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왕족, 정치가, 섭정, 개혁가, 화가, 추존왕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9- 04:03:47
조선 후기 격동의 시대를 관통하며 고종의 아버지이자 섭정으로서 강력한 개혁과 쇄국 정책을 추진했던 풍운아. 안동 김씨 세도를 혁파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경복궁 중건과 천주교 탄압 등으로 논란을 빚었다. 며느리 명성황후와의 권력 투쟁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며 근대 전환기 조선의 운명을 좌우한 핵심 인물이다.
- 고종 즉위 및 흥선대원군 섭정 시작
- 흥선대원군, 세도정치 타파 및 왕권 강화 정책 추진
- 흥선대원군, 민자영(명성황후)을 왕비로 간택
- 흥선대원군, 경복궁 중건 사업 시작
- 흥선대원군, 병인박해로 천주교 신자 대량 학살
-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평양에서 불타 침몰
- 프랑스 함대, 병인양요로 강화도 침략
- 오페르트 도굴 사건 발생, 대원군 분노
- 미국 함대, 신미양요로 강화도 공격
- 흥선대원군, 최익현 등의 탄핵으로 실각
- 민승호 일가 폭탄 테러로 사망, 흥선대원군 배후 의혹
- 이재선 추대 음모 사건 발생 및 진압
- 임오군란 발발, 흥선대원군 재집권
- 흥선대원군, 청나라에 납치되어 톈진에 감금
- 흥선대원군, 4년 만에 청나라에서 귀국
- 흥선대원군, 동학 농민군 이용 이준용 추대 음모
- 일본군 경복궁 점령, 흥선대원군 3차 집권
- 흥선대원군, 개화파 암살 지령 내리다
- 흥선대원군, 일본 공사관과 명성황후 제거 각서 서명
- 을미사변 발생, 명성황후 시해되다
- 흥선대원군, 운현궁 아소당에서 사망
1821
[흥선대원군 이하응, 한성부에서 출생]
조선 후기 왕족 이하응이 한성부 안국방 소안동계(현 서울 종로구 안국동) 안동궁에서 태어났다. 그는 인조의 넷째 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 남연군의 넷째 아들이자 훗날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부친이 된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한성부 북부 안국방 소안동계(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안국동) 안동궁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남연군은 인조의 넷째 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 이병원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은신군의 양자로 입양되어 남연군의 작위를 받았다. 어머니 여흥민씨는 인현왕후의 큰아버지인 노봉 민정중의 4대손 민경혁의 딸이었다.
1831
[흥선대원군, 12세에 어머니 여흥군부인 여흥민씨를 여의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12세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 여흥군부인 여흥민씨를 여의며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게 된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8세에 맏형 흥녕군 이창응을 잃고 12세에는 어머니 여흥군부인 여흥민씨를 여의며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는 아버지 남연군으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인척인 인연으로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 들어가 글과 그림을 수학하기도 했다.
1834
[이하응, 흥선부정 봉작 및 자신대부 품계 받다]
이하응이 순조 34년에 흥선부정에 봉작되고 자신대부 품계를 받으며 관직에 임명되었다.
이하응은 1834년(순조 34년) 흥선부정(興宣副正)에 봉작되고 자신대부(資信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1835년 보신대부(保信大夫)로 승진, 1836년에는 동몽교관에 임명되었다.
1836
[이하응, 17세에 아버지 남연군을 여의다]
이하응이 17세에 아버지 남연군을 여의게 된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추사 김정희 문하에서 글과 그림을 수학했다.
이하응이 17세 때 아버지 남연군을 여의었다. 소년 이하응은 삼년상을 마치고 풍수가들이 길지라 일컬은 충청남도 예산군 가야산 중턱의 석탑(石塔) 자리인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1843
1841년(헌종 7년) 창의대부(彰義大夫)로 승진한 뒤 흥선정(興宣正)에 봉작되고, 흥선도정(興宣都正)을 거쳐 1843년(헌종 9년)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효현왕후(孝顯王后)의 국상 때 수릉관(守陵官)으로 참여하여 소의대부(昭義大夫)로 승진한 뒤 다시 중의대부(中義大夫)로 승진하였다.
1847
[이하응, 종친부 유사당상으로 왕실 권한 확대 추진]
이하응은 종친부 유사당상으로 재직하며 선파인에 대한 신역 면제를 관장하고 종친부의 권한 확대를 추진했으며, 왕실 족보 편찬을 종친부에서 간행하도록 추진했다.
1847년 종친부(宗親府)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직책인 유사당상(有司堂上)으로 재직할 때, 선파인(璿派人·전주 이씨 중에서 왕실에서 갈려 나온 파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신역 면제를 관장하는 등 종친부의 권한 확대를 추진하였다. 종친부의 권한확대를 위해 흥선군은 당시의 세도가인 안동 김씨 세력과 정치적 거래를 시도하였다. 종친부 유사당상 재직 중 그는 왕실의 족보 편찬을 종친부에서 간행할 수 있도록 추진하였다.
1862
[도정궁 이하전, 탄핵 후 사사되고 경평군 유배]
철종 말년, 도정궁 이하전이 계속 탄핵당하다 제주도로 위리안치된 뒤 사사되었고, 경평군 이승응도 탐학을 이유로 유배당했다. 종실들은 불안해했고 흥선군은 더욱 몸조심을 했다.
철종 말년, 도정궁 이하전이 계속 탄핵당하다가 제주도에 위리안치된 뒤 사사당하고, 얼마 후 경평군 이승응(景平君 李昇應)도 탐학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 이때 종실들은 죽음에서 면하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했고, 흥선군은 더욱 몸조심을 했다.
1863
[고종 즉위 및 흥선대원군 섭정 시작]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흥선대원군은 조대비와의 밀계로 차남 명복(고종)을 익종의 양자로 삼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자신은 대원군으로서 국정을 총괄하는 실질적인 섭정을 시작했다.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후사 결정권을 가지고 있던 신정왕후 조대비와 밀계(密計)가 있어 자신의 차남인 명복(이재황)을 익종의 양자로 삼아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하고, 익종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시킨 뒤 자신은 대원군(大院君)이 되어 정책 결정권을 부여받았다. 1864년 1월 16일 아들인 고종이 즉위하자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곧 흥선대원군에게 고종을 보필하라며 형식상으로 수렴청정을 행하니 이때부터 흥선대원군이 실질적인 집권하기 시작하였다.
1864
[동학 교조 최제우, 군문 효수형으로 처형]
흥선대원군은 널리 전파되던 동학에 대해 탄압을 가하여 교조 최제우를 처형했다. 이후 동학도들은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널리 전파되던 천도교(동학)에 대해서도 1864년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여 군문 효수하였다. 이후 천도교(동학)도들은 매년 교조의 무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의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으나 그는 이를 모두 거절했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의 일부 지도자들과도 연결을 취하기도 했다.
[흥선대원군, 세도정치 타파 및 왕권 강화 정책 추진]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의 안동 김씨 일문을 축출하고 문벌과 당파를 배제한 인사를 등용했다. 유교의 위민정치를 내세워 전제왕권 재확립 정책을 추진하며 1873년 11월까지 국정을 이끌었다.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 일문을 축출하고 문벌과 사색당파를 배제한 인사등용을 하였으며, 안으로는 유교의 위민정치를 내세워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과단성 있게 추진하였고 밖으로는 개항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의 침략적 자세에 대하여 척왜강경정책으로 대응하였다. 또한 서원을 철폐하고 정리해 양반·기득권 토호들의 민폐와 노론의 일당 독재를 타도하고 남인과 북인을 채용하였으며, 천도교와 로마 가톨릭교회를 탄압, 박해하였다. 그는 1864년 1월부터 1873년 11월까지 조선의 국정을 이끌었다.
[러시아 통상 요구 거절 및 천주교 선교사 접촉]
러시아가 두만강을 통해 통상을 요구하자 흥선대원군은 이를 거절했다. 러시아 남하에 대비해 프랑스 천주교 선교사들과 접촉하여 선교를 인정하는 대신 러시아를 막아줄 것을 논의했다.
1864년 4월 4일(고종 1년 음력 2월 28일)에 러시아에서 사람 몇 명이 두만강 얼음을 타고 함경도로 내려와 통상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내오자 거절하고 관련자들을 처벌하였다. 흥선대원군은 국경을 맞댄 아라사의 남하에 대비하기 위해 불란서 천주교 선교사들과 접촉해 아라사를 막아준다면 천주교 선교를 인정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1865
[흥선대원군, 민자영(명성황후)을 왕비로 간택]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를 경계하여, 아버지도 형제도 없는 민치록의 딸 민자영(명성황후)을 고종의 왕비로 간택했다. 그러나 1868년 완화군 출산 이후 명성황후와 갈등이 시작된다.
1865년 대원군은 왕비 간택을 시도한다. 그 중 민치록의 딸 민자영이 최종간택되었다. 그가 명성 황후를 간택한 배경에 대한 설은 두 가지가 전해진다. 첫째는 대원군이 사람을 보는 눈이 보통이 아닌데 명성 황후의 본성을 깨닫지 못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사실 당시에는 명성 황후가 대원군이 만족해할만 한 아주 얌전한 규수였다는 것이다. 그 밖에 부인 여흥부대부인이 적극 추천했다는 주장도 있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를 두려워한 그는 일부러 아버지도 없고 형제나 혈육이 없는 민자영 규수를 최종 왕비로 낙점했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대원군을 미워하기 시작한 것은 1868년(고종 5년)에 궁인 이씨가 완화군을 낳았을 때부터라고 한다.
[흥선대원군, 경복궁 중건 사업 시작]
흥선대원군은 헌종 때 재정 부족으로 중단되었던 경복궁 중건을 1865년에 시작했다. 그는 이 사업을 위해 원납전을 강제 징수하고 당백전을 발행하는 등 무리한 재정 조달을 감행했다.
흥선대원군은 1865년 경복궁 중건을 하기 시작했다. 경복궁의 중건은 조선 헌종 때 수리할 것을 계획했으나 재정이 모자라 그만두었다. 대원군은 선왕의 뜻을 계승한다는 구실을 내걸고 간언을 듣지 않고 공사를 서둘렀는데, 필요한 기금을 마련하고자 원납전을 강제 징수하였고, 대장군 이경하에게 감독을 맡기고 세금을 인상하였으며 결두세라는 특별 세금을 부과하고 장정들을 징집하여 매일 수만 명을 작업에 동원했다. 또한 춤꾼과 기녀를 모집하여 인부들을 위한 위문공연을 열었다.
1866
[흥선대원군, 병인박해로 천주교 신자 대량 학살]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에 대한 우호 정책을 철회하고 강경 정책으로 전환하여 1866년부터 1872년까지 약 8천여 명 이상의 천주교 신자들과 프랑스 선교사 9명을 처형하는 대규모 병인박해를 단행했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에 대한 정책은 우호정책에서 강경 정책으로 바뀐다. 우선 선교사들은 조선의 정치에 개입하고 싶어하지 않아 이용가치가 없었고, 지배 계급에게 ‘천당과 지옥을 주장하며 혹세무민하는 종교’로 해석되던 로마 가톨릭교회가 이미 1831년 천주교 조선교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생길 정도로 성장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있었으며, 대외적으로 ‘종교를 앞세워 열강 세력이 침투하는’ 문제에 대한 경계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1866년 남종삼 등을 비롯, 8천여 명 가까운 천주교 신자들이 새남터, 절두산, 해미읍성 등 전국 각지에서 처형당했다.(→병인박해) 1866년부터 처형당한 천주교인의 수는 1~2만명을 넘는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에 들어와 포교하던 프랑스인 천주교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화를 면한 프랑스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 리델은 청나라로 탈출하여 베이징 주재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에게 박해 소식을 전했다. 박해는 1872년까지 이어졌다.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평양에서 불타 침몰]
1866년, 통상을 요구하며 횡포를 부리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 대동강에서 군민과 충돌하여 불태워지고 침몰했다. 이 사건은 훗날 신미양요의 빌미가 된다.
병인양요가 발생하기 직전,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평양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통상을 요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재물을 약탈하다가 평양 군민과 충돌을 일으켜서 배가 침몰하여 선원들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경복궁 중건 중 대규모 화재 발생]
경복궁 중건 공사 1년 만에 마감용 목재 창고에서 불이 나 800여 칸의 목재가 소실되었다. 대원군은 공사 책임자인 이경하와 흥인군을 처벌하려 했으나 중신들의 만류로 처벌 대신 복구 책임을 맡겼다.
1866년 3월 화재가 발생, 전각과 재목이 소실되자 흥선대원군은 대노하여 흥인군과 이경하를 투옥, 처형하려고 했으나 중신들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당시 마감용 목재에 기름칠을 하는 창고에서 불이 나 800여 칸에 쌓아 둔 목재가 모두 타버려 공사가 중단될 처지에 놓였다. 공사를 시작한지 1년 만의 일이었다. 흥선대원군은 공사 책임자인 이경하와 흥인군을 불러 면전에서 크게 질책하며 극형에 처하도록 했으나 여러 조정 대신들의 간언으로 원상 복구의 책임만 지게 되었다.
[프랑스 함대, 병인양요로 강화도 침략]
병인박해로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형되자, 프랑스는 로즈 제독이 이끄는 함대 7척과 군사 600명을 파견하여 강화도를 침략했다. 프랑스군은 정족산성 전투에서 조선군에게 패배하고 철군했다.
박해 소식을 전해 들은 프랑스 로즈(Roze)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7척의 함선과 6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강화도를 침략한 뒤 서울 근교 서강까지 진출했다. 그해 11월 프랑스 해군 160명은 정족산성을 공격하려다가 60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손실을 입었는데,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은 피해규모가 사망 1명, 부상 4명에 불과했다. 조선 군대와의 교전에서 큰 패배를 경험한 프랑스군은 사기가 크게 떨어졌으며, 로즈 사령관은 조선 침공의 무모함을 깨닫고 철군했다.
1867
[흥선대원군, 환곡제를 사창제로 개혁하다]
고종 4년, 흥선대원군은 폐단이 많았던 환곡제도를 개혁하고 사창제를 실시하여 국가 재정 확보와 민심 안정을 꾀하는 등 제도 개혁에 힘썼다.
1867년(고종 4년)에는 폐단이 많았던 환곡제도를 개혁하고 사창제를 실시하여 국가 재정 확보와 민심 안정을 꾀했다. 또한 감찰의 목적에서 타락한 도장(導掌)·궁차(宮差) 등의 파견을 금지하고, 신설 궁방에 토지 지급을 폐지하여 궁방전을 억제하였다.
1868
[오페르트 도굴 사건 발생, 대원군 분노]
독일 상인 오페르트 등이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만행은 대원군을 더욱 분노케 하여 천주교 박해와 쇄국정책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 등이 충청도 연안에 와서 각기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오페르트는 그 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여 부장품을 훔쳐가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는 대원군을 더욱 분노케 하여 천주교 박해와 쇄국정책을 강화하는 원인이 되었다.
1869
[흥선대원군, 일본의 메이지 유신 국서 거절]
일본이 메이지 유신과 대정봉환을 알리는 국서를 조선에 보내왔으나, 흥선대원군은 이를 거절하며 쇄국정책을 고수했다.
1869년 일본이 메이지 유신(1868년)과 대정봉환(1867년)를 알리는 국서를 조선에 보내왔으나 이 또한 거절하였다. 이로써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은 지속되었다.
1871
[미국 함대, 신미양요로 강화도 공격]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문책하기 위해 미국이 5척의 군함을 보내 강화도를 공격하는 신미양요가 발생했다. 조선 조정은 통상을 거부하고 항전했으며, 미국 함대는 철수했다.
1868년 3월에 미국 군함 셰년 도어 호는 셔먼호 사건을 문책하러 평양에 나타났다. 미군이 물러가자 대원군은 조선 병사가 미군을 격퇴했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3년 뒤인 1871년 미국은 해당 문책사들을 해임하고 대원군을 굴복시키고 조선 통상을 강요하고자, 5척의 군함을 보내 강화도를 공격하는 신미양요를 일으킨다. 1871년 4월 미국 함대가 강화도에 쳐들어와 덕진진(德津鎭)과 광성보(廣城堡)를 점령하자, 흥선대원군은 항전을 주장하며 한성부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결사항전을 준비했다. 조선 조정에서 통상을 거부하고 외교교섭에 응하지 않고 전투가 장기화되자 미국 함대는 1871년 5월 철수했다.
1873
[흥선대원군, 최익현 등의 탄핵으로 실각]
최익현 등 보수 유학자들을 내세운 명성황후와 고종의 견제로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아들 고종이 친정을 시작했다. 대원군은 운현궁에 은둔하다가 양주군 별장으로 칩거했다.
최익현 등의 보수적 유학자들을 앞세운 명성황후와 고종의 견제로 1873년 11월 실각하고, 아들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다.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이 출입하던 전용문은 폐쇄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은 한동안 운현궁에 은둔하였다가 인왕산, 수락산 등을 방문한 뒤 양주군 시둔면 곧은골 별장으로 칩거했다.
1874
[민승호 일가 폭탄 테러로 사망, 흥선대원군 배후 의혹]
명성황후의 오빠 민승호의 집에 폭발 사건이 발생하여 민승호, 그의 아들, 양어머니 한창부부인 이씨가 사망했다. 대원군이 배후로 지목되었지만 물증은 없었고, 이 사건으로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1874년 봄 경복궁에 화재가 발생해 고종은 창덕궁으로 이주했다. 이때 민승호의 집에도 화재가 발생했다. 이 사건의 배후로 대원군이 지목되었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었다. 그런데 1874년 11월 민승호의 집에 폭발 사건이 벌어졌다. 민승호는 수재(조부모나 부모상을 당하면 그 자손된 사람 가운데 관리는 그 직을 사양하고, 선비는 과거 응시를 중단하고, 평민은 혼사를 중지하고 근신하면서 만 28개월 동안 복상하던 제도)하여 산승을 불러 아들을 위해 조용한 곳에서 기도를 드리게 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외부로부터 함 한 개가 들어왔는데 기도를 드리던 중이라 나중에 열어본다며 미뤄두었다. 기도가 끝나고 밀실로 함을 옮긴 뒤 민승호는 혼자 함을 살폈다. 함에 구멍이 있었고 자물쇠와 열쇠가 걸려 있었다. 그는 무심코 함을 열려고 하던 순간 요란한 폭음 소리와 함께 불이 일어났다. 이때 민승호의 양어머니이자 명성황후의 어머니인 한창부부인 이씨 역시 현장에 있다가 죽고 말았다.
1875
[흥인군 저택에 원인 불명 방화 발생]
흥선대원군의 셋째 형 흥인군의 집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방화가 발생했다. 의금부가 용의자를 체포했지만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했고, 대원군 소행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1875년 11월 흥인군의 집에 원인을 알수 없는 방화가 일어났다. 의금부는 용의자로 지목된 장씨 성의 사나이를 체포했다. 그는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드나들던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신철균 집의 문객이었다. 장씨를 체포해서 국문, 처형했고, 신철균 역시 잡아다가 공초를 했으나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1881
[이재선 추대 음모 사건 발생 및 진압]
흥선대원군 계열의 안기영 등이 대원군의 서장자 이재선을 왕으로 옹립하려던 역모 사건이 발생했다. 내부 고변으로 실패하여 안기영, 이재선 등이 처형되었으나, 대원군은 국왕의 생부라는 이유로 처벌을 면했다.
1881년 9월 13일 대원군 계열의 인사였던 안기영 등의 주도로 흥선대원군의 서장자 이재선을 옹립하려는 이재선 추대 음모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재선 추대 음모는 내부의 고변으로 실패하고 안기영, 이재선 등은 처형당했다. 이재선의 모역 사건에는 흥선대원군이 배후로 관련되었으나, 국왕의 생부라는 이유로 언급하지 않고 불문율에 붙여졌다.
1882
[임오군란 발발, 흥선대원군 재집권]
구식 군인들의 봉기로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흥선대원군은 봉기군의 추대로 입궐하여 재집권하고, 명성황후가 죽었다고 거짓 보고하며 5군영 복설 등 개혁을 추진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재집권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측근인 허욱은 임오군란 때 병사 복장을 하고 대궐로 들어가 명성황후를 가리켜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6월 10일 난병들이 대궐을 침입했는데 명성황후는 밖으로 도망가고, 이최응, 민겸호, 김보현 등은 살해되었다. 봉기군의 추대로 입궐한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거짓 보고한 뒤 황후가 입던 옷을 관에 넣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1882년 6월 고종에게 임오군란의 사태수습을 위한 전권을 위임받자, 이 기회에 정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궁궐에서 도망쳐나간 명성황후가 죽었다고 공식으로 선포한 후 무위영(武衛營)·장어영(壯禦營)·별기군(別技軍)을 폐지하고 5군영을 복설했으며,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삼군부를 복설하였다.
[흥선대원군, 청나라에 납치되어 톈진에 감금]
임오군란 진압 후 청나라 장수 오장경과 마건충에게 강제로 납치되어 경기도 화성군 남양만에서 배를 타고 청나라 톈진의 보정부로 압송되었다. 그곳에서 4년간 억류 생활을 했다.
1882년 7월 12일 한양에 입성한 청나라 장수 오장경·마건충 등은 흥선대원군의 접대를 받았다. 그날 접대를 받고 돌아갔던 오장경과 마건충은 다시 군사문제로 회담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에게 "오늘 밤 남양만에서 배를 타고 톈진(天津)에 가서 황제의 유지(諭旨)를 받아야 한다" 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이 거절하자 교서를 읽은 뒤 강제로 보교에 태워 경기도 화성군 남양만으로 납치해 갔다. 이후 배를 타고 톈진에 도착, 흥선대원군은 4년간 톈진의 보정부(保定府)에 억류되어 생활하였다. 보정부는 톈진시 변두리에 위치한 관청으로 베이징에서 남쪽으로 150 km 지점의 외진 지역에 있었다.
1885
[흥선대원군, 4년 만에 청나라에서 귀국]
민씨 정권이 친러/친일 성향을 보이자, 청나라의 정치적 계산으로 4년여 만에 톈진 보정부에서 풀려나 인천항을 통해 귀국했다. 귀국 후 운현궁에 칩거하며 재기를 노렸다.
1885년 민씨 정권이 친러, 친일 등의 성향을 보이며 청나라를 견제하려 하자,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청나라 정부와 위안스카이 등의 정치적 계산으로 4년여 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1885년 4월 이재면은 귀국하였고, 1885년 8월 이재면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같은 달 원세개의 주선으로 배를 타고 이재면의 시종을 받고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귀국 후 기생 출신 애첩인 추선의 죽음을 보았고, 이후 운현궁에 칩거하며 재기를 노렸다.
1890
[전봉준,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 문객으로 지내다]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전봉준이 1890년대 초반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의 문객으로 지내며 대원군과 연결을 시도했다.
1890년 전봉준은 운현궁을 찾아왔다. 이후 1890년대 초반 전봉준은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의 문객 생활을 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흥선대원군은 전봉준 등과 연락하며 동학 농민 운동과의 연결을 시도한다.
1892
[운현궁 화약 폭발 및 폭탄 장치 사건 발생]
운현궁에서 화약이 터지고 여러 건물에 장치된 화약이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황현은 명성황후를 배후로 지목하며 민승호 폭사 사건에 대한 정치적 보복극으로 비판했다.
1892년 봄, 운현궁에서 화약이 터지고 여러 건물에 장치된 화약이 발각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황현은 운현궁의 폭탄 테러 사건을 명성황후가 대원군 일가를 폭살하기 위해 벌인 짓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흥선대원군의 사랑채와 이재면, 이준용 부자의 거처에도 폭약이 장치되어 있었으나 다행히 점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각되었다. 이는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의 오빠인 민승호에게 폭약을 보내 일가를 폭사시켰던 전례에 대한 정치적 보복극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1893
[흥선대원군, 동학 농민군 이용 이준용 추대 음모]
흥선대원군은 동학 농민군이 상경하여 복합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동학당 수만 명을 서울로 불러 불궤를 도모했다는 것이다.
1893년 그는 동학 농민군이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 정교는 1893년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3일간 박광호를 소두로 하는 약 50명의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궁궐 앞에서 교조 신원을 탄원하며 연좌시위를 벌인 사건을 대원군이 시킨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정교는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당 수만 명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장차 불궤를 도모하여 그의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하였다.
[전봉준, 흥선대원군 방문 및 동학도 상소 주목]
전봉준이 한성부로 올라와 흥선대원군을 방문하여 '나라와 인민을 위하는 뜻'을 밝히고, 대원군은 동학도들의 경복궁 앞 상소 운동에 주목하며 이들과 연결을 시도했다.
1893년 2월 전봉준은 한성부로 올라가 흥선대원군을 방문하였다. 대원군은 잠시 식객으로 있었던 전봉준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때 전봉준은 흥선대원군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동학도들의 일부는 그보다 앞선 2월 경 한성부로 올라가 경복궁 앞에서 복합 상소를 올렸다.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계속된 상소의 내용은 폐정 개혁과 부패 관리 처벌 등이었다. 1만여 명 이상의 많은 인파의 대규모 시위는 한성부의 백성과 조정의 관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고, 전봉준이 떠난 직후 일어난 이 시위를 접한 흥선대원군은 1893년 2월의 동학도들과 농민들의 집회를 주목하게 된다.
1894
[일본군 경복궁 점령, 흥선대원군 3차 집권]
갑오개혁 당시 일본군이 경복궁을 강제로 점령하자, 일본의 종용으로 흥선대원군이 세 번째로 집권하여 민씨 세도가 무너졌다. 그는 이준용 추대 계획을 다시 추진했다.
1894년 6월 21일 일본군 혼성여단이 경복궁을 강제로 점령하였다. 정권 회복과 왕조 중흥 방안 마련에 골몰하던 대원군은 “조선의 땅을 한 치도 요구하지 않겠다.”라는 스기무라 후카시 일본 공사관 서기관의 확약을 곧이곧대로 믿고 일본 상인의 호위를 받으며 입궐하였다. 이로써 민씨 세도는 무너졌다. 이후 동학 농민군은 일본군에 의해 진압당했지만 대원군은 국왕의 생부라는 이유로 책임추궁을 당하지 않았다.
[흥선대원군, 개화파 암살 지령 내리다]
대원군과 이준용의 음모가 탄로 나자, 대원군은 개화파인 경무사 이윤용의 관직을 박탈하고 고종주, 김국선 등에게 김학우, 김가진, 김홍집 등 개화파 인사들의 암살을 담당하도록 지시하는 4차례의 서간을 보냈다.
1894년 9월 상순 허엽, 이병휘에 의해 대원군과 이준용의 음모가 탄로나자, 위기를 느낀 대원군은 개화파인 경무사 이윤용의 관직을 박탈하고 이어 개화파 암살을 고종주, 김국선 등에게 담당시켰다. 김국선은 서울 창의문 내 신당에 살고 점술이 직업인 심원채로 하여금 무리를 모으게 하여, 전동석 이하 여러 사람을 모았다. 거사와 관련하여 대원군으로부터 네 차례에 걸쳐 고종주에게 서간이 보내졌다. 1894년 9월 14일에 보낸 1차 서간에서는 김학우, 김가진, 김홍집 3인이 거명되지 않았고, 창의문 용사가 많이 모여 개화당을 진멸할 수 있다고만 하였다. 9월 20일에 보낸 2차 서간을 통하여 비로소 3인을 제거하라는 명령이 시달되었다. 그리고 9월 27일 보낸 3차 서간에서는 때를 놓치지 말라고 하였다. 4차 서간을 전달할 때 김국선이 구전으로 이완용, 이윤용, 안경수, 유길준, 박정양, 권모 등을 지목했다. 이 서간에서는 기회를 놓치면 성명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4차 서간을 지시에 따라 전동석에게 전하여 돌려보게 하였다. 대원군의 4차 서간은 9월 30일에 보내졌다.
[일본,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에게 공직 사퇴 종용]
청일전쟁 평양성 전투에서 청나라가 패배하고 대원군의 정변 음모가 일본에 발각되자, 일본 측은 대원군과 이준용에게 항일 활동 증거를 추궁하며 공직 사퇴를 종용했다.
1894년 10월 중순 이후 일본 측은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이 항일활동을 전개한 증거들을 가지고 추궁하며 양인에게 공직 사퇴를 종용하였다. 당시 조선 정부는 고종이 평양의 청장들에게 보낸 밀서를 일본 측이 문제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대원군의 축출에 동의했었다. 이에 대원군은 이노우에 가오루 일본 공사에게 자신이 추진한 항일 운동에 대해 사과하고 손자 이준용의 장래 교육을 부탁하였다. 결국 이준용 추대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개화파 김학우, 자객에 의해 암살당하다]
흥선대원군의 지시에 따라 암살 대상이 된 개화파 인사 김학우가 서울 전동 사저에서 자객들의 습격을 받아 사망했다. 이 사건은 대원군파에 의한 정국 전환 시도였으나, 다른 개화파 암살은 실패로 돌아갔다.
대원군의 지시에 따라 암살 대상이 된 개화파들의 동태를 살펴오던 이들은 김학우의 주변에 계엄이 없음을 탐지하고 심원채가 모은 장사, 검객을 동원하여 거사에 착수하였다. 자객들은 1894년 10월 3일 밤 김학우의 서울 전동 사저를 습격해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던 김학우를 죽이고 그의 친구 두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어 다른 개화파들을 죽이려 했지만 경무청의 기찰이 엄해 착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암살을 통한 개화파 제거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895
[이준용, 김학우 암살 혐의로 체포되다]
흥선대원군의 장손 이준용이 김학우 암살 혐의로 체포되었다. 대원군의 간곡한 부탁과 각국 영사들의 선처 호소로 이준용은 사형을 면하고 종신 유배형을 받았다.
1895년 3월 24일 이준용이 김학우 암살 혐의로 체포되었다. 박영효와 서광범 등은 이준용 역모사건을 이용하여 대원군파를 일소하려는 의도에서 이준용과 그 당여들을 사형에 처하려 하였다. 그러나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이준용을 구하려는 흥선대원군의 절박한 부탁을 받은 이노우에 공사와 각국 영사들이 이준용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고 나서서 결국 이준용은 사형을 면하고 종신 유배형을 받았다. 그리고 이준용은 일본영사관 영사로 임명되어 떠나게 됐다.
[흥선대원군, 일본 공사관과 명성황후 제거 각서 서명]
일본 공사관 오카모토 류노스케가 공덕리 별장의 흥선대원군을 찾아 명성황후 제거 관련 4개항 각서를 제시하고 대원군이 자필 서명했다. 이는 일본이 대원군을 명성황후 제거 작업에 끌어들이려는 의도였다.
8월 16일 대원군의 공덕리 별장 사랑에서 일본인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우노스케가 명성황후 제거와 관련한 4개항의 각서를 대원군에게 제시하고 대원군의 자필 서명을 받아냈다. 각서는 거사후 대원군이 국왕을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되 정사는 내각에 맡겨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일본은 명성황후를 제거한 뒤 대원군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미리 쐐기를 박아둔 것이다. 이날 대원군이 각서에 자필 서명하는 자리에는 대원군의 장남인 이재면과 장손자 이준용도 함께 있었다. 대원군은 출발에 앞서 자신의 거사 취지를 밝히는 '고유문'을 발표하고 이를 서울 시내에 게시하라고 지시했다. 고유문은 '민씨 척족이 권력을 잡고 갑오경장의 개혁을 무위로 돌려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으니 이들을 척결해 버리겠다'는 내용이다.
[을미사변 발생, 명성황후 시해되다]
일본 낭인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경복궁 옥호루에서 시해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이 사건의 배후 또는 협력자로 지목되며, 사건 직후 고종의 형 이재면을 궁내부대신에 앉히고 정권 장악을 시도했다.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옥호루에서 시해된 뒤 손자 영선군 이준용은 일본의 도움으로 석방됐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를 살해하기 위한 자객이 파견되자 사람을 보내 그들을 돕도록 했다. 명성황후가 살해됐다는 것은 경복궁 내 강령전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고 있던 대원군에게 즉각 보고됐다. 대원군은 겁에 질린 고종이 그를 부르는 형식을 빌려 이날 아침 경복궁내 건청궁에서 아들과 대면하게 된다. 대원군은 고종과 대면한 자리에서 고종의 형이자 자신의 장남 이재면을 궁내부대신에 앉히고 다시 정권을 장악한다.
1896
[아관파천으로 흥선대원군 정계 은퇴]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은 정계에서 은퇴하여 양주 별장으로 가서 은거 생활을 했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대원군은 은퇴하여 다시 양주로 가서 은거하다가 1898년 1월 부인 여흥부대부인의 죽음을 본 후, 2월 운현궁 별장 아소당 정침(正寢)에서 죽었다. 이때 대원군의 행동을 제약하는 법이 정해져 사실상 연금상태에 들어갔다.
1898
[흥선대원군 부인 여흥부대부인 민씨 사망]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가 사망했다. 대원군은 부인의 죽음 후 한 달여 뒤에 사망했다.
1898년 1월 부인 여흥부대부인의 죽음을 본 후, 2월 운현궁 별장 아소당 정침(正寢)에서 죽었다.
[흥선대원군, 운현궁 아소당에서 사망]
조선 후기 격변의 시대를 이끌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운현궁 별장 아소당 정침에서 사망했다. 고종은 그의 장례식에 불참할 정도로 부자관계가 악화되어 있었다.
1898년 2월 22일(음력 2월 2일) 흥선대원군이 운현궁 별장 아소당 정침(正寢)에서 죽었다. 그의 장례식에 아들 고종은 불참하였다 한다. 사망 직후 윤 3월 26일 '아소당' 뒤뜰에 묻혔으며, 묘호는 흥원(興園)이라 명명되었다. 만년에는 국태공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1907
[흥선대원군, 흥선헌의대원왕으로 추봉되다]
순종 즉위 후 장례원경 이중하의 건의로 흥선대원군이 대원왕으로 추존되었고, 10월 1일 시호 헌의를 받아 흥선헌의대원왕이 되었다.
대한제국 순종 즉위 후 1907년 8월 26일 장례원경(掌禮院卿) 이중하(李重夏)가 그를 대원왕으로 추존할 것을 건의하였고, 1907년 10월 1일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헌의(獻懿)이다. 이에 따라 흥선헌의대원왕(獻懿大院王)이라고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