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

정치인, 독립운동가, 공산주의자, 언론인, 사회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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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18- 03: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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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정치인, 독립운동가, 공산주의자, 언론인, 사회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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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핵심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여러 차례 체포와 탈옥 망명을 반복하며 국내외에서 투쟁했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 재건을 주도하며 남한 좌익 세력의 정점에 섰다. 북한 월북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겸 외무상 등 고위직을 역임하며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 한국 전쟁 중 김일성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 ‘미제 간첩’이라는 오명을 쓰고 비극적으로 숙청된 인물이다. 남북한 모두에게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복합적인 역사적 인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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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비운의 시작, 서자로 태어나다]

대한제국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몰락 양반 가문의 서자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어머니는 그에게 지극한 정성을 쏟았으나, 서자라는 신분은 그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신라의 문신 박제상 56대손으로, 아버지 박현주와 소실 이학규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년도에 대해 1898년, 1901년 설도 있으나 1900년생이 일반적이다. 유복한 환경 속에서도 서자라는 이유로 멸시와 천대를 받았으며, 이는 그의 저항의식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1915

[수재의 꿈, 경성 유학]

대흥보통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황국신민화 교육이 한창이던 시기였으나, 그는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미국 유학을 꿈꿨다.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심훈, 한설야 등과 교류했다. 특히 영어 성적이 우수하여 종로 YMCA 청년회 영어학당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며 유학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경제적 여건으로 미국 유학은 좌절되었다. 독서를 좋아하여 동학 농민 운동 서적, 홍길동전, 군주론 등을 탐독하며 사회 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1919

[독립운동 투신과 공산주의 각성]

전국에서 일어난 3.1 만세 운동에 직접 참여하여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3.1 운동 참여 혐의로 헌병대로 끌려갔으나 퇴학은 면했다. 박헌영은 해방 후 3.1 운동을 '현대 세계사의 초기에 일어난 동방에서 가장 큰 봉기'라고 찬양하며 자신을 공산주의 진영으로 이끌었다고 고백했다.

1920

[중국 상하이 망명, 동지들과 만나다]

일본 도쿄에서 고학을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아 망명하여 중국 상하이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김단야와 임원근을 만나 공산주의 운동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20년 9월 일본으로 밀항하여 두 달 만에 상하이로 넘어갔다. 상하이에서 고려공산청년회 상해지회 비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입당 등 본격적인 공산주의 활동을 시작했다. '가장 위대한 영도자'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1922

[귀국 시도와 첫 투옥]

국내 공산당 조직 결성을 위해 비밀리에 조선으로 귀국하려다가 중국 안동현에서 신의주 경찰에게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모스크바 원동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 후 코민테른의 지시로 국내 잠입을 시도했으나,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1년 10개월형을 언도받고 1924년 1월에 출소했다.

1924

[언론인 박헌영, 일제 탄압에 좌절]

출소 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기자로 활동했으나, 사회주의 언론인 활동을 경계한 총독부의 압력으로 4개월 만에 해직되었다.

이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이직했으나 이 역시 필화 사건으로 1년 만에 해직된다.

허헌 사장의 추천으로 동아일보 지방부 기자로 입사했으나 1924년 8월 해직되었다. 같은 해 9월 조선일보에 취직하여 사회부, 학예부 기자로 활동했으나 '화요 3인조'로 불리며 좌경화된 기사를 다수 반영하다 1925년 9월 '소련의 힘을 빌려 조선독립을 쟁취하자'는 신일용의 필화 사건으로 조선일보가 정간되면서 해고되었다. 그의 기사는 답답하고 지루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1925

[조선공산당 창당 주역으로 부상]

김약수, 조봉암 등과 함께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을 창당했다.

박헌영은 그 산하 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로 선출되어 당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이는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경성 소공동의 중식당 아서원에서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을 창당했으며, 창당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잇따른 지도부의 옥사 및 병사로 인해 박헌영은 당내 지도적인 위치로 올라서게 된다. 언론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를 비난하는 성명과 격문을 배부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과격한 반기독교 운동의 선봉]

한양청년연맹 주최 '반기독교 대강연회'에서 '과학과 종교'라는 주제로 기독교의 역사와 과학 탄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기독교를 제국주의의 아편으로 규정했다.

이후 잡지 '개벽'에 기독교를 비판하는 칼럼 '역사상으로 본 기독교의 내면'을 발표하며 기독교가 서양 제국주의의 정신적 착취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기독교계 인사들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체포 위기에 처하는 등 갈등이 심화되었다.

[절대적 비밀 유지, 혹독한 고문 속에서]

신의주 사건을 계기로 아내 주세죽과 함께 경성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모진 고문에도 조직과 동료들의 정보를 끝까지 발설하지 않았다.

일제 밀정에 의해 상하이 여운형에게 보내려던 보고서가 발각되면서 조선공산당 조직이 드러났다. 일왕 반역, 공산당 조직, 폭력·선동, 노동자 파업 독려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냉수 고문, 고춧가루 물 고문 등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 1926년 6.10 만세운동의 배후 주모자로 몰려 전기고문까지 당했으나 혐의를 찾지 못했다.

1927

[광인 연극, 감옥을 벗어나다]

재판 도중 극심한 고문으로 인한 공황 상태와 동료들의 죽음에 자살 시도와 단식을 반복하다가, '정신이상자' 행세를 통해 병보석으로 석방되는 극적인 탈출에 성공했다.

신의주 재판소에서 열린 첫 공판에서 '공산주의의 목적은 해방의 정의와 실현'이라 주장하며 난동을 부려 정신이상자로 낙인찍혔다. 똥을 벽에 칠하고 먹는 등의 기행을 벌여 재판관들을 경악시켰다. 이 행동이 연극이었다는 반론도 있다. 석방 직후 아내 주세죽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도망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후일 북한에서 '일제에 항복하여 동료를 팔아넘긴 대가'라는 근거 없는 비난의 빌미가 되었다.

1928

[모스크바 유학, 호찌민과 교류]

모스크바 국제레닌대학교에 입학하여 공산주의 이론을 심화하고 1929년 2월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이곳에서 베트남의 호찌민과도 친분을 쌓았다.

국제레닌학교 재학 중 '한국어, 일본어, 영어,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기록될 정도로 언어 능력이 뛰어났다. 영어 강의반에 소속되어 공부했으며, 동방근로자대학 2년 과정을 마친 후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인민의 고무래'라는 뜻의 '이정(而丁)'이라는 아호를 지었다.

[소련으로의 극적인 탈출]

함경남도 석왕사에서 요양하던 중 돌연 사라져 블라디보스토크로 비밀리에 탈출했다.

이후 아내 주세죽과 함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향했다.

임신한 아내 주세죽을 데리고 모스크바에 도착했으며,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에서 딸 박 비비안나가 태어났다. 그의 탈출 사실은 신문에 보도되었고, 가수 김용환이 이를 바탕으로 '눈물 젖은 두만강'을 작곡했다.

1931

[상하이에서 공산당 재건 주력]

코민테른의 지시로 중국 상하이로 돌아와 국내 조선공산당 지도 임무를 맡았다.

잡지 '콤뮤니스트'를 발행하여 국내로 밀반입시키는 활동을 벌였다.

상하이로 건너가면서 4살 된 딸 박 비비안나를 모스크바 육아원에 맡겨야 했다. 그는 윤봉길 의거에 대해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뒷받침하지 않은 극소수에 의한 폭력'이라며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으나, 동시에 '통쾌한 기분'이라고 언급하는 복합적인 태도를 보였다.

1933

[상하이 재체포, 또다시 고문]

상하이 부두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김단야를 추적하던 경찰에게 오인 체포되었으나, 박헌영은 극심한 고문에도 조직 정보를 발설하지 않았다.

밀폐된 공간에서 구타당하면서도 동료들의 위치를 함구했다. '1928년 이후 정신병 치료를 위해 탈출했으며, 동료들이 자신을 정신이상자로 취급하여 활동할 수 없었다'는 거짓 진술로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일본 경찰은 증거 불충분으로 20일 만에 심문을 끝내고 그를 경성지방법원에 송치했다.

1934

[징역 6년형 선고]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재판은 그의 등장에 수백 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비공개로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수감 중 아버지 박현주가 아들 때문에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형무소에서 보낸 시간을 모두 합치면 6만 년은 될 것이라고 회고했다.

1939

[가석방과 아내의 재혼 소식]

대전형무소에서 5년 만에 가석방되어 출옥했다.

출소 직후 아내 주세죽이 김단야와 재혼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주세죽은 남편이 죽은 줄 알았다고 하지만, 김단야가 그의 생존 사실을 알면서도 알리지 않았다는 설도 있었다. 박헌영은 심적 고통과 실망감에 술에 찌들어 방황했다. 1937년부터 모스크바에서 이성태의 모함으로 '친일파 가정 출신, 일본 밀정'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40

[경성콤그룹 활동 재개]

경성콤그룹의 지도자 겸 기관지 '코뮤니스트'의 편집 책임을 맡아 지하 항일 운동을 재개했다.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피해 서울, 인천, 청주 등을 오가며 활동했다.

1940년 가을 창씨개명 명령을 거부했으며, 경성콤그룹이 발행한 '코뮤니스트'는 전국에 배포되었다. 이 기간 중 정순년과 인연을 맺어 1941년 3월 아들 박병삼이 태어났으나, 박헌영의 피신으로 헤어지게 된다.

1942

[위장 취업과 지하 은신]

경성콤그룹이 발각되어 검거령이 내려지자 서울 아지트를 버리고 대구, 전남 광주로 피신했다.

'김성삼'이라는 가명으로 벽돌 공장의 인부로 위장 취업하여 3년간 은신하며 지하 활동을 이어갔다.

행상인, 약사, 점쟁이 노릇까지 해가며 일제 경찰과 밀정들의 감시를 피했다. 이 시기에 뚜렷한 조직 활동 자료는 없으며, 몇몇 동지들과 연락하는 정도였다.

1945

[광복, 그리고 서울 귀환]

광복 소식을 듣고 목탄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해방을 '아닌 밤중에 찰시루떡 받는 격'이라고 표현했다.

8월 17일에는 건준 전남지부 트럭을 얻어 타고 상경했다는 설도 있다. 이승엽 등 서울의 사회주의자들이 조선공산당 현판을 내걸고 외곽 조직을 재건하려 했으나, 박헌영 일파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독자적인 조선공산당 창당을 선언하며 해체시켰다.

[조선공산당의 노선, 8월 테제 발표]

명륜동에서 '8월 테제'를 발표하며 봉건적 잔재 일소, 자본주의 수용, 유산계급과의 통일전선 형성, 민주주의 훈련을 통한 사회주의 혁명 준비 등의 노선을 제시했다.

경성콤그룹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도 참여했으나 간부직은 사양하고 평회원으로 활동했다. 건준 내 민족주의자들을 견제하고 좌익 세력 확장을 시도하며 여운형과 애증 관계를 형성했다.

[조선공산당 재건과 인민공화국 선포]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책임비서에 선출되었다.

이후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정부화 선언하고 초대 주석에 이승만을 지목했다.

조봉암을 배제하며 김일성계열 및 다른 공산주의자들과의 갈등의 씨앗을 뿌렸다. 이 시점부터 여운형을 경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두 사람 간의 반목이 심화된다. 박헌영의 인공 선포는 여운형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진행되었다.

[김일성과의 첫 회동, 분단의 씨앗이 되다]

개성에서 김일성과 비밀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당 중앙의 위치와 북조선분국 설치 문제를 놓고 격론 끝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에 합의했다.

김일성은 소련의 지원을 바탕으로 북조선분국 설치를 주장했고, 박헌영은 일국일당 원칙을 강조하며 반대했다. 이 합의는 사실상 김일성과 소련 군정의 의도가 관철된 것으로, 박헌영의 정치적 실책 중 하나로 평가되기도 한다. 김일성이 분국 책임비서에 오르지 못한 것은 당시 그의 지위가 확고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신탁통치 논란과 입장 선회]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이 국내에 보도되자 초기에는 김구 등과 함께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에 참여하며 반탁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1946년 1월 2일, 소련의 지시를 받은 뒤 갑자기 찬탁(신탁통치 지지)으로 입장을 바꿨다. 이로 인해 우익 세력과 친일파들에게 '매국노', '친소파'로 규정되며 심한 비난과 테러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다. 미군정 존 하지 사령관의 보고서에도 박헌영의 입장 변화가 기록되어 있다.

1946

[미군정의 체포령과 지하 활동 심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등으로 미군정이 공산당을 탄압하자, 미군정은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체포령 이후 박헌영은 남한 각지에 비밀 거처를 마련하고 당원들의 도움으로 미군정의 추격을 피해 수시로 거처를 옮겨다니며 은신해야 했다. 이는 그의 정치적 활동에 큰 제약이 되었다.

[대구 10.1 사건에 대한 입장 표명]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9월 총파업이 대구에서 10.1 사건으로 확산되자, 박헌영은 이를 '조선민주독립을 위한 투쟁의 진정한 영도자'들의 비타협적 투쟁으로 평가했다.

대구 시위 도중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자 박헌영은 무력 시위 중단을 촉구했으나,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 경찰과 시위대 간의 폭력 사태로 이어졌다. 그는 즉시 서울을 떠나 은신했다. 북한에서는 이 사건을 '민주개혁을 반대하는 반동들을 반대하여 일어난 인민들의 정당한 항쟁'으로 평가한다.

[남조선노동당 창당]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이 통합하여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창당하고 박헌영이 초대 부위원장이 되었다.

북한에서는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이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을 창당했다. 남로당 결성 과정에서 미군정의 탄압과 3당 간의 이해관계로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소련의 개입으로 합당이 성사되었다. 박헌영은 당의 통합을 부정적으로 생각했으나 소련의 지시를 거스를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북로당 창건을 계기로 김일성과의 위상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1947

[남한 탈출, 북한으로 월북]

미군정의 체포령과 우익 단체들의 테러 위협을 피해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월북했다.

이후 황해도 해주 등지에 체류하며 남한의 남로당을 서신으로 지휘했다.

월북 전 미군 정보문서에서는 당시 남한 총선거가 실시될 경우 박헌영이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하기도 했다. 그의 월북은 정치적 행보 중 최악의 실수라는 시각도 있다. 소련 부영사 스티코프의 일기에는 박헌영이 관 속에 들어가 북한으로 탈출했으며, 스티코프에게 행동 지침을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1948

[남북협상 참여, 그리고 북한 잔류]

김구, 김규식 등 남한의 주요 정치인들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가했다.

회의에서 미국을 '제국주의'로, 남한 단독 총선거 참가자를 '망국노'라 비판하며 과격한 언사를 사용했다.

남북협상 이후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잔류했다. 그의 북한 잔류는 스탈린이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점지한 사실상의 결과였다. 스탈린은 박헌영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꺼렸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남조선노동당과 북조선노동당이 통합되면서 그의 지위는 김일성 아래로 격하되었다.

[북한 정권 수립과 고위직 역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부수상 겸 외무상에 선출되었다.

이로써 그는 북한 정권의 핵심 요직을 맡게 되었다.

북한 정권 출범은 소련 군정이 주도했으며, 내각 인선과 헌법 제정에도 소련의 지시가 있었다. 1949년 2월 김일성과 함께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을 면담했으며, 이는 두 사람의 최고 밀월기로 평가되기도 한다.

1949

[평양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다]

평양에서 윤레나와 재혼했다.

본부인 주세죽과의 딸 박 비비안나가 일시적으로 북한에 체류 중인 그를 찾아오기도 했다.

윤레나와의 사이에서 딸 나타샤와 아들 세르게이가 태어났다. 1949년 9월 30일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후, 10월 4일 박헌영 외무상 명의로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로 결정했다고 통보하며, 북한 최초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체결했다. 이는 북한 외교사의 중요한 기록이다.

1950

[한국 전쟁 발발과 '20만 봉기설' 논란]

한국 전쟁 발발 직전, 김일성에게 '인민군이 남한으로 내려가면 남한 내 남로당원 20만 명이 봉기할 것'이라고 장담하며 남침을 부채질했다는 주장이 있다.

일각에서는 박헌영이 남침을 반대하고 옹진반도 점령 후 협상을 주장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김일성과 박헌영은 1950년 4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의 남침 동의를 얻어냈으며, 5월에는 베이징에서 마오쩌둥의 동의도 얻어냈다. 전쟁 발발 후 6월 28일 서울에서 방송 연설을 통해 남조선 인민들의 봉기를 촉구했다. 하지만 실제 남한에서는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다.

[전세 역전과 김일성과의 갈등 심화]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역전되자 김일성과 박헌영 사이에 전쟁 수행 작전을 두고 격렬한 갈등이 불거졌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해오자 박헌영은 '즉각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김일성은 '산속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벌여야 한다'고 맞섰다. 1950년 11월 7일 볼셰비키혁명 기념행사에서는 김일성이 전쟁 열세의 책임을 물으며 박헌영에게 잉크병을 집어던지는 '잉크병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공산주의 활동 경력의 대선배인 박헌영은 김일성을 '소련을 배경으로 호가호위하는 풋내기'로 여겼다.

1952

[미군의 세균전 주장을 국제사회에 제기]

외무상 명의로 유엔 총회에 성명서를 보내 미군이 조선에서 세균전 무기를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국제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다.

1952년 1월과 2월 두 차례에 걸쳐 김일성에게 전쟁 중단을 촉구하기도 했다. 전쟁으로 인한 인명 살상과 물자 피해를 들어 승산이 없음을 역설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쟁 기간 중 남한의 친척들은 월북자의 가족으로 고난을 겪었으며, 그의 부모와 조부모 묘는 파헤쳐지기도 했다.

1953

[남로당계 숙청의 시작과 가택 연금]

리승엽 등 남로당계 인사들이 '미제의 스파이', '반당 종파분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자, 박헌영 또한 '반란'의 후원자로 몰려 가택 연금당했다.

3월 31일 김일성은 박헌영과 그 추종자들이 당내에서 종파를 조직하고 정보를 미국에 빼돌렸으며 한국 전쟁 패배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박헌영은 자신에게 뒤집어씌워진 혐의를 모두 부인하고 자기비판을 거부하며 질문에만 답변했다. 체포와 함께 당에서 제명되고 부총리 겸 외무상 직위에서도 해임되었다.

1955

1955.12.05 사후 2년

[김일성에 의한 숙청과 비극적 최후]

북한 최고재판소 특별재판에서 '북한 정권 전복 음모, 반국가적 간첩테러 및 선전·선동행위' 혐의로 사형 및 전재산 몰수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다.

김일성 주체사상 확립의 희생양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재판에서 북한 최고재판소는 박헌영을 '미제의 간첩'으로 몰아붙였으나, 박헌영은 '그렇겠지'라고 대답하며 혐의를 부인했다. 최후 발언에서는 자신을 '미제의 간첩'이라 시인하면서도 남로당 간부들은 죄가 없다고 주장했다. 소련과 중국에서 박헌영의 처형을 막으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김일성은 '8월 종파 사건' 이후 연안파 세력과의 제휴를 우려하여 서둘러 처형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확한 처형 시점과 장소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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