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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문신, 정치인, 남인 영수,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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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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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문신, 정치인, 남인 영수,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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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은 조선 후기 영조와 정조 시대를 관통하며 활약한 핵심 문신이자 남인의 영수입니다. 정조의 최측근으로 사도세자와 세손(정조)을 지켰던 충신으로 형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 요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특히 금난전권을 폐지한 신해통공을 주도하며 조선 상업 발전에 큰 기여를 했으며 천주교에 대해서는 온건 정책을 펼쳐 시대를 앞서간 면모를 보였습니다. 그의 삶은 조선 후기 개혁 정치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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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0

[채제공, 홍주에서 태어나다]

충청도 홍주에서 지중추부사 채응일과 연안이씨 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한성부 돈의동으로 이주하여 당대 명망 높은 학자들에게 학문을 배웠다.

할아버지는 채성윤, 효종 때 이조판서·대제학을 지낸 채유후의 종5대손이며, 채팽윤은 그의 종조부였다. 학문은 오광운과 강박에게 배웠고, 정범조, 이헌경, 안정복 등과 교유했다. 그는 이황-정구-허목-이서우-이익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남인 학파의 정통으로 여겼다.

1735

[15세에 향시 급제 및 품계 혜택]

15세의 어린 나이에 향시에 급제했다.

이후 나라의 경사로 관리 품계를 특별히 올려주는 '대가' 혜택을 받아 정5품 통덕랑 품계를 보유하게 되었다.

대가는 명예 직함이었으나, 나중에 실제 관직에 나아갈 때 얻었던 품계가 그대로 인정되었다.

1743

[문과 정시 급제로 관료 생활 시작]

24세에 문과 정시에 병과로 급제하며 승문원 권지 부정자에 임명, 본격적인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전체 26명의 급제자 중 8위로 합격했다. 이후 수찬, 교리 등을 지냈다.

1748

[영조의 특은으로 청요직 진출]

승문원 가주서 재직 중 영조의 특별 명령으로 한림회권 소시에 응시하여 청요직인 예문관 검열이 되는 특은을 입었다.

이는 영조의 탕평책 일환으로 이루어진 특별 조치였다.

1750

[사도세자의 스승이자 든든한 보필자]

사도세자의 학문 정진에 많은 건의를 하며 그의 스승 중 한 명이 되었다.

사도세자가 노론의 숙청 시도를 극력 반대하고 막아준 것에 탄복하여 그를 극력 보필하기 시작했다.

정확한 연월일은 불명확하나, 사도세자와의 관계는 이때 깊어졌다.

1751

[탄핵으로 강원도 삼척 유배]

어느 중인의 분묘를 탈취했다는 양사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1년 이상 강원도 삼척에 유배되었다.

1753

[호서 암행어사로 민생 문제 진언]

호서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충청도를 암행 감찰하고 돌아와 균역법의 폐단과 변방 대비 문제를 영조에게 진언했다.

이후 홍문관수찬, 사간원헌납, 홍문관교리, 사헌부집의 등 여러 직책을 거쳤다.

1755

[나주 괘서사건 활약으로 승지에 오르다]

나주 괘서사건 해결에 문사랑으로 활약하며 공로를 인정받아 승정원 동부승지로 제수되었다.

당시 노론의 공격을 받았으나 사도세자가 그를 비호했다.

이후 사간원헌납, 사헌부집의, 강원도 이천도호부사와 대사간을 역임했다.

1758

[사도세자 폐위 막아낸 충신]

《열성지장》 편찬 공로로 승정원 도승지에 특별 임명되었다.

같은 해 영조가 사도세자 폐위 비망기를 내리자 목숨을 걸고 이를 막아 철회시켰다.

이 사건으로 영조는 훗날 정조에게 채제공을 '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칭찬했다. 이후 대사헌, 대사간, 경기감사 등을 역임했다.

1762

[모친상 중 사도세자 비극 접하다]

모친상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중, 그해 윤5월 사도세자가 폐위되고 사사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3년상을 마친 뒤 1764년부터 개성부 유수, 예문관제학, 한성부좌윤, 대사간, 비변사당상 등 요직을 거쳤다.

1767

[부친상 이후 복직, 한성부 판윤 되다]

안악군수로 재임 중 부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나 3년상을 치렀다.

탈상 후 홍문관제학,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1769년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다.

1770

[병조, 예조, 호조판서 역임하며 국정 운영]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군마 관리에 힘썼고, 예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어 국가 재정 확충과 국제 교역에 필요한 은과 삼 확보에 주력했다.

1771

[청나라 동지사로 파견]

호조 판서로서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72

[세손(정조)의 핵심 스승이자 보호자 되다]

세손우빈객이 되어 세손(정조)의 교육과 보호를 다시 담당하며 정조와의 관계가 더욱 깊어졌다.

노론 김종수, 홍국영 등과 협력하여 세손 보호에 힘썼다.

이에 겸하여 공시당상, 지경연사, 홍문관제학이 되고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1774

[서얼 허통 반대 상소로 봉변 당하다]

평안도관찰사 재임 중 서얼 허통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출퇴근길에 서얼 출신자에게 구타당하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서류통청이 국법의 문제가 아니라 풍속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병조판서와 내의원제조를 지내며 영조의 병간호를 담당하기도 했다.

1775

[대리청정 정조를 보좌, 왕권 위협 세력 규탄]

정조가 왕세손으로 대리청정 한 뒤, 호조판서와 좌참찬으로 활약하며 세손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던 홍인한과 정후겸 등을 역적이라 공박, 규탄했다.

그는 당색을 넘어 노론의 김종수, 홍국영, 소론의 서명선 등과 연합하여 세손 보호에 힘썼다.

1776

[개혁의 첫 발, 사노비 절목 마련]

정조의 특명으로 개인이 거느린 사노비의 폐단을 교정하는 '사노비 절목'을 마련하여 정1품에 올랐다.

이 절목은 후일 사노비 수 감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조 원년과 2년에도 한성부 판윤을 지냈다.

[정조 즉위 후 핵심 요직에, 사도세자 복권 시도]

영조 승하 후 국장도감 제조,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사도세자를 모해했던 세력의 옥사를 처결하고, 사도세자 복권을 주장했으나 노론 김종수의 반대로 제지되었다.

정조 즉위 초 홍국영과 함께 도성의 호위를 담당했으며, 호위군관과 자객들이 정조를 살해하려던 사건이 일어나자 궁성을 지키는 수궁대장에 임명되었다.

1778

[청나라 사신으로 서얼 학자들 동반]

청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 겸 진주정사로 베이징에 다녀왔다.

이때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 서얼 출신 학자들을 동반하여 눈길을 끌었다.

1779

[홍국영과의 마찰로 낙향 후 복귀]

정조의 측근이었던 홍국영과의 마찰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으나, 이듬해 홍국영이 실각하자 다시 예조판서에 등용되었다.

1781

[정적들의 공격으로 다시 은거하다]

소론계 서명선 정권과 노론 김종수 등으로부터 홍국영과의 친분 및 사도세자 신원 주장을 이유로 집중 공격을 받았다.

결국 벼슬을 버리고 서울 근교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1788

[우의정 임명, 6조 개혁안 진언]

국왕의 명으로 우의정이 되었고, 왕권 확립과 민생 안정을 위한 6가지 개혁안을 왕에게 진언하며 국정 운영의 기틀을 다졌다.

그는 황극을 세울 것, 당론을 없앨 것, 의리를 밝힐 것,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백성의 어려움을 근심할 것, 권력 기강을 바로잡을 것 등 6조를 진언했다.

1790

[좌의정 독상 체제, 조선 상업의 대변혁 '신해통공' 주도]

좌의정이 되었고, 영의정과 우의정이 없는 3년간의 '독상(獨相)' 체제에서 행정 수반으로서 국정을 좌우했다.

조선 상업 발전사상 혁신적인 전환점을 가져온 '신해통공'(육의전 외 시전의 금난전권 박탈)을 실시했다.

이 시기에 이조전랑의 자대제 폐지 및 당하관 통청권의 폐지 등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다.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자 신봉 묵인을 주장했으나, 진산 사건으로 파직되었다가 1792년 좌의정으로 복직했다.

1793

[조선 최고 직책 영의정 오르다]

마침내 조선 최고 직책인 영의정이 되었다.

사도세자를 위한 단호한 토역을 주장하여 노론계의 집요한 공격을 받았으나, 정조의 굳건한 신임으로 여러 차례 파직 후에도 바로 복직했다.

[조선 기술의 꽃, 수원 화성 축조 총지휘]

영의정 재임 중 화성부 유수로 전출되어 다산 정약용과 함께 당대 최고의 과학기술과 건축 미학이 집약된 수원 화성 축조를 담당했다.

수원 화성은 정조의 개혁 의지가 담긴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1798

[만년의 사직과 정조의 극진한 예우]

수원 화성 축조를 마치고 사직했으나, 정조는 그의 사직서를 여러 번 반려하며 의자와 궤장을 하사하고 그를 판중추부사로 임명하여 국가 원로로서 정사를 보필하게 했다.

이해 9월, 정조가 은언군을 강화도에서 빼내려 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정조의 노여움으로 파직되었으나 얼마 뒤 곧 복직되었다.

1799

[조선의 충신 채제공, 80세로 서거하다]

판중추부사로 재직 중 80세의 나이로 노환으로 사망했다.

정조는 그의 충절과 공로를 기려 '문숙(文肅)'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에 안장되었으며, 3월 26일 남인계 사림장으로 장례가 거행되었다.

1801

[사후, 천주교 온건 정책으로 삭탈관직]

순조 때 '황사영 백서사건'을 계기로 천주교 탄압이 시작되면서, 그가 천주교에 온건 정책을 폈다는 이유로 남인 신서파의 수괴로 지목되어 사후 삭탈관직되었다.

그는 평생 성리학을 정학으로 보았고 천주교에는 부정적이었으나, 맹목적인 강경책보다는 교화를 우선시하는 입장이었다.

1823

[영남만인소로 명예 회복]

영남만인소 등으로 그의 억울함이 계속 주장된 결과, 마침내 관작이 회복되었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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