은 1894년 3월 한성 관립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습니다.
이곳에서 영국인 교장 허치슨에게 배우며 병약한 몸에도 독서와 사색을 즐기는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1896
[미국 유학, 새로운 세상으로]
서재필의 권유와 언더우드 선교사의 후원으로 1896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1897년 9월 버지니아주 로노크 대학교 예과에 입학하여 학업에 매진했으며, 학비는 스스로 아르바이트와 막노동으로 충당하며 자립심을 길렀습니다.
[서재필의 독립신문사에 합류]
1896년 귀국한 서재필이 독립신문사를 설립하자 그를 찾아가 면담 후 입사했습니다.
김규식은 독립신문사의 영어 사무원 겸 회계 담당으로 일하며 서재필로부터 미국 유학의 필요성을 역설 받고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1903
[로노크 대학교 졸업 및 프린스턴 대학원 입학]
1903년 6월 로노크 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뛰어난 학업 성적(전체 3등)과 함께 한국어, 영어, 불어, 독일어, 라틴어 등 다국어 구사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곧바로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 석사 과정에 입학했습니다.
1904
[프린스턴 대학교 석사 학위 취득 및 귀국]
1904년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박사 과정 진학을 장학생으로 권고받았으나, '고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며 이를 거절하고 귀국하여 조국의 미래를 위해 헌신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1905
[포츠머스 강화회의 참석 실패]
1905년 8월, 러일전쟁 이후 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린 강화회의에 참석하고자 중국 상하이까지 갔으나 여의치 않아 실패했습니다.
결국 11월 7일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1913
[인삼 장사를 명목으로 중국 망명]
1913년 초, 105인 사건 이후 일본의 기독교 탄압이 심해지자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습니다.
인삼 장사를 명목으로 중국으로 망명하여 베이징, 상하이 등지에서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동제사의 중견 임원으로 합류했습니다.
1914
[몽골에서 무역상으로 활동하며 독립군 양성 모색]
1914년부터 2년간 중국 화북과 몽골에서 상업에 종사하며 독립자금을 모금했습니다.
류동렬, 이태준 등과 몽골 울란바토르로 건너가 초보적인 군사학교 설립을 추진했으나 자금난과 이태준의 병사로 실패했습니다.
1917년에는 첫 부인 조은애 여사를 폐병으로 잃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1916년 앤더슨&마이어회사에 입사하여 몽골 접경의 장가구 지점에서 2년간 근무했습니다. 1918년 3월 울란바토르 지점장으로 부임, 낙타를 타고 37일간 몽골 초원을 횡단하는 등 고난을 겪기도 했습니다.
1918
[여운형 등과 신한청년당 창립에 참가]
1918년 8월, 여운형, 서병호 등의 초청으로 상하이로 건너가 신한청년당 창립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청년들에게 단기적 감정보다 장기적 안목으로 유학을 통해 실력을 쌓을 것을 권하며 인재 양성에 힘썼습니다.
1919
[뇌종양 수술, 건강 악화에도 독립운동 매진]
1919년 말, 계속된 두통으로 미국에서 뇌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부작용으로 간질병 등 육체적 고통이 따랐지만, 퇴원 3주 만에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미국 서부 지역을 순회하며 약 5만 2천 달러의 독립자금을 모금하여 상하이 임정에 송금하는 불굴의 의지를 보였습니다.
[파리강화회의 한국 대표단 수석 대표로 파견되다]
1919년 1월, 신한청년당의 수석 대표로 임명되어 프랑스 파리로 파견되었습니다.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당원들이 소중한 결혼 예복까지 팔아 기부하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출국 전 국내 독립 시위를 강력히 주문하여 2·8 독립선언과 3·1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파리 도착, 한국 독립의 당위성 홍보]
1919년 3월 13일, 중국인 여권을 위장하여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 명의로 탄원서를 제출하고, '한국 민족의 주장', '한국의 독립과 평화' 등의 인쇄물을 출간하여 각국 대표들에게 일제의 침략상과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널리 알리는 데 주력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외교부의 비협조로 공식 회의 참석은 좌절되었습니다.
[각지 임시정부의 요직에 선임되다]
파리에서의 활약으로 1919년 4월, 노령의 대한국민의회로부터 외무총장 겸 강화대사에 선임되었습니다.
또한 상해 임시정부 외무총장, 한성임시정부 학무총장, 신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차장 등 여러 임시정부의 핵심 요직에 추대되었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가 구미위원부 활동 시작]
1919년 8월, 열강의 외면에 실망하여 파리위원장직을 사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이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이승만과 함께 독립공채를 발행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펼쳤습니다.
1921
[현순 사태로 임시정부 학무총장직 사퇴]
1920년 상하이 귀환 후 임정 학무총장직에 복귀했으나, 1921년 4월 25일 구미위원장 대리 현순이 독단적으로 '주미대사' 직함을 사용하여 외교적 혼란을 야기하자 도의적 책임을 지고 구미위원부 위원장직과 임정 학무총장직에서 사퇴했습니다.
1922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회의에서 '아시아 혁명운동과 제국주의' 발표]
1922년 1월, 여운형, 원세훈 등과 함께 소련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회의에 한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습니다.
이 회의에서 '아시아 혁명운동과 제국주의'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강대국들의 이기주의를 강력히 비판하고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국제사회에 알렸습니다.
1923
[모교 로노크 대학교로부터 명예 법학 박사 학위 수여]
1923년, 모교인 미국 로노크 대학교에서 자국의 독립운동과 사회활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 법학 박사(LL.D.) 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이는 그의 학문적 성취와 애국적 노력을 동시에 인정한 것입니다.
[상하이에 남화학원 설립, 교육 활동 매진]
중국으로 유학 온 한국인 학생들이 언어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1923년 9월 11일 서병호 등과 함께 상하이에 남화학원(南華學院)을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했습니다.
이 학교는 중국어와 함께 영어 집중 교육을 실시하여 한국 학생들에게 양질의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자 했습니다.
1925
[동아일보에 '반성과 단결의 필요' 칼럼 발표]
1925년 2월 8일부터 동아일보에 '반성과 단결의 필요'라는 주제로 세 차례에 걸쳐 칼럼을 발표했습니다.
이 글을 통해 분열된 민족 진영의 단결과 성찰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독립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소련의 배신으로 강제 추방, 외세 불신 강화]
1925년 11월, 소련 정부가 일본과 비밀리에 한국 민족주의자 축출을 협약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큰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결국 원세훈 등과 함께 강제로 선박에 승선당해 상하이로 추방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국제정세에 대한 외세 불신과 냉소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1927
[난징에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 조직]
1927년 2월, 난징에서 유자명, 이광제 등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기관지 '동방민족'을 창간하여 중국어, 영어, 한글로 발행하며 아시아 피압박 민족 간의 연대와 독립 의지를 고취했습니다.
1931
[만주사변 계기로 독립운동 일선 복귀, 통합 노력]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발발 후, 독립운동 진영의 엄중한 상황을 직시하고 뿔뿔이 흩어진 세력의 통합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중한 민중 대동맹' 수석 전권을 위임받아 미국으로 파견되어 일본의 침략상을 알리고 기부금 모집 활동을 펼치며 독립운동 일선에 다시 나섰습니다.
1932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 발기인으로 참여]
1932년 11월 10일, 상하이에서 의열단, 한국독립당 등 중국 관내와 미주 지역의 주요 독립운동 단체들이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을 목적으로 결성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습니다.
1933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으로 복귀]
1933년 3월 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으로 선출되어 다시 임정의 핵심 요직에 복귀했습니다.
'남경중앙정치학원'의 영어교관으로 활동하며 교수 신분을 활용하여 일본의 감시를 피하는 등 지명수배의 위기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1935
[난징을 피해 쓰촨대학교 영문학 교수로 봉직]
1935년부터 1942년까지, 일본의 추격을 피해 비교적 안전한 쓰촨성 성도의 쓰촨 대학교 영문학 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문학부 외국어학과장 등을 지내며 교재를 집필했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월급 전액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여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조선민족혁명당 재창립, 중앙집행위원회 국민부 부장 역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해체 후, 의열단 등 5개 당이 통합하여 재창립된 조선민족혁명당(민혁당)에 참여했습니다.
중앙집행위원회 국민부 부장으로 선출된 그는 이후 김원봉으로부터 당수직을 양보받는 등 당내 실세로 부상했습니다.
[임정 외무부장직 사퇴 후 조선민족혁명당 주석 취임]
임정 외무부장직에서 공식적으로 해임된 직후, 조선민족혁명당(민혁당) 주석에 취임하며 독립운동 노선을 더욱 명확히 했습니다.
이는 민족통일전선 형성의 중요한 발걸음이었습니다.
1942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장으로 선출]
1942년 11월 18일, 중국 국민당 정부의 권고에 따라 김구, 김원봉 등과 합작을 결정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장에 선출되었습니다.
1943년 2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 주석에 다시 추대되는 등 임정 내에서의 입지를 강화하며 항일 선전 활동에 주력했습니다.
1944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으로 재선출]
1944년 4월 24일, 임정 내 제2당인 조선민족혁명당의 대표 자격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에 재선출되었습니다.
그는 중국 국민당 정부와 협의하며 임정의 국제적 승인을 위해 노력했지만, 투표권 없는 명예직에 가까웠기에 주로 선전 및 외교 문제에 집중했습니다.
1945
[조국의 광복, 진정한 독립을 위한 고뇌 시작]
1945년 8월 15일, 조국의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진정한 민족의 광복은 해방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민족이 통일되어 상호 신뢰와 보완성을 유지해 나가는 데 달려 있다'고 역설하며 분단된 조국의 미래에 대한 깊은 고뇌를 드러냈습니다.
[조선인민공화국 외교부장직 공식 거절]
1945년 9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 외교부장에 선임되었으나, 11월 28일 이 직책의 취임을 공식적으로 거절하며 '비법적인 내각이며 입각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는 그의 중도적 원칙을 보여주는 행보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진으로 고국에 돌아오다]
1945년 11월 23일, 김구 등과 함께 임시정부 1진으로 상하이 비행장을 떠나 경기도 김포 비행장에 귀국했습니다.
미군과 소련에 의해 분할된 조국의 현실에 깊은 한탄을 금치 못하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라고 비통해했습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에 반발, 반탁운동 참여]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5년간의 신탁통치가 협의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김구 등과 함께 긴급 비상대책회의를 통해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구성에 참여했습니다.
초기에는 반탁론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1946
[비상국민회의, 민주의원으로 개편되며 부의장 추대]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가 과도정부 수립을 위한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으로 개편되면서 김규식은 이승만 의장, 김구와 함께 부의장에 추대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위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조선민족혁명당 주석직 사면 및 탈당]
1946년 2월 18일, 한국의 완전독립과 신국가 건설을 위해 개인이나 당파적 이해를 초월해야 한다고 선언하며 조선민족혁명당(민혁당) 주석직을 사면하고 동당을 탈퇴했습니다.
이는 그가 당리당략보다는 민족 전체의 통합을 우선시했음을 보여줍니다.
[미소공동위원회 협력 강조, 입장 변화]
1946년 3월 20일,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예비회담이 개최되자 기자회견에서 미소공위의 성공적 진행을 위해 협력을 강조했습니다.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서는 과도정권 수립 후에 논의해야 한다고 밝히며 초기 반탁론에서 입장을 변경, 실용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 본격적으로 주도]
1946년 7월 25일, 존 하지 미군정 사령관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정식으로 시작했습니다.
좌우합작위원회를 통해 극좌와 극우를 아우르는 통일정부 수립을 모색하며 분열된 민족의 통합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으로 선출]
1946년 12월 11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관선의원에 선출된 후, 다음 날 개원식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이 의원이 미군정의 자문기관이 아닌 '우리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정하는' 자주적인 입법기구임을 강조하며 의원들에게 회의 절차를 상세히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1947
[조선적십자사 회장으로 선출]
1947년 3월 16일, 조선적십자사 회장에 선출되어 한국 적십자사의 부활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임시 총재로서 활동을 이끌었으며, 국제적십자사 가입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좌우합작 동지 여운형의 암살에 비탄]
1947년 7월 19일, 좌우합작위원회 좌측 대표이자 오랜 동지였던 여운형이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습 절명했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고 비탄에 잠겼습니다.
여운형의 죽음은 좌우합작운동이 사실상 좌초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그는 여운형의 영결식에서 애통한 추모사를 남겼습니다.
[민족자주연맹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
좌우합작운동의 좌초 이후, 1947년 9월 27일 민족자주연맹준비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준비위원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는 중간 노선을 지향하는 세력들을 규합하여 민족 통합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경운동 천도교 강당에서 민족자주연맹 결성]
1947년 12월 20일, 경운동 천도교 강당에서 민족자주연맹이 정식으로 결성되었습니다.
의장으로 추대된 김규식은 결성식에서 극좌와 극우를 배제하고 민족 주체성을 바탕으로 한 통합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미군정 수뇌부도 참석하여 그의 노선을 지지하는 축사를 했습니다.
1948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국 거부로 남북 분열 심화]
1948년 1월 23일,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국이 소련 대표에 의해 거부되면서 한반도의 분단이 가시화되었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이승만의 단정단선론과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론으로 민족 진영이 극심하게 분열되었습니다.
[김구와 공동 명의로 김두봉에게 남북 지도자 회담 제안]
1948년 2월 16일, 김구와 공동 명의로 북한의 김두봉에게 서신을 보내 남한 단독 선거 강행을 저지하고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남북 지도자 회담을 소집할 것을 강력히 제안했습니다.
이는 그의 일관된 민족 통합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유엔 소총회 결정에 반대, 총선 불참 공동성명]
1948년 3월 12일, 유엔 소총회에서 조선에 가능한 지역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 측 제안이 통과되자, 김구, 김창숙, 조소앙 등과 함께 이에 반대하며 남한 단독 총선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분단 고착화를 막으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예상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남북협상 참석 위해 북행]
1948년 4월 21일, 남북협상이 정치적 자살 행위임을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 예술계 인사 108인의 지지 서명에 따라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북행했습니다.
북행에 앞서 민주주의국가 건립, 사유재산제도 승인, 전국적 총선거 통한 통일정부 수립 등 5원칙을 제안했습니다.
[김구, 김일성, 김두봉과 '4김 회동'에서 주요 현안 논의]
1948년 4월 30일, 평양의 김두봉 자택에서 김구,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4김 회동'에 참여했습니다.
수리조합 개방, 전력 송전, 조만식 월남 허용, 안중근 유골 이장 문제 등 남북 간 주요 현안에 대해 논의했으며, 김일성은 일부 사안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북한의 약속 불이행, 송전 중단으로 남북협상 실패]
1948년 5월 14일, 남북협상 당시 김일성이 약속했던 남한으로의 송전이 일방적으로 중단되면서, 남북협상은 사실상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좌절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남북협상에 참여했던 중도 정치인들의 입지는 더욱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1949
[이승만 대통령 예방]
유엔의 대한민국 정부 승인 이후 현실 정치를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며, 신년 인사차 경무대에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했습니다.
이는 단정단선론과 남북협상론으로 틀어졌던 관계 회복의 신호탄이었습니다.
[김구 국민장 장의위원회 부위원장]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자, 다음 날인 27일 그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결정하고 '고백범김구선생국민장의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김규식은 오세창 위원장 밑에서 조완구, 이범석과 함께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어 김구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습니다.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다]
민주국민당, 한국독립당 등 12개 정당·단체 대표자들이 모여 조직된 민족진영강화위원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하지만 민족진영 내부의 알력으로 민주국민당이 참가 보류를 선언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950
[한국 전쟁 발발, 북한 인민군에 의해 납북]
한국 전쟁 발발 직후 공산 치하의 서울에서 북한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습니다.
주변의 피신 권유에도 자신의 신변을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그는 비서 권태양의 동행으로 북으로 끌려갔습니다.
이는 당시 많은 중도 정치인들이 겪었던 비극적인 운명이었습니다.
[심장병 및 천식 악화로 평안북도 만포진에서 사망]
북한 인민군에 의해 평안북도 만포진 부근으로 끌려가던 중 오랫동안 앓아왔던 심장병과 천식 등의 지병이 악화되어 69세의 나이로 비운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정확한 사망 장소는 불확실하나,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그의 묘소가 있습니다.
1989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납북 독립운동가 포상을 결정한 노태우 대통령의 결정에 따라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이 추서되었습니다.
1990
[북한에서 조국통일상 추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습니다.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