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서예가, 금석학자, 고증학자, 화가, 실학자, 유학자, 불교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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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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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 금석학자, 고증학자, 화가, 실학자, 유학자, 불교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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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학문과 예술의 거장으로 추사체를 창조해 한국 서예사에 독보적인 족적을 남겼습니다. -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로서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세계 최초로 고증해 학문적 업적이 탁월합니다. -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며 고증학과 북학 사상을 깊이 탐구 실용적인 학문 연구를 이끌었습니다. - 긴 유배 생활 속에서도 학문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아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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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

[조선 예산현에서 태어나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서예가, 화가인 김정희가 충청도 예산현에서 병조판서 김노경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후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김노영의 양자가 되어 한성부로 상경했습니다.

김정희는 1786년 충청도 예산현에서 병조판서 김노경과 기계 유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김노영의 양자로 입적되어 한성부로 상경하게 된다. 그의 가문은 왕실의 이중 외척으로, 멀지만 세도가였다.

1792

[어려서부터 글재주를 인정받다]

7세 때 입춘대길이라 쓴 글을 문앞에 붙였는데, 이를 본 채제공이 그에게 장차 명필이 될 것이라고 칭찬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박제가의 문인으로 들어가 박지원의 학문을 계승했습니다.

7세 때 입춘대길이라 쓴 글을 문앞에 붙여 놓자, 지나가던 채제공이 보고 김정희에게 장차 명필이 되겠다고 칭찬했다고 전해진다. 서얼 출신으로 시, 서, 화에 능했던 박제가에게 어려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며, 박제가를 통해 북학파 박지원의 학문을 계승하게 되었다.

1800

[양자로 입적하여 혼인하다]

가문을 잇기 위해 큰아버지 김노영의 양자로 입적되었고, 동갑인 한산 이씨와 혼인했습니다. 같은 해 정조가 승하하는 큰 정치적 변화를 겪었습니다.

큰아버지 김노영이 귀양 가고, 둘째 큰아버지와 할머니, 할아버지가 죽는 등 집안의 위기 속에서 가문을 잇는다는 뜻에 따라 김노영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15세의 나이로 동갑인 한산 이씨와 혼인했으며, 결혼하던 그해 정조가 승하했다.

1805

[연이은 가족과 스승의 죽음]

스무 살 되던 해 대왕대비 승하에 이어 부인 한산 이씨, 스승 박제가, 양어머니까지 연이어 세상을 떠나는 큰 슬픔을 겪었습니다. 이후 한 살 아래 규수와 재혼했습니다.

스무 살 되던 해 대왕대비가 승하하고, 그 다음달에는 부인 한산 이씨가 죽었다. 이 무렵 유배에서 풀려난 스승 박제가가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으며, 양어머니도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연이은 비극을 겪은 뒤 한 살 아래인 규수와 재혼했다.

1809

[생원 급제 및 청나라 연행]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했습니다. 같은 해 동지사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가는 부친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으로 연행길에 올랐습니다.

1809년(순조 9)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생원이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같은 해 24세 때 동지사 겸 사은사의 일행이 서울을 떠날 때, 그는 부사였던 부친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의 직책으로 연행(燕行) 길에 올랐다. 이때 청나라의 고증학에도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1810

[청나라 석학들과 교류하며 고증학 습득]

6개월간 청나라에 머물며 당시 청나라 제일의 학자 옹방강, 완원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고증학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특히 완원은 자기가 지은 《소재필기》를 김정희에게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24세 때인 1810년(순조 10)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청나라에 머물면서 청나라 제일의 학자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고증학을 배우게 된다. 이들 학자와의 교류는 이후 김정희의 학문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완원은 자신이 지은 《소재필기》(蘇齋筆記)를 김정희에게 처음으로 기증하기까지 했다. 조선에 돌아온 뒤에도 그들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학문적 교류를 이어갔다.

1816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고증]

당시 '무학 대사 비' 또는 '고려 태조 비'로 알려져 있던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비문 해독을 통해 진흥왕의 순수비임을 밝혀냈습니다. 이는 한국 금석학 연구에 기념비적인 업적으로 평가됩니다.

김정희는 조선에서 금석문 연구를 '금석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선구자이다. 1816년 당시까지 “무학 대사의 비” 또는 “고려 태조의 비”라고 알려져 있던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비문에 적힌 “…眞興太王及衆臣巡狩…”라는 구절을 통해 진흥왕의 순수비라는 것을 밝혀냈다. 순수비를 밝혀낸 과정과 그 사실적인 증명은 그가 저술한 《예당금석과안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진흥이비고》 등과 같은 저서도 남겼다. 이 업적은 한국 금석학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1819

[과거 급제 후 효명세자 사부로 활동]

식년시 병과에 합격하여 권지세자시강원, 예조 참의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로 효명세자를 보필했습니다. 예문관 검열을 거쳐 삼사의 언관을 두루 역임했습니다.

1819년(순조 19년) 식년시 병과로 합격하여 권지세자시강원, 예조 참의를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로 효명세자를 보필하였다. 예문관 검열을 거쳐 삼사의 언관을 두루 역임한 뒤 승문원 검교, 1823년 규장각 대교, 암행어사 등에까지 올랐다. 이 무렵 친구 조인영의 조카사위이자 19세의 효명세자를 가르치는 세자시강원 보덕을 거쳐 필선이 되었다.

1830

[생부 김노경의 유배]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고금도로 유배되었습니다. 이는 김우명 등 김정희에게 원한을 품은 세력의 탄핵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이는 효명세자가 죽고 권력을 잡은 안동 김씨 집안의 김우명이 김정희를 탄핵하여 파면시킨 후, 김정희에게 원한을 품었던 김우명이 그의 부친까지 연루시킨 것이었다. 김노경은 순조가 죽던 1834년 순조의 특별 배려로 유배에서 풀려났다.

1840

[정치적 음모로 제주도 유배]

안동 김씨가 집권하면서 윤상도의 옥사와 관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습니다. 유배지에서의 곤궁한 생활 가운데에도 계속 글과 작품을 썼으며, 추사체를 완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40년(헌종 6년) 안동 김씨가 집권하자 김정희 자신이 윤상도(尹尙度)의 옥(獄)에 관련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유배지에서의 곤궁한 생활 가운데 계속 글과 작품을 썼다. 제주도에서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에까지 내려오는 한국의 서법을 연구하여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1842

[유배 중 부인과의 사별]

제주도 유배 중인 1842년 음력 11월, 부인이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유배지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제주도 유배 중이던 1842년 음력 11월, 그의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유배지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아픔을 겪었지만, 이 속에서도 학문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1849

[제주도 유배에서 석방되다]

예순세 살이 되던 해, 8년 간의 제주도 유배 생활에서 풀려났습니다. 유배 기간 동안 완성한 추사체는 한국 서예사의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예순세 살인 1848년 음력 12월 6일, 양력으로는 1849년 1월 1일에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났다. 유배지에서의 곤궁한 생활 가운데 계속 글과 작품을 썼으며,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에까지 내려오는 한국의 서법을 연구하여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그의 유배지에는 안동 김씨 세도가의 김유근 등이 찾아오기도 했다.

1851

[친구와의 인연으로 다시 유배]

친구 권돈인이 궁중 제례와 관련하여 실수하자, 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이는 안동 김씨 세도가의 표적이 된 결과였습니다.

그의 대쪽 같은 성품은 안동 김씨의 표적이 되었고, 그의 친구 권돈인이 영의정으로 궁중의 제례와 관련하여 실수하자(헌종묘천 문제), 1850년 또는 1851년에 실수한 권돈인은 물론 김정희까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1852

[북청 유배에서 해방되다]

예순여덟 살 겨울에 북청 유배에서 풀려났습니다. 12년간의 유배 생활을 마친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며 서화와 선학에 몰두했습니다.

북청 유배는 1852년 예순여덟 살 겨울에야 풀려나게 된다. 그동안 지인과 제자로부터 고대의 석기를 모아오게 하여 한국의 고대 문화를 연구하였다고 한다. 12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친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서화와 선학(禪學)에만 몰두했다.

1856

[과천에서 여생을 보내고 입적하다]

북청 유배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경기도 과천에 과지초당을 마련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일흔한 살 되던 해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갔다가 10월 과천으로 돌아와 죽기 전날까지 집필하며 생을 마감했습니다.

북청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경기도 과천에 과지초당(瓜地草堂)이라는 거처를 마련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일흔한 살 되던 해에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갔다가 그해 10월 과천으로 돌아와 생을 마쳤으며, 죽기 전날까지 집필을 하였다고 한다. 그의 사망일은 1856년(향년 70세)으로 기록되어 있다. 작품 중에는 후일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 등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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