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집
조선 문신, 정치가, 외교가, 개화파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7:05
조선 말기 혼란의 시대를 이끈 핵심 인물. 온건개화파의 수장으로 조선의 근대화와 개항을 추진함. 갑오개혁을 단행하며 신분제 폐지 근대적 관제 도입 등 사회 개혁을 주도. 외세의 개입 속에서 친일파와 개혁가라는 극명한 평가를 받으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음.
1842
[한성부 출생]
조선 한성부에서 이조참판 김영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훗날 격동의 조선 말기를 이끌어갈 중요한 정치인으로 성장합니다.
1867
[진사시 합격 및 문과 급제]
실학자 박규수 문하에서 학문을 갈고닦았고, 진사시에 합격한 뒤 이듬해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관료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1868
[부모님 상으로 관직 사퇴]
승정원 사변가주서에 임명되었으나, 부친상에 이어 모친상까지 잇따라 당하며 3년상을 치르기 위해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1875
[관직 복귀 및 지방관 역임]
부모님의 탈상을 마친 후 오위 부사과를 거쳐 흥양현 현감, 사과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다시 조정에 복귀했습니다.
이후 호조참의, 공조참의 등 주요 참의직을 두루 지냈습니다.
1880
[제2차 수신사로 일본 방문, 근대 문물 시찰]
예조 참의로서 58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제2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도쿄 체재 중 일본의 근대화된 모습을 두루 살피고 그 발전에 크게 놀라 조선의 개화와 개항의 중요성을 절감했습니다.
조선과 일본 사이의 해관세 징수, 제물포 개항, 미곡 수출 금지, 일본 공사의 서울 주재 등을 논의하려 했으나, 일본은 김홍집이 전권을 위임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식 교섭을 거절했습니다. 비록 교섭에서는 성과를 얻지 못했으나, 일본의 변화를 관찰하며 조선의 부국강병을 위한 개화의 필요성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는 훗날 그가 친일파로 분류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조선책략'과 '이언' 국내 소개]
일본 방문 중 주일 청국 공사관 참찬관 황준헌으로부터 러시아 남하를 막기 위해 청, 일본, 미국과 외교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조선책략》과 서양 문물을 소개하는 《이언》을 건네받아 국내에 소개했습니다.
이는 당시 조선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향후 외교 정책의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황준헌의 《조선책략》은 전통적인 사대교린 외교 정책을 버리고 다자 외교를 제안하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내용이었으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을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고종은 이 책을 널리 배포하고 외교 정책에 도입하여 '조사시찰단'을 일본에 파견하는 계기가 됩니다.
1881
[통리기무아문 복귀 및 외교 활동 주도]
《조선책략》의 도입에 대한 위정척사파의 반발로 잠시 사직했으나, 조정 개혁으로 신설된 통리기무아문에 복귀하며 조선의 외교 정책 실무 책임자로 급부상했습니다.
그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교섭을 주도하여 일본이 이전에는 거부했던 관세 문제까지 해결하며 국제 통상 관계를 확대했습니다. 또한 '조영통상조약', 독일과의 통상 조약까지 맺는 등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비오는 날의 나막신'에 비유되기도 했습니다.
1882
[임오군란 수습 및 흥선대원군 석방 교섭]
훈련도감 군인들의 봉기로 시작된 임오군란이 정치적 대결로 비화되고 청나라가 개입하여 흥선대원군을 납치하는 복잡한 상황에서, 김홍집은 경기도 관찰사로 재수되어 사건 수습에 기여했습니다.
그는 청나라에 진주 부사로 파견되어 북양대신 리훙장을 설득, 흥선대원군의 석방을 교섭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임오군란은 구식 군인에 대한 열악한 처우가 표면적 원인이었으나, 명성황후 중심의 척족 세력과 흥선대원군 및 위정척사파의 대결, 그리고 개화에 대한 거부감 등 복합적인 요인이 얽혀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빌미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려 했으나, 김홍집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조인에도 참여하며 조선의 외교적 입지를 다지고자 했습니다.
1884
[갑신정변 발생과 한성조약 체결]
온건 개화파였던 김홍집은 우정국 낙성식에 참석했다가 김옥균 등의 급진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에 휘말렸습니다.
3일 만에 진압된 정변 이후, 조선은 김홍집을 교섭 대표로 하여 일본과의 '한성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갑신정변은 조선의 자주적 개화를 위한 시도였으나, 일본군의 개입과 소수 엘리트의 주도로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습니다. 김홍집은 이 조약을 통해 오히려 조선이 일본에게 사죄하는 국서를 보내게 되는 등 굴욕적인 결과를 초래했으며, 이는 훗날 그의 정치적 입지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이후 잠시 한직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1894
[제1차 김홍집 내각 출범 및 갑오개혁 주도]
동학 농민 혁명과 청일 전쟁 발발이라는 혼란 속에서, 일본 세력의 지원을 받아 제1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하고 총리대신에 취임했습니다.
그는 개혁기구인 군국기무처 총재를 겸하며 갑오개혁을 단행, 과거제 폐지, 신식 화폐 제도 채택, 관제 개혁 등 파격적인 근대화 조치를 이끌었습니다.
동학 농민 혁명으로 청나라군이 조선에 들어오자, 이를 빌미로 일본군이 경복궁을 습격하며 김홍집 일파를 지원했습니다. 김홍집은 대원군을 불러들여 민중의 불만을 완화하려 노력하는 등 정치적 안정도 꾀했습니다. 그의 개혁은 조선 사회의 봉건적 잔재를 청산하고 근대 국가로 나아가려는 중요한 발걸음이었습니다.
1895
[제2차 연립 내각 출범 및 '홍범 14조' 발표]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강력한 친일파 박영효가 입각한 제2차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이 성립되었습니다.
그는 군국기무처를 없애고 갑오개혁 초안을 완성하여 '홍범 14조'를 직접 수립하고 고종으로 하여금 발표하게 했습니다.
'홍범 14조'는 조선의 자주 독립, 왕실 사무와 국정 분리, 재정 확립, 교육 진흥 등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했습니다. 이 시기 8아문을 7부로, 지방 8도를 23부로 개편하고 교육입국조서를 발표하여 사범학교를 설립하는 등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재정난과 박영효 등과의 대립으로 내각은 곧 와해됩니다.
[을미사변 발생 및 자살 미수]
일본이 박정양 내각의 친러 정책을 경계하여 명성황후를 암살하는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김홍집은 큰 충격을 받고 자결을 시도했습니다.
유길준의 간곡한 만류로 목숨을 건졌으나, 다음날 제3차 김홍집 내각이 개편되면서 그는 다시 주요 역할을 맡게 됩니다.
"일국의 중신된 자가 국모의 참변을 보고 어찌 살아서 폐하와 만백성을 대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자살을 결심했으나, 유길준은 "우리가 이 사태를 수습하는 데 노력하는 것도 충절이 될 것"이라며 그를 말렸습니다. 이 사건은 김홍집에게 씻을 수 없는 정치적 오점을 남기게 됩니다.
1896
[아관파천과 비극적인 최후]
단발령 강행 등 급진적인 을미개혁에 대한 성리학자들의 반발로 전국적인 의병 봉기가 일어나는 혼란 속에, 러시아의 세력이 증대하며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고, 그는 광화문에서 친러파 군인들과 분노한 군중들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습니다.
김홍집의 시신은 광화문 밖에 효수되었고, 도륙되어 각지로 보내졌으며, 백성들은 그의 수급에 돌을 던지는 등 극심한 증오를 표출했습니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그의 시신을 씹는 자까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54세였던 그는 '일국의 총리로 동족 손에 죽는 것은 천명'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지며, 그의 가족에게도 연좌제가 적용되는 등 혹독한 비극을 겪었습니다. 그는 죽음 이후 오랫동안 역적으로 단죄되었으나, 해방 후 재평가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