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문신, 실학자, 저술가, 시인, 과학자, 철학자, 사회사상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4- 05:58:12
조선 후기 최고의 지성 다산 정약용. * 유교 천주교 실학을 넘나들며 시대를 앞서간 융합적 사상가. * 백성들의 삶을 위한 개혁 방안을 제시한 실학 집대성자. *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500여 권의 방대한 저술 남김. * 수원 화성 거중기 고안 등 탁월한 과학기술 능력을 겸비. *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 세계가 인정한 위대한 학자.
- 조선 천재, 다산 정약용 탄생
- 4세에 천자문 떼다
- 천재성을 드러낸 유년 시절
- 무인 가문의 사위가 되다
- 실학 사상의 토대를 다지다
- 천주학과의 첫 만남
- 생원이 되어 성균관에 입학하다
- 조선 천주교의 초기 주역이 되다
- 이벽에게 천주학의 깊이를 배우다
- 천주교 모임, 명례방 사건으로 발각되다
- 금지된 서적 연구, 반회 사건으로 비화되다
- 정조,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다
-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관직에 나서다
- 신해박해와 천주교와의 단절 선언
- 첫 유배와 정조의 배려
- 수원 화성 건축에 기여한 천재 공학자
- 을묘박해로 인한 두 번째 좌천
- 정조의 급사, 그리고 정국의 혼란
- 18년간의 기나긴 유배 생활 시작
- 신유박해, 정순왕후의 남인 숙청 작업 시작
- 신유박해로 옥에 갇히다
- 유배지에서 막내아들 농아를 잃다
- 18년 유배의 끝, 고향으로 돌아오다
- 모든 백성이 잘 사는 사회를 꿈꾼 '정전론'
- 회혼일 아침, 영원한 안식에 들다
- 근대 조선, 위대한 학자를 추모하다
- 세계가 인정한 다산, 유네스코 기념인물로 선정
1762
[조선 천재, 다산 정약용 탄생]
조선 후기 혼란스러운 시기에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에서 태어났습니다.
정약용이 태어난 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비극이 벌어졌고, 부친은 벼슬을 내려놓고 귀농하여 아들 이름을 '귀농(歸農)'이라 지었습니다.
1766
[4세에 천자문 떼다]
일반적인 유년 시절과는 달리, 4세라는 어린 나이에 이미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며 남다른 총명함을 보였습니다.
그의 학문적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1769
[천재성을 드러낸 유년 시절]
7세에 이미 '바다'라는 시를 지었고, 10세 이전에 지은 시들을 모아 《삼미자집》(三眉子集)이라는 시집을 냈을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삼미'는 천연두 흉터로 눈썹이 셋으로 보인다는 뜻입니다.
어린 시절 천연두에 걸렸으나 명의 이헌길의 진료로 살아남았고, 훗날 이헌길의 의서를 바탕으로 홍역 치료서 《마과회통》을 집필하여 조선의 수많은 생명을 구했습니다. 또한 이헌길의 생애를 다룬 《몽수전》을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1770
[어머니를 여의다]
9세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 윤소온 여사를 여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후 맏형수 경주 정씨와 계모 김씨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1776
[무인 가문의 사위가 되다]
용맹스러운 무신 홍화보의 딸인 풍산 홍씨와 혼인하며 처가에 왕래하기 위해 서울을 자주 드나들게 됩니다.
이는 그의 학문적 여정에도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 줍니다.
장인 홍화보는 해적선 퇴치 공을 세우고 이례적으로 승지에 제수되는 등 뛰어난 무인이었습니다.
[실학 사상의 토대를 다지다]
명성이 높은 승지 이가환과 매부 이승훈을 만나 성호 이익의 학문에 깊이 접하게 됩니다.
이 만남은 그가 실학 사상의 토대를 다지고, 훗날 이 근기학파의 실학적 이론을 완성하는 인물로 평가받게 되는 중요한 단초가 됩니다.
1777
[천주학과의 첫 만남]
권철신이 주도한 서학교리 강습회에 참여하여 학문적 호기심으로 서양학문과 함께 천주학을 접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훗날 그의 인생에 큰 고초를 안겨줄 악연이 됩니다.
1783
[생원이 되어 성균관에 입학하다]
세자 책봉 경축 증광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22세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입학합니다.
매월, 열흘마다 치르는 시험에서 늘 높은 성적을 받아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책, 종이, 붓 등을 상으로 하사받았습니다.
1784
[조선 천주교의 초기 주역이 되다]
이벽에게 천주교 교리를 접한 이후, 조선인 최초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아 정식 천주교인이 됩니다.
이는 그의 사상과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벽에게 천주학의 깊이를 배우다]
큰형수의 제사에 참여했다가 돌아오면서 큰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으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됩니다.
천지창조, 영혼과 육신, 생사의 이치에 관한 이벽의 오묘한 설명에 깊이 매료되어 천주교 서적을 탐독하며 심취합니다.
1785
[천주교 모임, 명례방 사건으로 발각되다]
서울 명동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진행되던 천주교 신앙 모임 '명례방 공동체'가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형조에 끌려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양반 출신들은 석방되나 중인 김범우는 투옥되고, 이벽은 사망, 이승훈은 배교하며 모임은 와해됩니다.
정약용도 일시 배교했으나 은밀한 교제를 재개합니다.
1787
[금지된 서적 연구, 반회 사건으로 비화되다]
반촌 김석태의 집에서 이승훈, 강이원 등과 은밀히 천주교 서적을 연구, 토론하던 사실이 알려져 척사유생들의 상소가 잇따릅니다.
직접적인 처벌은 없었으나 천주학 도서의 유입과 유포가 문제되어 조정에서 논의가 이루어지고, 천주교에 대한 경고음이 울립니다.
당시 한글로 번역된 천주교 서적이 목판으로 간행되어 저렴하게 팔렸고, 충청도 산골 마을까지 보급될 정도로 교세가 확산된 상황이었습니다. 반회 사건 직후 부친 정재원은 자식들에게 천주학을 멀리하라고 명했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따랐으나 정약종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1788
[정조,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다]
이경명이 서학 엄벌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전국에 천주교 관련 서적을 색출하고 소각하는 단호한 금령을 내립니다.
이는 조선 사회에서 천주교가 이단으로 본격적으로 낙인찍히는 계기가 됩니다.
1789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관직에 나서다]
27세에 대과에 급제하며 본격적으로 관직에 진출합니다.
규장각에서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한강에 배다리를 만드는 등 실용적인 능력을 발휘하고, 이후 사간원과 홍문관의 요직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합니다.
1791
[신해박해와 천주교와의 단절 선언]
외가쪽 친척 윤지충이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르고 제사를 폐한 '진산사건'이 발생, 윤지충은 참수당하고 매부 이승훈은 삭탈관직 당합니다.
이 사건으로 천주교가 사교로 낙인찍히고, 정조가 서양 서적 소각 조치까지 취하자 정약용은 천주교와 관계를 완전히 청산합니다.
제사 거부는 유교의 핵심인 효를 부정하고, 이는 곧 왕에 대한 충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조선 지배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서인들의 정치적 공세와 집안 내부의 갈등 속에서 정약용은 천주교를 버렸으나, 셋째 형 정약종은 신앙을 지켰습니다.
[첫 유배와 정조의 배려]
신해박해 때 공서파의 모함으로 서산 해미에 유배되었으나, 정조의 특별한 배려로 불과 11일 만에 풀려납니다.
이는 정조의 그에 대한 깊은 신임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수원 화성 건축에 기여한 천재 공학자]
당대 최대의 국책 사업인 수원 화성 설계에 참여하여,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도르래)를 이용한 혁신적인 장비,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 기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했습니다.
그의 뛰어난 과학 기술력이 빛을 발한 순간입니다.
1792
[아버지의 죽음]
30세 되던 해에 아버지 정재원이 사망했습니다.
평생 벼슬 욕심 없이 자식들을 가르치고 실학 정신을 심어준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큰 슬픔으로 다가왔습니다.
1794
[성균관 강의와 암행어사의 활약]
성균관에서 강의를 하며 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였고, 음력 10월에는 경기도 암행어사로 연천, 삭녕 등을 순찰하며 민생을 살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795
[을묘박해로 인한 두 번째 좌천]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 체포 실패 사건에 연루되어 노론 벽파의 공격을 받습니다.
정조의 비호에도 불구하고 결국 7품계나 강등된 충청남도 홍주 금정찰방으로 좌천됩니다.
이는 그의 관직 생활에 또 한 번의 시련이었습니다.
당시 충청 지역에 천주교 교세가 크게 성장하고 있었기에 정조는 그를 그곳으로 보내 교세 확산을 막고 천주교에 심취했던 과오를 속죄하게 하는 한편, 노론의 공격을 피하게 하려 했습니다. 그는 금정에서 교세 저지를 위해 노력하며 천주교 거물 이존창을 체포하는 공을 세우기도 합니다.
1797
[천주교 배교를 공식화하다]
천주교도로 오해받자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천주교와의 단절을 명확히 하는 내용의 《자명소(自明疏)》를 저술하여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했습니다.
이미 신해박해 이후 천주교와 결별했음을 강조했습니다.
1799
[민생을 돌본 애민(愛民) 목민관]
곡산 부사로 재직하며 이계심의 난에서 백성의 생존권 요구를 억누르기보다 그 용기를 격려하는 등 애민 정신을 실천했습니다.
민중의 항의를 귀담아듣는 참된 관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흠흠신서》는 곡산 부사 재직 시 실제 수사했던 사건들을 바탕으로 판결과 형벌 및 치옥(治獄)에 대한 주의와 규범을 담아, 사람의 생명을 가벼이 처리하지 않도록 유의할 점을 적은 책입니다.
[천주교 비판서 《책사방략》 저술]
천주교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분명히 한 《책사방략》을 저술했습니다.
이는 그가 천주교를 완전히 버렸음을 대외적으로 천명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관직 사퇴와 낙향]
형조참의로 재직 중 형 정약전을 부당하게 탄핵하자 '자명소'를 올리고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합니다.
이는 정조 서거 전 마지막 관직 생활의 마감이자, 훗날 닥쳐올 시련의 서막이었습니다.
1800
[정조의 급사, 그리고 정국의 혼란]
오랜 총애를 베풀어주던 정조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을 접합니다.
이는 그에게 큰 충격이자, 훗날 그의 운명을 뒤흔들게 될 대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비극이었습니다.
어린 순조의 즉위와 정순왕후의 섭정은 곧 남인에 대한 숙청 작업으로 이어집니다.
1801
[18년간의 기나긴 유배 생활 시작]
신유박해의 여파로 경상도 장기를 거쳐 전라도 강진에서 무려 18년간의 길고 고통스러운 유배 생활을 시작합니다.
이는 그의 삶에 가장 큰 시련이자, 동시에 학자로서의 지성을 꽃피우는 소중한 시간이 됩니다.
[신유박해, 정순왕후의 남인 숙청 작업 시작]
어린 순조의 섭정을 맡은 정순왕후가 천주교 탄압령을 내리며 남인에 대한 대규모 숙청 작업을 시작합니다.
과거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섰던 정순왕후는 정조가 중용했던 남인들을 천주교를 명분 삼아 박멸하고자 했습니다.
노론 벽파의 최우선 목표는 정약용을 포함한 핵심 남인 인물들의 제거였습니다.
[신유박해로 옥에 갇히다]
정순왕후의 천주교 탄압령과 남인 숙청 작업의 일환으로 전격적으로 체포되어 옥에 갇힙니다.
국문장에서 학문적 관심으로 천주교를 접했을 뿐이며 이미 결별했다고 변호했지만, 그의 목숨을 노리는 노론 벽파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습니다.
셋째 형 정약종과 매형 이승훈 등 수많은 천주교 인사들이 함께 투옥됩니다. 정약용은 자신을 구명하기 위해 천주교 지도자들을 고발하는 등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그의 처지는 절박했습니다.
1802
[유배지에서 막내아들 농아를 잃다]
강진 유배 중 사랑하는 막내아들 농아가 어린 나이에 홍역과 천연두로 세상을 떠나는 비통한 소식을 접합니다.
임종조차 지키지 못한 비극적인 상황에 깊은 슬픔과 좌절을 느꼈고, 아들의 묘지명과 아들 학유, 학연에게 보내는 편지에 애통한 심정을 담았습니다.
1818
[18년 유배의 끝, 고향으로 돌아오다]
무려 18년간 이어졌던 강진 유배 생활이 마침내 풀리고, 승지에 올랐다가 곧바로 고향인 마현으로 돌아옵니다.
기나긴 고난의 시간을 이겨내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감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1819
[모든 백성이 잘 사는 사회를 꿈꾼 '정전론']
토지의 무상 분배, 공동 노동 및 분배를 통해 토지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한 '정전론'을 상상했습니다.
'정(井)'자 모양으로 토지를 나누어 8구역은 농민에게, 1구역은 공동 노동으로 세금을 내는 방식으로, 당시 심각했던 토지 독점과 소작농의 비참한 삶을 개선하려는 혁신적인 사회주의 토지 정책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여전론'을 통해 농민들이 공동 노동하고 일한 만큼 나누는 방식을 제시하는 등,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며 시대를 초월한 개혁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1836
[회혼일 아침, 영원한 안식에 들다]
혼인 60주년 회혼일 아침, 74세를 일기로 마현리 자택에서 별세했습니다.
백성들을 위한 삶과 학문에 일생을 바쳤던 조선 최고의 실학자는 마지막 시로 '회혼시'를 남기며 영원한 안식에 들었습니다.
1910
[근대 조선, 위대한 학자를 추모하다]
사망 후 74년이 지난 1910년,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으로 추증되고 '문도(文度)'라는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이는 그의 학문과 업적이 뒤늦게라도 국가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2012
[세계가 인정한 다산, 유네스코 기념인물로 선정]
다산 탄생 250주년을 맞아, 장자크 루소, 헤르만 헤세와 함께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이는 그의 개혁 사상과 학문적 업적이 시대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하는 쾌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