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독립운동가, 정치인, 교육자, 통일운동가, 암살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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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는 일제강점기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핵심 지도자입니다. 그는 무장 투쟁과 외교 활동을 통해 조국 광복에 헌신했으며 특히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지휘하며 국제사회에 독립 의지를 각인시켰습니다. 광복 후에는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했으나 1949년 경교장에서 암살되며 비극적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삶은 오직 완전한 자주독립을 향한 뜨거운 염원으로 채워져 있으며 문화국가 건설이라는 위대한 꿈을 품었던 인물로 기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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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

[탄생: 백범 김구,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다]

백범 김구(본명 김창암)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7대 독자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가문은 양반 신분을 숨기고 상민으로 살아왔습니다.

황해도 해주군 해주읍 백운방 텃골에서 김순영과 곽낙원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7대 독자로 알려졌으나 그의 아버지 김순영은 4남 1녀 중 차남이었습니다. 김구의 선조들은 멸문지화를 피하기 위해 양반의 신분을 숨기고 상민으로 행세했습니다. 이는 소년 김구가 과거 시험에 응시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1892

[과거 시험의 좌절: 부정부패에 분노하다]

17세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습니다.

시험 중 매관매직의 타락상을 목격하고 분노하여 벼슬길을 단념하고 3개월간 관상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집안이었음에도 학문에 매진하여 통감, 사략, 병서, 대학, 당시 등을 두루 습득했습니다.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양반이나 부자들이 돈을 주고 대리 시험을 보게 하는 부정행위를 보고 분개하여 과거를 포기했습니다.

1893

[동학 입도: '아기 접주'로 불리다]

포동의 동학 교도 오응선을 찾아 동학에 입도하고 이름을 김창수(본명 창암)로 개명했습니다.

입도 수개월 만에 수백 명의 신도를 거느리며 '아기 접주'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입교한 지 1년도 안 돼 연비(신도)를 수백 명 포덕하였고, 18세의 나이로 팔봉 접주에 임명되었습니다. 해월 최시형의 지시를 받아 황해도 동학을 대표하여 대도주를 찾아가 접주 첩지를 받아왔습니다.

1894

[동학농민운동 참가: 해주성 습격 실패]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해주 팔봉에서 거병하여 동학군을 지휘했습니다.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했으나 관군에게 패퇴하며 부대가 흩어졌습니다.

지도자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했습니다. 그의 부하는 700여 명이었으나 일본 제국의 군부대가 쏘는 총 소리에 놀라 모두 흩어졌습니다. 이후 내부 세력 다툼과 홍역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피신했습니다.

1896

[치하포 사건: 국모의 원수를 갚다]

귀향 중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를 살해했습니다.

그는 쓰치다가 을미사변의 공범이라 판단했으며, 국모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함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인천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치하포구의 여관에서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를 을미사변의 공범으로 단정하고 살해했습니다. 살인 이유로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으며, 자택으로 돌아가 체포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이 사건으로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인천으로 이감되었습니다. 쓰치다의 신분에 대해서는 김구의 저서 '백범일지'와 일본 외무성 자료 사이에 차이가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사형 선고: 고종의 칙명으로 목숨을 건지다]

인천 감리영으로 이감되어 심문을 받았습니다.

일본영사관은 사형을 주장했으나, 고종에게 보고되어 '국모보수'라는 살해 동기가 참작되어 사형 집행이 정지되었습니다.

전화 개통이 늦었더라면 사형을 면치 못했을 것이라 회고했습니다.

1896년 9월 10일 일본영사관 경부신곡청 참석 하에 회동심리가 열렸고, 대명률에 따라 참형이 주장되었습니다. 법부에 조율재처를 건의하였고, 고종의 재가로 사형을 면했습니다. 김구는 감옥에서 <대학>, <세계역사>, <태서신사>, <세계지리>를 읽으며 신학문에도 눈을 뜨고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감옥을 학교로 만들었습니다.

1898

[감옥 탈옥과 승려 생활: 마곡사에서 원종이 되다]

동료 죄수들과 함께 감옥을 탈옥했습니다.

이후 도피 생활 중 공주 마곡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법명 '원종'을 얻었습니다.

탈옥 후 풀밭과 걸식, 민가에 숨어 생활하다가 삼남지방에서 도피하던 중 1898년 가을께 공주 마곡사에 도착하여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의 탈옥으로 부모님이 대신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1899

[환속: 승려의 길을 떠나다]

승려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듬해 봄 금강산으로 공부하러 간다며 마곡사를 떠났습니다.

이후 평양 영천암에서 방장 생활을 하다가 환속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출가 초기부터 불경을 외우는 일과 법당 허드렛일 도중 실수로 스승과 선임 승려들에게 질타를 당하며 산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듬해 마곡사를 떠나 1899년 가을 황해도 해주 본향으로 돌아왔습니다.

1903

[교육 계몽 운동: 봉양학교 설립]

황해도 장연에 봉양학교를 설립하고 교육 활동에 힘을 쏟았습니다.

이후 공립학교 교원이 되었고, 대한제국에서 유일한 관직이었습니다.

강화도에서 훈장일을 한 것을 계기로, 고향인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및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1903년 여름에는 농상공부 종상위원에 임명되었습니다.

[약혼녀 최여옥의 죽음과 기독교 입문]

1902년 약혼했던 최여옥이 병사했습니다.

김구는 홀로된 장모를 위로하고 예수교에 입교시켜 그리스도 신앙에 귀의케 하고 돌아왔습니다.

2월에는 부친상 탈상 후 감리교에 입교했습니다.

1902년 1월 할머니뻘 되는 일가 대부인의 소개로 그의 친정조카뻘인 최여옥(여옥)을 만나 맞선을 보고 약혼하였습니다. 그러나 1903년 1월 약혼녀 여옥이 병사했습니다.

1904

[최준례와의 혼인]

최준례와 혼인하고 장련 읍내로 이사했습니다.

이후 최준례를 경성 경신여학교에 입학시켜 교육의 중요성을 실천했습니다.

1904년 12월 최준례와 결혼했으며, 이후 1924년 최준례가 상하이 홍구 폐병원에서 사망하여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최준례는 남편 김구를 내조하며 임정 활동에 기여했습니다.

1905

[을사조약 반대: 가두연설에 나서다]

진남포 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린 을사조약 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했습니다.

이동녕, 이준 등과 함께 을사조약 철회를 주장하며 대한문 앞에서 읍소하고 종로에서 가두연설을 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을사조약 무효 투쟁을 벌이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정부의 강제 진압으로 저지당하자, 국민들의 지식 부족과 애국심 박약을 통감하며 교육사업 등 계몽활동에 전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907

[신민회 가입: 국권회복의 비밀 조직에 참여하다]

국권회복운동의 국내 최대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황해도지부 총감으로 활동했습니다.

이는 그의 독립운동 이력에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1906년 황해도 문화군 초리면 종산리의 서명의숙에서 교원이 되었으며, 이후 신민회에 참가했습니다. 신민회는 계몽운동과 무장독립운동 준비를 함께 추진하던 단체였습니다.

1910

[안악 사건 연루: 15년형 선고]

양기탁의 집에서 열린 신민회 회의에 황해도지부 대표로 참석했다가 안악 사건에 연루되어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재판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1911년 안악 사건에 연루되어 형문을 받았으며, 서대문형무소에서 김좌진과 조우했습니다. 이 사건은 105인 사건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1914

[이름과 호 개명: 백범의 의미]

일본 호적에서 벗어나고자 이름을 '구(龜)'에서 '구(九)'로 개명하고 호를 '백범'으로 정했습니다.

'백범'은 가장 천한 백정과 보통 사람인 범부가 자신과 같은 애국심을 가져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될 수 있다는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인천 감옥으로 이감되었으며 죄수번호는 55호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호인 백범의 유래에 대해 '독립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은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원(願)을 표한 것'이라고 풀이했습니다.

1915

[특별 가출옥]

수감 중이던 1915년 8월, 특별 가출옥으로 풀려났습니다.

출옥 직전 둘째 딸 화경이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어머니로부터 들었습니다.

가출옥 후 아내가 교원으로 있는 안신학교로 갔습니다. 이후 1916년 문화 궁궁농장 간검에 취임했고, 셋째 딸 은경이 태어났습니다.

1919

[상하이 망명: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경의선 열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단둥에 도착한 뒤, 이륭양행 소속 선박을 타고 상하이에 도착했습니다. 이후 1918년 상하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임시정부 경무국장: 독립운동의 치안 책임자로]

통합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의 천거로 경무국장직에 취임했습니다.

정보 및 감찰, 경찰 업무를 담당하며 일제의 밀정 검거 활동을 펼쳤습니다.

자신의 학식이 낮음을 이유로 사의를 표했으나 안창호의 설득으로 임명을 받아들였습니다. 경호부장으로 여순근을 임명하고 한인 청년들을 고용하여 경찰, 정보감찰, 밀정색출 업무를 분담시켰으며, 재판소 없는 임시정부에서 재판장으로서 재판을 진행했습니다. 일본 영사관의 첩자들을 추방하거나 처형하기도 했습니다.

1922

[임시의정원 재선]

2월 임시의정원 보궐선거에서 재당선되어 의원으로 재선출되었습니다.

임시정부가 창조파와 개조파의 논쟁으로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습니다.

1920년 8월 아내 최준례가 아들 김인을 데리고 상하이로 왔고, 1922년에는 어머니 곽낙원 여사도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피해 상하이로 건너왔습니다. 신익희, 안창호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 조직에 참여했습니다.

[김립 암살: 자금 유용 논란의 그림자]

자금 유용 의혹을 받던 고려공산당원 김립을 상하이 거리에서 사살하도록 오면직, 노종균 등에게 지시했습니다.

백범일지에는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되었으나, 자금 횡령 주장은 정적들의 모함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김립이 소련 레닌에게서 받은 200만 루블 중 40만불을 지불받고 임시정부에 제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살을 지시했습니다. 박노자 교수는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으며, 자금이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에게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라고 분석했습니다.

[내무총장 취임과 김립 암살 지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총장에 취임했으며, 차남 김신이 출생했습니다.

임시정부의 재정난과 갈등 속에서 레닌에게 받은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한 고려공산당원 김립에 대한 사살령을 내렸습니다.

10월 여운형, 조동호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를 조직하고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습니다. 국민대표자대회 소집을 주장한 박은식을 규탄하고 구타하기도 했습니다. 임시정부가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자 내무부령 제1호를 내려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켰습니다.

1923

[국민대표회의 해산: 임정 고수 의지]

임시정부의 해체와 개조를 둘러싼 국민대표자대회의 논쟁이 계속되자, 내무총장 자격으로 국민대표회의 해산령을 내리고 임정을 거부하는 세력에 대한 상하이 추방령을 선언하며 임정 고수 의지를 밝혔습니다.

1923년 4월 9일 내무총장에 재임되고 국무총리 대리에 임명되었습니다. 임정은 개조론과 창조론이 계속 대립했으나, 김구는 임정 고수파로서의 입장을 굳건히 지켰습니다.

1924

[비밀 공작: 친일파 암살 및 군자금 모집]

임시정부 무장 독립운동단체 대한통의부의 오동진 선생에게 만철연선 친일파 토벌 특명을 내려 박희광 등 3인조 암살 특공대를 조직했습니다.

이들은 친일파 최창규 가족 토벌, 정갑주, 배정자, 이용구 암살 시도, 일본영사관 폭파 등을 시도하며 군자금을 탈취했습니다.

박희광, 김광추, 김병현으로 구성된 3인조 암살특공대는 친일파 제거와 군자금 마련을 목표로 활동했습니다. 봉천성 일본영사관 폭파 시도, 금정관 군자금 탈취 등 대담한 작전을 펼쳤고, 이 과정에서 김광추는 순국했습니다. 김구는 이외에도 친일파 척결과 자금 조달을 위한 활동을 비밀리에 지휘했습니다.

1926

[임시정부 국무령 취임: 위기 속 리더십 발휘]

자신의 미천한 출신 배경을 이유로 국무령직을 사양했으나, 이동녕과 임정 요인들의 거듭된 요구로 수락했습니다.

국무령이 된 후 국무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위원제로 제도를 고쳐 초대 주석에 선임되었습니다.

1926년 5월 임시의정원에서 양기탁 후임으로 안창호를 국무령에 선임했으나, 기호파의 반대로 안창호가 사퇴했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김구가 국무령직을 맡아 임시정부의 구심점을 지켰습니다. 1927년 4월 10일 후계 내각 발표로 국무령에서 총사퇴하고 국무위원회의 초대 주석에 선임되었습니다. 이후 이동녕 내각이 구성되면서 임시정부 내무부장에 임명되었습니다.

1930

[한국독립당 창당]

상하이 불조계에서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당무이사에 선출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의 이탈과 변절 속에서도 임정의 법통을 수호했습니다.

임시정부가 자금난에 시달리고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화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김구는 임정의 간판을 지키고 법통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임정 운영 자금을 교민들의 성금과 중국인 기업체 근무 한인, 군자금 탈취 등을 통해 조달했습니다. 1929년 8월 상해 교민단장에 선출되었고, 1930년 다시 국무령에 선출되었습니다.

1931

[한인애국단 결성: 일제 요인 암살을 위한 특수 조직]

일본 정부 및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에 애국 단체인 한인애국단을 결성했습니다.

청년 단원들을 모집하여 항일 무력 활동을 본격화했습니다.

한인애국단 조직 시기는 1928년설도 있습니다. 1931년 말 일본어에 능통한 이봉창이 찾아왔고, 김구는 처음에는 그를 의심했으나 점차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1932

[이봉창 의거: 일왕에게 폭탄을 던지다]

일본어에 능통한 이봉창을 신뢰하여 일본 도쿄에 파견했습니다.

쇼와 천황이 관병식에 참가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천황에게 수류탄을 투척했으나 미수에 그쳤습니다.

이봉창의 일본 천황 암살 시도는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의거 직후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 정부의 지원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윤봉길 의거: 훙커우 공원, 세계를 놀라게 하다]

윤봉길을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 파견하여 천장절 기념식 및 상해사변 전승 축하연에 폭탄을 투척하도록 지휘했습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 일본군 고위 인사들이 즉사하며 세계를 경악시켰고, 중국 정부의 임시정부 지원 계기가 되었습니다.

윤봉길 의거는 장제스 총통이 '중국의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인 한 사람이 해냈다'고 극찬하며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의거 직후 김구는 상하이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미국인 선교사 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more Fitch)의 집에서 숨어 지냈습니다.

[수배와 피신: 장진구로 살다]

상하이 폭탄 의거의 주모자가 자신임이 알려지자 상하이를 탈출했습니다.

이후 가흥, 해염 등으로 피신하며 '장진구(張震球)' 또는 '장진(張震)'이라는 가명으로 숨어 지냈습니다.

가흥에서는 주애보라는 처녀 뱃사공과 위장 결혼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현상금 60만원이 걸렸습니다. 김구는 주애보와의 관계를 회고하며 그녀에게 충분한 여비를 주지 못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김구의 후손들은 주애보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했습니다.

[조선총독 암살 시도: 또 다른 특공 작전]

이봉창 의거 직전 유진식과 이덕주를 조선에 보내 조선총독 우카키 가즈시게 암살을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두 단원이 체포되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4월 24일과 28일 사이에 국내로 파견된 유진식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이후 이덕주도 해주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의 흉폭 행위 자금은 중한민족항일대동맹을 통해 조달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만주 요인 암살 시도: 국제연맹 조사단 앞 폭탄 계획]

한인애국단원 유상근, 최흥식을 만주 다롄으로 파견하여 국제연맹 조사단 방문 시 만철 사장, 일본 관동군 사령관 등에게 폭탄 투척을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비밀 전문이 일본군 정보망에 걸려 체포되며 실패했습니다.

유상근과 최흥식은 각각 수통형과 도시락형 폭탄을 전달받고 다롄으로 향했습니다. 5월 26일 리튼 단장이 이끄는 국제연맹 조사단이 다롄역에 도착할 때 혼조 시게루 일본 관동군 사령관 등을 대상으로 폭탄 투척을 시도했으나, 일본군 정보망에 의해 체포되어 계획은 무산되었습니다.

1933

[장제스와의 회담: 한국 광복군 창설의 초석]

장쑤성 자싱에서 장제스 총통과 면담하여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훈련반 설치에 합의했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인 92명이 입교하여 군사 훈련을 받게 되며, 훗날 한국 광복군 창설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임시정부를 자싱으로 옮긴 후 박찬익을 통해 장제스와의 면담을 추진했습니다. 1934년 2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도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게 하였고, 12월 난징에서 한국특무대독립군을 조직했습니다. 이는 해체된 한인애국단의 후신이 됩니다.

[옥관빈 암살: 변절자 처단 논란]

임시정부를 이탈해 독립운동가들을 비난, 조소하던 옥관빈 암살에 정화암, 안공근과 함께 지원했습니다.

옥관빈은 상하이에서 유명 인사였으며,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옥관빈은 인성학교에 돈을 주고 언론을 이용하여 자신을 선전하고 독립운동가를 비방했습니다. 김구는 독립운동가들을 멸시하는 그의 언동에 분노하여 즉석에서 암살을 제의했고, 남화한인동맹원 엄형순 등에 의해 옥관빈은 사살되었습니다.

1935

[한국국민당 창당: 임시정부의 여당]

이동녕, 이시영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옹호하기 위해 임시정부의 여당격인 한국국민당을 창당하고 이사장에 추대되었습니다.

이는 유명무실해진 임시정부의 해산 주장에 반대하며 임정의 유지를 천명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1935년 5월 임시정부 해산론이 나오자 이를 부당하다고 지적한 경고문을 발표했습니다. 7월 조소앙 등은 임시정부 해체와 단일신당 결성을 주장하며 한국독립당의 해체를 선언했지만, 김구는 임정 고수 입장을 유지했습니다.

1938

[창사 피격: 생사의 고비를 넘다]

후난성 창사 남목청에서 민족주의 진영 3당 통합 문제를 논의하던 중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한의 총격을 받았습니다.

심장 옆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으나, 타고난 체력으로 기적적으로 회복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현익철은 즉사했습니다.

의사들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할 만큼 중상이었으나 4시간 이상 방치된 후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습니다. 이후 가슴에 남은 총알로 인해 움직임에 불편을 느꼈으며, 그의 글씨체는 '총알체'로 불릴 만큼 떨렸습니다. 김구는 이운한의 공범으로 강창제, 박창세를 지목했습니다.

1939

[어머니 곽낙원 여사 별세]

인후증과 폐렴 등의 합병증으로 82세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사망했습니다.

평생 아들의 독립운동을 정신적으로 후원했던 어머니는 유해를 반드시 고국으로 데려가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김구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노가산 공동묘지에 매장했다가 광복 후 서울로 운구, 이장했습니다. 곽낙원 여사는 아들이 체포된 뒤에도 신뢰를 보냈고, 권총을 구입해줄 정도로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안공근 피살: 미궁에 빠진 최측근의 죽음]

한때 김구의 최측근이었던 안공근이 상하이에서 의문의 실종 후 피살되었습니다.

안공근은 김구의 질책을 받고 임정 이동 대열에서 이탈했으며, 임정 자금 유용 의혹도 받았습니다.

김구의 측근에 의한 암살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안공근은 형수(안중근의 처)를 난징에서 모셔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김구에게 질책받았고, 임정 자금 중 일부를 개인적으로 사용한 일도 있었습니다. 김구는 그에게 부여된 임시정부 및 한인애국단의 대외 연락업무를 박찬익에게 맡겼습니다. 안공근은 상하이 부두에서 사라진 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이 독립운동가 후손들 사이에서 널리 언급되고 있습니다.

1940

[임시정부 주석 취임: 독립운동의 최고 수장으로]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의 별세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 주석에 선출되었습니다.

이후 구미외교위원부를 다시 승인하고 이승만을 구미외교위원장으로 임명했습니다.

1939년 말 충칭에서 각 단체의 통일을 추진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이승만은 김원봉, 김규식 등 공산주의자들과의 단합을 반대했고, 민족혁명당은 기존 조직 해체를 원치 않아 대동단합이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한국 광복군 창설: 임시정부 최초의 정식 군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자금 지원을 요청하여 임시정부 최초의 정식 군대인 대한민국 광복군을 조직했습니다.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한국 광복군 성립전례식을 개최했습니다.

중화민국 주석 장제스는 광복군의 통수권을 인정하지 않아 한국 광복군은 중화민국군의 예하대로서 통수권이 예속되었습니다. 김구는 미국에서의 활동을 모색하며 여행증서 발급을 요구했으나, 중국 정부의 충고로 활동 계획서를 제출하고 미국행을 단념했습니다.

1941

[대일 선전포고: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다]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 공표하는 한편, 일본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임시정부가 국제적으로 독립 국가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1941년 6월 임시정부 주석 자격으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서신을 발송했습니다. 10월에는 임시정부 승인 문제로 중화민국 외교총장과 회동했습니다. 1940년 민족혁명당 인사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이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1942년 5월 김원봉을 군무부장에 임명했습니다.

1944

[임시정부 주석 재선]

임시정부에서 제5차 개헌을 단행하여 주석의 권한을 강화하자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출되어 취임했습니다.

당권, 정권, 군권을 모두 장악하며 삼위일체의 지도체제를 확립했습니다.

1943년 7월 장개석 총통과 회담하여 전후 한국 독립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8월에는 민혁당과의 갈등으로 주석직 사임을 발표했다가 9월 다시 복직했습니다. 8월 한국 광복군 통수권을 되돌려 받아 통수부 주석에 취임하며 광복군을 이끌었습니다.

1945

[장남 김인 사망]

장남 김인(김립언)이 폐질환으로 중국 쓰촨성에서 병사했습니다.

광복을 불과 몇 달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1945년 4월 광복군의 OSS 훈련을 승인하고 미 육군 중국전구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을 방문했습니다. 광복 직전 미군 특수사령부(OSS)와 합동 훈련으로 조선에 잠수함으로 광복군을 침투시킬 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광복: 외세의 힘으로 얻은 해방에 통탄하다]

일본의 항복으로 광복 소식을 접했습니다.

외국의 힘으로 해방된 것을 통탄하며 자주 독립 정부 수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다졌습니다.

산시성 주석 축소주로부터 광복 소식을 접하고 '나는 왜적을 물리치고 내 손으로 조국을 해방시키려 하였는데 미국의 원폭으로 해방이 되다니...'라고 말하며 비통해했습니다. 8월 18일 중경 임시정부로 귀환했습니다.

[귀국: '한국의 정부도 돌아온다']

미군 수송기 편으로 김포 비행장에 착륙하며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습니다.

그는 '내가 귀국할 때 한국의 정부도 돌아오는 것이다'라고 선언하며 임시정부의 법통을 강조했습니다.

지주 최창학이 기증한 경교장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김구는 임시정부 자격으로 귀국을 원했으나 미군정은 정부 자격의 귀국을 반대하고 개인 자격 환국을 주장했습니다. 장제스 총통은 귀국 전 미화 20만 달러를 김구에게 전달하려 했으나, 미군정이 반입을 허용하지 않아 국내로 들여오지 못했습니다. 귀국 직후 조선일보 복간 축하 휘호를 작성했고, 이승만과 회담을 가졌습니다.

[송진우 피살: 반탁 운동의 비극적 서막]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이승만과 함께 강력한 신탁통치 반대를 결의했습니다.

송진우가 '침착하고 신중하게 대처하자'며 다른 의견을 제시하자, 그의 추종자들이 송진우를 자택에서 저격, 사살했습니다.

김구는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습니다.

12월 29일 경교장에서 열린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대회에서 김구는 눈물을 흘리며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자를 매국노라고 규정했습니다. 송진우는 미군정을 적으로 돌리면 공산당이 이득을 얻을 것을 우려하며 신중한 대처를 주장했습니다. 면담 두 시간 후 송진우는 암살당했으며, 암살범 한현우는 송진우의 미국 후견 지지를 동기로 밝혔습니다. 조병옥 역시 김구를 암살 배후로 지목하기도 했습니다.

1946

[미소공위 반대: '죽이겠다'는 하지의 경고에 맞서다]

미소공동위원회 결정에 반대하며 공위 불참을 선언했습니다.

하지 미군정 사령관에게 반탁 성명서를 보냈고, 파업을 선언한 군정청 한국인 직원들에게 복귀를 촉구했습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자 신탁통치반대위원회는 반탁 시위를 주관했습니다. 김구는 1월 1일 하지 중장에게 호출되어 명령을 거역하면 죽이겠다는 경고를 들었지만, 김구는 오히려 '이 자리에서 죽겠다'고 맞섰습니다. 1월 2일 조선공산당이 갑자기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서자 김구는 '반민족적 집단이고 신 사대주의자'라며 맹비난을 퍼부었습니다.

[평양 3.1절 폭탄 투척: 김일성 암살 시도 논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치공작대와 염동진의 백의사가 평양역 앞에서 열린 '3.1 운동 27주년 기념식'에서 김일성에 대한 폭탄을 던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김일성은 무사했으나, 소련군 소위가 중상을 입고 강양욱의 가족이 사망하며 북한 측의 격렬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북한은 이를 김구의 지시에 따른 테러로 규정했습니다.

청년단원 중 한 명이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 명의의 무임승차권을 분실하여 북한 측에 입수되면서 임시정부의 연관성이 드러났습니다. 북한은 이 사건 이후 김구와 이승만을 '봉건 잔재세력과 외국 파쇼 세력, 친일파의 삼위일체'이자 '이완용을 배운 조선의 매국노'로 규정하며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당시 북한 출판물에서는 김구를 '개 구자', '김구(金狗)'로 매도하기도 했습니다.

[삼의사 유골 봉환: 독립 영웅들의 귀환]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세 의사의 유골을 일본에서 찾아 서울역에 영접하고 태고사에서 빈소를 마련했습니다.

이후 효창공원에 국민장으로 안장하며 이들의 독립 정신을 기렸습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반탁운동은 더욱 고조되었고, 이승만과 김구는 공동 보조를 취하며 반탁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46년 5월 경제보국회로부터 정치자금을 제공받기도 했습니다. 김구는 이승만의 '단독 정부론' 연설에 대해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승만 박사께 복종하기를 맹세합시다'라고 외치며 지지를 표했습니다.

1947

[건국실천원양성소 설립: 미래의 지도자를 키우다]

국가 건설을 위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서울 용산구 원효사에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했습니다.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기초로 전국 각지의 애국 청년들을 선발하여 교육하며 건국 운동의 중견 일꾼으로 양성하고자 했습니다.

명예소장에 이승만, 소장에 김구, 이사장에는 장형이 취임했습니다. 독립운동사, 정치, 경제, 법률, 헌법 등 다양한 교육과정을 운영했으며, 조소앙, 신익희, 지청천 등 각계의 인사들이 강사로 참여했습니다. 김구가 암살된 후인 1949년 8월 23일 해체되었고, 건물은 홍익대학교에 인수되었습니다.

[장덕수 피살: 다시 불거진 암살 배후 의혹]

자택에서 피살된 장덕수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당국의 조사를 받았습니다.

암살범들은 한국독립당 당원이었으며, 장덕수가 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을 반대하고 미소공위 참여를 주장한 것이 동기였다고 진술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과의 관계가 멀어졌습니다.

현직 경찰 박광옥과 초등학교 교사 배희범 등 5명이 장덕수를 암살했습니다. 이들은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대한학생총연맹 간부 또는 맹원들이었습니다. 장택상 당시 수도경찰청장은 김구를 체포하려 했으나, 하지 중장의 저지로 무산되었습니다. 법정에서 피고인들은 고문과 강압에 의한 진술이라 주장했으나, 미군 군사법원은 김구에게 소환장을 발부했습니다. 이 사건은 김구와 한민당, 그리고 이승만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켰습니다.

1948

[남북 협상: 분단 위기를 막기 위한 마지막 노력]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김규식 등과 함께 평양으로 향했습니다.

경교장 앞에서 만류하는 청년들을 피해 담을 넘어 출발하며 통일을 향한 강력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남북 협상에 참여하기 전, 이승만은 김구에게 '돌이키지 못할 오판을 하고 있다'며 우려를 표했습니다. 북한의 조선공산당과 한민당 양측 모두로부터 비난을 받으면서도 김구는 통일 정부 수립의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남북 통일 정부가 수립되면 자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고 알려졌습니다.

[4김 회동: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담판]

평양의 김두봉 집에서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4김 회동'에 참석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남한 단선·단정 반대와 북한의 단독 정부 건설 중단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 회동에서 김일성 만세를 부르지 않는 등 북한 공산주의에 비판적 입장을 유지했습니다.

연석회의는 철저히 소련 군정청의 각본대로 진행되었고, 김구는 4월 22일 회의에 형식적인 인사말만 하고 본질적인 논의에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북행 후 김구는 김일성에게 조만식을 데리고 내려가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김일성은 자신에게 권한이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남북협상 실패 후, 김구는 김일성에게 이용당한 것을 알고 침울하게 보냈으며, 2차 회의 제의는 거절했습니다.

[어머니와 장남 유해 봉환: 약속을 지키다]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시신을 중국에서 운구하여 서울 정릉에 안장했습니다.

이어서 차남 김신을 시켜 상하이와 충칭에 있는 부인 최준례, 맏아들 김인의 시신을 발굴하여 천장식을 기독교회 연합장으로 거행하고 정릉 가족묘지에 안장했습니다.

어머니 곽 여사의 유골을 정릉 뒷산에 안장할 때 기수들이 기마의 장대 역할을 맡아 운구차를 호송해주었습니다. 김구는 이후 주말이면 거의 빠지지 않고 경마장을 찾기도 했는데, 이는 운구를 호송해 준 기수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여순 사건 논란: '극우 정객' 지목에 반박하다]

여수·순천 반란 사건 당시 이범석 국무총리가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몰락한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 벌인 정치적 음모'라며 사실상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습니다.

김구는 이에 분개하며 '극우분자가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고 반박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범석은 언론 인터뷰에서 여순 사건을 '공산주의자가 극우 정객들과 결탁해 일으킨 반국가적 반란'으로 규정했습니다. 김구는 10월 27일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관련 사실을 극구 부인하며, '그들은 극우라는 용어에 관하여 다른 해석을 내리는 자신만의 사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했습니다. 김구는 여순 사건을 '집단 테러 활동'으로 규정하며 '부녀와 유아까지 참살했다는 보도를 들을 때 그 야만적 소행에 몸서리쳐지지 않을 수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1949

[암살: 경교장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치다]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1가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총격당해 사망했습니다.

안두희는 한국전쟁 이후 사면받아 권력층의 보호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배후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미궁입니다.

사망 직후 천주교 예식으로 세례를 받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습니다.

암살 직전 김구는 암살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제보를 받았으나 '일본인도 살해하지 못했는데 동포가 어떻게 위해를 가하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안두희의 초기 진술에 따르면 김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대를 이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범행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의 죽음은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던 군사 쿠데타 음모가 발각된 결과라는 뉴욕 타임즈의 보도도 있었습니다.

[국민장 거행: 효창공원에 영면하다]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장으로 10일간 장례가 거행되었습니다.

시인 이은상이 조가를 짓고 쇼팽의 장송행진곡이 연주되는 가운데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한국 사회에 큰 슬픔과 논란을 남겼습니다.

장례 방식(국장 vs. 민족장)을 놓고 정부와 한국독립당 측의 마찰이 있었으나, 김규식의 중재로 국가와 민족을 합한 국민장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의 유해는 자신이 순국선열들의 유해봉환을 추진하며 조성했던 용산구 효창동 애국선열묘역에 모셔졌습니다.

1962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최고 훈장으로 기리다]

대한민국 건국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독립운동 공헌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김구가 암살당한 지 정확히 1년 후에 6.25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1960년 고정훈 등에 의해 한민당과 이승만 계열에 의한 암살 의혹이 제기되었고, 백범 김구 시해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어 진상규명 운동이 지속되었습니다. 1963년 서울 남산에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1990

1990.08.15 사후 41년

[조국통일상 추서: 북한에서의 재평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습니다.

이는 김구에 대한 북한의 공식적인 재평가를 의미합니다.

해방 직후 북한에서 김구는 '개 구자'로 불리며 맹비난을 받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북한에서도 그의 통일운동 정신을 기리는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2007

2007.11.05 사후 58년

[10만원권 도안 인물 선정: 화폐 속 위인의 얼굴]

한국은행에 의해 2009년 상반기 발행될 10만원권의 도안 인물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집권 후 이승만과의 논란으로 발행이 전면 취소되었습니다.

김구의 10만원권 도안 인물 선정은 그의 역사적 위상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나, 정치적 논쟁으로 인해 아쉽게 무산되었습니다. 1998년에는 백범기념관이 준공되어 2002년 10월 22일에 건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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