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독립운동가, 정치가, 언론인, 체육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9- 02:18:51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정국의 주요 정치인.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3.1 운동 기획 핵심 역할. 상하이 임시정부 외무부 차장 중국 혁명 참여 등 국제 외교 활동. 조선중앙일보 사장 조선체육회 회장 역임.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 결성 혼란 수습 주도. 좌우 합작 운동에 헌신했으나 잦은 정치 테러에 시달리다 1947년 암살. 사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된 좌우를 아우르는 민족 지도자.
- 평등 사상의 실천, 노비 해방
- 3.1 운동의 불씨를 지피다, 신한청년당 창설
- 임시정부 참여, 국호 '대한민국' 반대 논란
- 일제의 국빈 대접 거부, 제국호텔에서 조선 독립을 외치다
- 볼셰비키와의 연대, 레닌과의 역사적인 만남
- 상하이에서의 극적인 체포와 국내 송환
-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의 숨은 조력자
- 일제 패망 예측, 해방 후 대비를 시작하다
- 일제에 의한 투옥과 가혹한 고문
- 강제 전향, 지울 수 없는 오점
- 해방을 준비하다, 건국동맹 비밀리에 창설
- 혼란 수습을 위한 총독부와의 교섭
- 해방의 주역, 건국준비위원회 발족과 감격적인 연설
- 건준의 변모, 조선인민공화국 출범
- 미군정 사령관과의 첫 만남, 오해와 불신
- 임시정부 환국, 그러나 법통론에 반대
- 민족통일전선을 향한 조선인민당 창설
- 오보가 불러온 '좌우 분열'의 시작
- 좌우 합작의 시도, 그러나 하루 만에 좌절
- 통일 임시정부 수립의 실패, 제1차 미소공위 결렬
- 이승만 '정읍 발언'에 단호히 반대
- 민족 통일의 염원, 좌우합작운동 추진
- 좌우 합작의 절정, 7원칙 합의와 테러
- 끊이지 않는 위협, 자택 폭파 테러
-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근로인민당 창설
- 마지막 희망, 제2차 미소공위 재개
- 비극적인 종말,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되다
- 60만 애도 인파, 서울을 뒤덮은 흰 물결
- 최고 등급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1886
[몽양, 태몽으로 세상에 오다]
경기도 양근군 서시면 묘곡에서 여정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 여규신이 태양이 떠오르는 꿈을 꾸고 낳았다 하여 훗날 아호를 몽양(夢陽)이라 했다.
어린 시절 신분 차별에 대한 저항 의식과 평민·천민에 대한 동정심을 키웠으며, 노비와 상민의 장례도 보살피는 등 평등 사상을 실천했다.
1900
[신학문과의 첫 만남, 배재학당 입학]
7촌 종숙 여병현의 영향으로 감리교 학교인 배재학당에 입학하며 신학문을 접했다.
이 무렵 상동교회를 통해 기독교인이 되었으나, 예배 불참으로 인한 담임교사의 부당한 체벌에 반발하여 1년 만에 자퇴했다.
이후 흥화학교를 거쳐 관립 우무학당에 입학했으나, 학당이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자 학교 인수 반대 운동을 이끌었다.
우무국 기술관 채용 제안도 '일본인들이 통신원을 가로챈 것'이라며 거부하며 독립 의지를 보였다.
1906
[평등 사상의 실천, 노비 해방]
양평군 묘골에 개신교 교회를 세우고 문중 일족에게 전도하며 기독교인이 되게 했다.
일찍부터 신학문과 기독교에 접하며 개혁 사상을 품었고, 1908년 부친의 3년상을 마친 후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고 노비문서들을 불살라 집안의 모든 노비를 해방시키는 파격적인 행동을 감행했다.
노비들이 자신에게 반말을 하자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네들이 받았구나"라며 웃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907
[안창호 강연에 감화, 독립운동의 서막]
동생 여운홍과 함께 대한협회 강연회에서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크게 감화되어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했다.
[민중교회에서 사회 개혁의 꿈을 키우다]
초기 민중 교회였던 승동교회(백정 등 천민이 주요 신자였던 진보적 교회)에서 조사(전도사)로 일하며 사회 개혁 사상을 발전시켰다.
1910
[교육을 통한 계몽 활동]
강원도 강릉의 초당의숙 교사가 되었으나, 1911년 일본식 연호 사용 반대를 이유로 학교가 폐교되었다.
이후 1911년부터 1913년까지 평양 장로교 신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며 승동교회 전도사로 다시 활동했다.
1914
[중국행,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시작]
집안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 중국 난징 금릉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하여 학업에 열중했다.
3년 뒤 영문학 과정을 수료하고 상하이에서 출국수속 관련 업무를 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의 추천을 받았다.
1917
[중국 혁명가와의 조우, 쑨원을 만나다]
중국국민당의 원수 쑨원을 만나 교류를 시작했으며, 같은 해 여름에는 은밀히 귀국하여 한강에서 이범석을 만나 상하이로 함께 떠났다.
1918
[3.1 운동의 불씨를 지피다, 신한청년당 창설]
상하이에서 서병호, 조동호 등과 함께 비밀리에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당수를 맡았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파리 강화 회의 소식을 접하고, 한민족 독립운동의 절호의 기회라 판단했다.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고, 장덕수와 이광수를 국내 및 일본에 파견하여 독립 운동의 불씨를 지폈다.
직접 중국 길림성 및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하여 무오독립선언과 대한국민의회 탄생에 영향을 주며 3.1 운동 기획을 주도했다. 신한청년당의 활동은 직간접적으로 3.1 운동의 불씨를 제공했다.
1919
[임시정부 참여, 국호 '대한민국' 반대 논란]
3.1 운동 후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구성을 위한 임시의정원 창설에 동생 여운홍과 함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4월 10일 의정원 회의에서 국호 명칭을 '대한민국'으로 발안하자, "대한이란 말은 조선 왕조 말엽에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며 반대했으나 신석우의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는 주장에 밀려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임시 정부 외무부 차장으로 선출되었다.
[일제의 국빈 대접 거부, 제국호텔에서 조선 독립을 외치다]
임시정부 공직에서 사퇴한 후 개인 자격으로 일본의 초청을 받아 장덕수를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은 그를 국빈으로 대접하며 임정 탈퇴를 조건으로 회유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도쿄 제국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조선 독립의 타당성과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주린 자는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른 자는 마실 것을 찾는 것은 자기의 생존권을 위한 인간 자연의 원리이다.
이것을 막을 자가 있겠는가!"라는 명연설로 큰 박수 갈채를 받았다.
이 연설로 하라 내각은 '여운형 국회' 또는 '여운형 내각'이라 불리며 압력에 밀려 붕괴했다. 독립신문은 그의 활약을 '독립운동사에 있어 유래 없는 성과'라고 대서특필했다.
1920
[이동휘와 함께 고려공산당 창립]
여운형의 일본행을 반대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가 그의 항일 활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이동휘가 소련에서 상하이로 오자 그와 함께 고려공산당을 창립했다.
1921
[볼셰비키와의 연대, 레닌과의 역사적인 만남]
소련 러시아국 외무위원장 치체린과 카라한의 중국 지원 성명에 감동하여 볼셰비키 당에 참여하고 임시정부와 볼셰비키 당의 제휴 필요성을 주장했다.
김규식 등과 함께 러시아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근로자대회'에 조선민족 대표로 참석하여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 조선 독립을 역설했으며, 레닌의 민족주의 운동 지지 노선에 공감하며 볼셰비키와 연대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레닌은 "한국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을 추진할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 운동에 주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1923
[임시정부 파벌 다툼에 실망하여 떠나다]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가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었을 때 안창호의 개조파 세력으로 활동했으나, 파벌 다툼에 실망하여 임시정부를 떠났다.
1924
[중국 혁명에 동참하다]
쑨원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하는 한편, 제1차 국공합작에도 참여하여 중국공산당을 돕는 등 중국 혁명 운동과 반제국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25
[5.30 사건, 중국 혁명 참여의 계기]
영국 경찰의 중국인 학살 '5.30 사건' 이후 중국 혁명에 본격적으로 참가하여 사오리쯔(중국국민당)와 취추바이(중국공산당) 등과 운동 방향을 논의했다.
1926
1929
[상하이에서의 극적인 체포와 국내 송환]
동남아시아 순회 후 상하이 대마로 야구장에서 야구 경기 관람 중 영국 경찰의 협력을 받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되었다.
체포 과정에서 심한 몸싸움으로 한쪽 귀 고막이 상해 청력을 잃었다.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조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서울역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 용산역에서 미리 내리게 할 정도였다.
당시 신문사들은 이를 "여운형 사건"이라 보도했다.
1930
[독립운동으로 인한 투옥]
일제 법원에 의해 징역 3년형이 최종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옥중 생활 중 신경통과 치질로 고생했으며, 몸무게가 80kg대에서 60kg대로 줄고 머리카락이 희어졌다고 한다.
1932
1933
[언론 독립을 꿈꾸다, 조선중앙일보 사장 취임]
동생 여운홍 등 지인들의 도움으로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했다.
망하기 직전이던 조선중앙일보를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겨루는 3대 일간지로 성장시켰으며, 사옥 증축과 윤전기 증설, 월간 잡지 '중앙' 창간 등 적극적인 경영을 펼쳤다.
조선중앙일보는 '일제의 조선인 탄압 정책'을 비판하는 민주사회주의 성향의 중도적 논조를 유지했다. 당시 '조선일보 광산왕 방응모는 자가용으로 납시고, 동아일보 송진우는 인력거로 꺼떡꺼떡, 조선중앙일보 여운형은 걸어서 뚜벅뚜벅'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로 검소했다.
1934
[충무공 이순신 묘소 정비에 나서다]
충청남도 아산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의 황폐해진 묘소를 처음 찾아가 보고, 이후 이를 정돈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1935
['조선 스포츠의 아버지'로 불리다]
당대 독립운동가들 중 체육계에 큰 관심을 보여 조선체육회 회장을 역임했다.
"청년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스포츠가 중요하다"고 보고 각종 구기 종목 대회를 적극 장려했다.
덴마크식 체조를 국내에 처음으로 보급했으며, 투포환 던지기, 수영 등 다방면의 운동경기에 능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출전을 망설인 손기정 선수에게 "일장기를 달고가지만, 등에 한반도를 짊어지고 달린다는 것을 잊지 말라"며 출전을 적극 권유했다.
1936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의 숨은 조력자]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하자, 조선중앙일보에 손기정의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실어 보도했다.
중앙일보의 인쇄기 품질 덕분에 총독부 검열을 통과할 수 있었으나, 동아일보가 이를 따라했다가 발각되어 두 신문 모두 정간되었다.
이 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는 자진 휴간된 뒤 한동안 복간되지 않았다.
1937
[일본 고위 관료 동태 파악 및 유학생 격려]
조선중앙일보 폐간 후 일본으로 떠나 도쿄를 수시로 오갔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이후 일본의 독립운동 탄압이 강화되자 일본 고위급 관료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함이었다.
일본 유학 중인 조선인 유학생들을 만나 조국 독립의 필연성을 역설하며 자금을 대주기도 했다.
1942
[일제 패망 예측, 해방 후 대비를 시작하다]
일본 정부의 대중국 화해 공작 요청을 거절하고, 오히려 일본의 패망을 확신했다.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이정구에게 해방 시 식량 조사 및 대책 수립을, 장권에게는 혼란 방지를 위한 치안대 조직 계획 수립을 지시하는 등 구체적인 독립 준비에 들어갔다.
[일제에 의한 투옥과 가혹한 고문]
일본에 체류 중 고이소 쿠니아키 총독과의 회견을 마치고 귀국하던 중 시모노세키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경성 헌병대로 연행, 수감되었다.
죄목은 치안유지법 위반, 육해군형법 위반, 조선임시보안법 위반, 소련의 밀정 혐의 등이었다.
옥중에서 수차례 고문에 시달렸으며, 특히 90여 시간 동안 의자에 묶여 잠을 못 자게 하는 고문을 당했다.
일제의 사상 전향 요구와 신사 참배, 학도병 강연회 앞장을 거부하며 굴하지 않았다.
1943
[강제 전향, 지울 수 없는 오점]
옥고 끝에 석방되었으나 극심한 신경 쇠약에 시달려 경성 요양원에 입원했다.
요양 중 일제 검사와 판사의 협박을 받아 전향서를 쓸 것을 강요받았다.
본인은 거절했으나, 건강을 염려하는 가족들이 그의 묵인 하에 대신 전향문에 날인하게 되었다.
이 강제 전향문은 해방 후 수많은 정적들로부터 비판의 명분을 제공하며 그의 명예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
석방 직후에도 일제의 가택 연금과 감시를 받았으며, 일본 고위 정치인들의 협력 요구를 받았다. 이를 피해 경기도 양주군 봉안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1944
[해방을 준비하다, 건국동맹 비밀리에 창설]
경성부 종로구 운니동에서 민족주의자부터 공산주의자까지 좌우익 세력을 망라한 비밀 지하 독립운동 단체 '건국동맹'을 결성하고 당수로 활동했다.
이는 일제 말기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활동한 지하 독립운동 조직이자 군사 조직으로,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
1944년 10월 인근 용문산에서 청년들과 비밀결사단체인 '농민동맹'을 결성하여 일제의 강제 징병을 피한 청년들을 보호하고 농민 피해를 막으려 노력했다. 1945년 3월에는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일본군 후방 교란 및 노농군 편성을 계획했으며, 경기도 주안 조병창의 채병덕 중좌와 접촉하여 유사시 무기 공급 약속을 받았다.
1945
[혼란 수습을 위한 총독부와의 교섭]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니시히로 다다오로부터 일본의 패전 소식과 다음 날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 관저 방문 요청을 받았다.
엔도 정무총감과 교섭하여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안전한 철수를 조건으로 정치범 석방, 식량 확보, 조선의 치안 주체적 담당, 총독부의 건설 공사 방해 금지, 학생·청년 활동 방해 금지 등 5개항을 제시하고 수락받아 행정권과 치안유지권을 인수했다.
이 교섭에 대해 송진우는 임정봉대론을 주장하며 비협력적 태도를 보였다. 총독부와의 교섭은 후에 친일 논란의 빌미가 되었지만, 그는 무고한 조선인 학살과 해방 직후 혼란을 막기 위함이었다고 평가된다.
[해방의 주역, 건국준비위원회 발족과 감격적인 연설]
전날 결성한 건국동맹을 모체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밤에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정치범 조봉암의 출소 소식을 듣고 직접 마중 나갔다.
시민들의 요청으로 휘문중학 운동장에서 연설하며 "조선민족의 해방의 날이 왔습니다.
지난날의 아프고 쓰라린 것을 다 잊고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자.
개인 영웅주의를 없애고 단결하자"고 역설했다.
연설 도중 '소련군이 서울역에 온다'는 소문이 퍼져 중단되기도 했다. 건준은 민중의 지지를 받아 각 지역에 100여 개의 지부를 확대, 개편하며 '인민위원회'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건준의 변모, 조선인민공화국 출범]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열고 박헌영의 주도로 건준을 조선인민공화국(인공)으로 변모시켰다.
인공 수립에 합의한 뒤 부주석에 선출되었고, "조선인민공화국이라면 적색으로 아는 사람은 소학교 1학년과 같은 사람"이라며 색깔론을 경계했다.
그는 소련군이 서울에 진주할 것으로 예상하고 건준에 사회주의 계열의 참여를 독려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인공을 불인정하고, 송진우 등이 "일본과 협력한 한인 집단"이라 왜곡 주장하며 인공은 좌절되었다.
[미군정 사령관과의 첫 만남, 오해와 불신]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와의 첫 대면에서 하지는 "왜놈과 무슨 관련이 있지?", "왜놈으로부터 얼마나 돈을 받았지?" 등의 질문을 던지며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미군정 고문으로 위촉된 한국민주당원들의 모함 때문이었다.
[이승만의 귀국과 갈라지는 통일의 길]
미군정 주관 하에 대대적인 환영 행사 속에 이승만이 귀국하자, 그를 찾아가 인공 주석에 취임할 것을 요청했으나 이승만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한국민주당과 독자적인 행보를 걸었다.
[임시정부 환국, 그러나 법통론에 반대]
중경 임시정부 요인들을 맞아주었으나, 충칭 임시정부만을 추대하자는 '임정 정통론'에는 반대했다.
그는 임시정부가 해외에 30년간 머물며 인민적 토대를 갖지 못했고, 해외 여러 곳에 독립운동 세력이 있었음을 주장하며 국내외 세력의 합작을 강조했다.
임정 요인 김원봉, 장건상, 김성숙 등이 그를 찾아와 그의 호쾌한 성격과 달변에 매료되어 좌파 진영으로 영입되었다.
[민족통일전선을 향한 조선인민당 창설]
건국동맹을 모체로 몇 개의 군소단체가 합류하여 서울 천도교 중앙 대교당에서 조선인민당을 창당하고 당수가 되었다.
그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오늘날 민주주의 조선을 건설함에 있어 구태여 빛깔을 문제삼을 필요가 어디 있느냐.
모두가 합력하여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면 그만이 아니겠느냐"고 연설하며 좌우 합작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인민당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광범위한 대중과 정치 세력 속에서 독립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많이 참여했고, 박헌영계의 프락치들이 분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오보가 불러온 '좌우 분열'의 시작]
동아일보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조선의 신탁 통치가 결정되었다'는 오보가 게재되자 반탁 시위가 격렬히 벌어졌다.
이 오보로 인해 김구와 이승만은 반탁 운동을, 박헌영은 찬탁을 주장하며 극심한 좌우 대립이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미군정기 조선의 좌우 갈등의 근본 원인이 되었고, 여운형은 즉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상황 파악에 주력했다.
1946
[좌우 합작의 시도, 그러나 하루 만에 좌절]
조선인민당을 중심으로 한국민주당, 조선국민당, 조선공산당 지도자와 임정 세력들을 만나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이 조선의 자주 독립을 보장한다'는 합의를 이끌어냈으나, 이 약속은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그는 "지도층이 총퇴각할 때다.
우리 같은 지도층이 없었던들 통일은 벌써 성공했을 것이다.
조선 지도자들은 제1차 시험에서 전부 낙제다"라며 통탄했다.
이 합의가 성공했다면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지 않았을 것이고 남북 분단도 피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38선을 넘나들며 통일을 모색하다]
농부로 변장하고 38선을 넘어 북한을 방문하여 2월 11일까지 북한 인사들과 조만식 석방 안건에 관해 협의했다.
조만식은 이북 동포들의 고통을 이유로 월남을 거부했다.
[이승만 독단에 맞서 민주의원 불참]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에 선출되었으나, 이승만의 독단적 행보에 반대하여 민주의원 의원직을 거부했다.
[민족주의민족전선, 또 다른 통합의 시도]
서울 종로 YMCA에서 열린 민족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식에 참여하여 허헌, 박헌영, 백남운, 김원봉과 함께 5인 공동의장에 추대되었다.
미군정은 이를 "여운형이 공산주의자라는 최초의 확증"이라고 주장했으나, 여운형은 '극소수 반동을 제외하고는 손을 잡아야 한다'는 좌우 합작 입장을 견지했다.
[통일 임시정부 수립의 실패, 제1차 미소공위 결렬]
제1차 미국-소련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소련은 모스크바 3상회의 협정 지지 세력만 참여를, 미국은 모든 정치 세력의 참여를 주장하며 입장이 엇갈려 실패로 결렬되었다.
그는 "좌우협력에서만 자주국가 건설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승만 '정읍 발언'에 단호히 반대]
이승만이 삼남지방 유세 중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정읍 발언을 하자, 김규식, 안재홍 등과 함께 단독 정부 수립에 결연히 반대했다.
그는 "결코 반대다.
그 결과는 민족 분열로 오고, 10년이 지나도 고칠 수 없는 분열의 원인이 된다"며 통일의 길을 강조했다.
[민족 통일의 염원, 좌우합작운동 추진]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 주장에 맞서 김규식, 안재홍 등 중도파 인사들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좌측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 운동은 사상, 이념을 넘어 좌우익이 단결하고 남북 연합으로 이어져 통일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목표였다.
미 국무부와 미군정의 지원을 받았지만,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토지 무상 몰수 등 사실상 합작 원칙을 전면 거부하는 5원칙을 발표하며 방해했다.
[박헌영과의 갈등, 당수직 사임]
조선인민당 내 조선공산당 프락치들의 주도로 공산당으로의 흡수 통합이 결의되자 당수직에서 사임했다.
미군정청에 박헌영 제거를 요청하기도 했으며, 박헌영 또한 김일성에게 여운형을 비판하는 서신을 보냈다.
[좌우 합작의 절정, 7원칙 합의와 테러]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좌익 5원칙과 우익 8원칙을 절충한 '좌우합작 7원칙'이 합의되었다.
그러나 다음 날인 10일 아침, 김규식 자택으로 향하던 중 극좌 세력에 의해 정치 테러를 당해 납치되면서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7원칙은 민주독립 보장, 미소공위 속개 요청, 토지개혁 및 주요 산업 국유화, 친일파 처리 조례 제정, 정치 운동자 석방 및 테러 중지 노력, 입법 기구 권능 확립, 언론·집회·출판·교통·투표 자유 보장 등을 골자로 했다.
[남로당과 결별, 정계 은퇴 선언]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이 통합하여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되자 초대 위원장에 선출되었으나, 부위원장 박헌영과의 당내 주도권 갈등과 좌우합작 운동 추진을 위해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불참 선언과 함께 남로당을 탈당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김일성과의 만남, 북한 토지 개혁 만류]
1947년 1월 8일 사이에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나 좌익 진영 단결, 자신의 정계 복귀, 좌우합작 운동, 미소공위 재개 운동 등을 논의했다.
김일성에게 38선 이북만의 토지 개혁이 분단의 길임을 지적하며 만류했다.
1947
[끊이지 않는 위협, 자택 폭파 테러]
서울 계동 자택의 침실이 폭파되는 테러를 당했다.
외출 중이어서 무사했으나, 이로 인해 극우 및 극좌 세력으로부터 계속 정치 테러의 표적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군정 경찰은 그에게 서울을 떠나라고 충고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5번째 테러를 당했을 때 "나는 죽어도 이 길을 가겠다", "혁명가는 침상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는 거리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둘째 딸 여연구와 셋째 딸 여원구를 북한으로 보냈다.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근로인민당 창설]
미소공위 재개 조짐을 보이자, 4월 26일 준비위원회를 열고 5월 24일과 25일에 근로인민당 창당 대회를 개최하여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남로당은 미군정청과 투쟁하는 정당이지만, 나는 미군정청과 협력하는 당을 만들었다"며 남로당과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소련군정 문서에 따르면 근로인민당은 김일성과 논의하여 좌익을 통합하기 위해 만든 정당이며, 여운형은 미국에 화전양면전술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권총 저격,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오다]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승용차에 권총 피습을 당했다.
범인은 체포되었으나 처리 결과는 미상이다.
[마지막 희망, 제2차 미소공위 재개]
제2차 미소공위가 재개되면서 통일 임시정부 수립의 가능성이 열렸다.
좌우 합작 위원회는 '합작 7원칙'에 명시된 바와 같이 "최속 기간 내에 통일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을 성취하자"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미소공위 참가를 결정했다.
미군정은 잦은 테러를 당해온 여운형에게 미군 헌병 경호원을 붙여주겠다고 제안했으나, 그는 "대중과 함께 살아온 내가 어찌 대중으로부터 스스로 격리되겠는가?"라며 거절했다.
[비극적인 종말,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되다]
IOC 가입 축하 기념 친선 축구 경기 참관 후 집으로 향하던 중, 오후 1시 서울 혜화동 로터리 근방에서 트럭 1대가 갑자기 들이닥쳐 차량을 가로막고 한지근(본명 이필형)의 저격으로 복부와 심장에 총탄을 맞고 병원으로 호송 중 절명했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조국..." 그리고 "조선..."이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으로 좌우합작위원회는 구심점을 잃고 제2차 미소공위는 결렬되어 한반도는 남한 내 단독 정부 수립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의 암살은 해방 정국 최다 정치 테러 기록을 세웠다.
[60만 애도 인파, 서울을 뒤덮은 흰 물결]
그의 영결식은 인민장으로 치러졌으며, 약 60만 명의 추모 인파가 몰려 광복 이후 최다 인파 기록을 세웠다.
민중들은 슬픔에 동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흰 옷을 입어 서울 시내가 하얗게 뒤덮였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역도 선수 김성집 등 체육인들이 그의 관을 운구했다.
그의 시신은 포르말린으로 방부 처리되어 쇠 관에 안치되었는데, 통일이 되는 날 다시 장사를 지내기 위함이었다. 미 군정장관 하지가 육각수은관을 특별 주문해 가져왔다고 한다. 묘소는 서울 강북구 우이동에 안치되었다.
1990
2005
[대한민국 정부,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사회주의 운동 이력으로 독립운동 업적을 인정받지 못하다가, 몽양 여운형 선생 추모 사업회 활동을 통해 건국훈장 대통령장(2급)을 추서받았다.
이는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 재조명의 시작으로 평가된다.
2008
[최고 등급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노무현 대통령 정부로부터 최고 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급)을 다시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