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상가, 사회운동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8- 22:02:00
조선말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이끈 민족 지도자이자 교육자 사상가. 실력양성론과 교육입국론을 주창하며 흥사단 신민회 대성학교 등을 설립해 인재 양성과 민족 역량 강화에 힘썼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활동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탁월한 웅변과 대공주의 사상으로 대중의 존경을 받았다.
- 출생 및 개명
- 구세학당 입학 및 기독교 개종
-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활동 시작
- 점진학교 설립 및 황무지 개간
- 미국 유학길 및 '도산' 호 작명
- 한인친목회 조직 및 교민 지도 시작
- 한인공립협회 창립 및 공립신보 발행
- 을사늑약 반대 운동 주도
- 신민회 창립 및 애국계몽운동
- 대성학교 설립
- 국외 망명
- 흥사단 재건
- 대한민국 임시정부 핵심 역할 시작
- 임정 내분 중재 및 개조론 주장
- 국민대표회의 결렬
- 임시정부 국무령 사퇴
- 대공주의 역설
- 한국독립당 결성 참여
- 윤봉길 의거 연루 체포 및 수감
-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재체포 및 고문
- 서거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 도산공원 이장 및 부인과 합장
- 미국 내 기념물 건립
1878
[출생 및 개명]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도롱섬에서 농부 안흥국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0세 때 '치삼'에서 '창호'로 개명했다.
1894
[구세학당 입학 및 기독교 개종]
청일전쟁으로 인한 평양 파괴를 목격한 후 구국 의지를 다지고 경성으로 상경,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가 운영하는 구세학당 보통부에 입학해 서구 학문을 접하며 개신교에 입교했다.
1897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활동 시작]
구세학당 졸업 후 서재필, 이승만, 윤치호 등이 주관한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만민공동회 활동에 참여했다.
평양 쾌재정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관서지회에서 연사로 참석하여 '청년 웅변가'로 명성을 얻었다.
이후 독립협회 관서지부 책임자가 되었으며, 같은 해 이혜련 여사와 결혼했다.
1899
[점진학교 설립 및 황무지 개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정부 탄압으로 해산된 후, 고향 평안남도 강서군에 '점진학교'를 설립하고 '탄포리교회'를 세웠다.
인근 황무지 개간 사업을 추진하며 교육과 자립 기반 마련에 앞장섰다.
1902
[미국 유학길 및 '도산' 호 작명]
아내 이혜련과 함께 유학을 위해 미국으로 출국했다.
뱃길에서 본 하와이 섬의 웅장한 모습에 감명받아 자신의 호를 '도산(島山)'으로 지었다.
1903
[한인친목회 조직 및 교민 지도 시작]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우스 보이로 일하며 재미 한인 교포들의 단결과 계몽을 위해 '한인친목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피선됐다.
직접 교민들의 집을 방문하여 청소하고 눈을 쓸어주며 신뢰를 쌓았다.
1905
[한인공립협회 창립 및 공립신보 발행]
한인친목회를 발전시켜 '한인공립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자비로 회관을 설립하고, 순국문판 신문 《공립신보》를 발행하여 교민 사회의 정보 소통과 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했다.
[을사늑약 반대 운동 주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긴 을사늑약 체결에 격분하여, 윤치호, 서재필 등과 함께 조약 반대 항의 성명을 발표하며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1907
[신민회 창립 및 애국계몽운동]
미국에서 귀국 후 양기탁, 윤치호, 김구 등 국내 계몽운동의 핵심 인물들을 규합하여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했다.
국민의 실력 양성과 문맹 타파, 교육 및 언론 활동 추진에 앞장섰다.
신민회는 민족자존의식 고취, 투쟁 동지 단결, 국민 역량 축적, 청소년 교육 촉진, 상공업 발전을 목표로 했다. 그의 강연에 여운형, 조만식 등이 감화받아 독립운동에 투신을 결심했다.
1908
[대성학교 설립]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여 정직과 민족정신을 교육했으며, 윤치호를 교장으로 초빙했다.
당시 대성학교의 군사훈련을 방불케 하는 체조 시간은 조선총독부의 이목을 끌었다.
서북학회 창립을 주도하고 태극서관, 마산동 도자기 회사 등에 투자하며 교육과 산업 진흥에 힘썼다.
1910
[국외 망명]
한국 통감부의 내각 조직 제의를 거절하고 장기간의 망명을 예상하며 '거국가(去國歌)'를 남기고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1913
[흥사단 재건]
자신이 세운 청년학우회를 기반으로 유길준의 흥사단을 재건했다.
민족운동 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한 훈련 단체로, 미국에 본부를 두고 3.1운동 후에는 중국과 국내로 활동을 확대했다.
1919
[대한민국 임시정부 핵심 역할 시작]
상하이에서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국무총리 대리로 선출되었다.
이후 여러 임시정부를 통합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그는 자신이 최고 지도자 자리를 맡기보다 여러 영수들을 상해로 모아 최고 지도자를 추대할 것을 제안하며 임시정부 통합에 기여했다. 6월 28일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에 정식 취임했다.
1921
[임정 내분 중재 및 개조론 주장]
임시정부 내 이승만과 이동휘 간의 독립운동 방략 및 이념 대립으로 인한 내분 속에서 적극적으로 중재를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임시정부 개조론을 주장하며 개조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노동국 총판직을 사임하고 여운형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에 참여했다.
1923
[국민대표회의 결렬]
임시정부의 존폐를 논하는 국민대표회의에서 부의장을 맡아 개조론을 주장하며 중재했으나, 창조파와 개조파의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아 결국 회의는 결렬, 해산되었다.
국민대표회의 결렬을 예상하고 대독립당 창당 운동과 독립운동 근거지 겸 자원 조달처, 한국인 이민자 정착촌으로서의 이상촌 건설을 만주에서 추진했으나 일제의 침략으로 무산되었다.
1926
[임시정부 국무령 사퇴]
상하이로 돌아오기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선출되었으나, 임시정부 내 기호파의 극심한 반발로 인해 13일 만인 5월 16일 취임을 사퇴하며 사태를 수습했다.
1927
[대공주의 역설]
상하이에서 이념, 계파, 파벌을 넘어 조국과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공적인 것을 위해 개인적 이익을 희생해야 한다는 '대공주의'를 역설했다.
이는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이념 분열을 극복하려는 시도였다.
길림성에서 '군사행동단체의 통일과 대독립당의 결성'에 대한 민중 연설 중 중국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20여 일 만에 석방되는 일을 겪기도 했다.
1928
[한국독립당 결성 참여]
이동녕, 김구, 이시영 등과 함께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는 데 참여하고, 대공주의를 당 강령에 추가하여 민족의 대동단결을 강조했다.
일제의 압박을 피해 독립운동 거점 마련을 위해 만주 한인들의 필리핀 대규모 이주 및 이상촌 건설을 추진했으나, 일본 여권 및 고액 지참금 조건 등으로 필리핀 당국에 거부당해 좌절되었다.
1932
[윤봉길 의거 연루 체포 및 수감]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직후, 지인의 딸 생일을 축하하러 방문했다가 일본 영사관 경찰과 프랑스 영사관 관헌에 의해 윤봉길 의거 관련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의거와 무관함을 주장했으나, 국내로 압송되어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이 체포로 대독립당 추진 운동은 무산되었다.
1937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재체포 및 고문]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이광수, 주요한 등과 함께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일제의 잔혹한 고문을 당하며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윤치호, 김성수 등이 보석금과 탄원서를 통해 석방 운동을 펼쳤으며, 병세 악화로 12월 보석 출감하여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1938
[서거]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간경화, 소화불량, 폐렴, 만성기관지염 등 합병증으로 향년 61세에 서거했다.
임종 직전까지 민족의 실력 양성과 독립을 강조하며 나라를 걱정했다.
유언에 따라 애제자 유상규의 묘소 근처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일제는 헌병을 보내 장지 출입을 통제하고 상복 착용까지 금지시켰다.
1962
1973
[도산공원 이장 및 부인과 합장]
서울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으로 묘소가 이장되었고, 로스앤젤레스에 안장되어 있던 부인 이혜련 여사의 유해를 옮겨와 함께 합장되며 성역화가 시작되었다.
2000
[미국 내 기념물 건립]
2000년대 이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그의 이름을 딴 인터체인지(2002년)와 우체국(2004년)이 세워지며 국제적으로도 그의 업적이 기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