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목

조선의 문신, 유학자, 정치인, 학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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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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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신, 유학자, 정치인, 학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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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과거 급제 없이 우의정까지 오른 파격적인 문신이자 유학자. 예송 논쟁에서 남인의 핵심 논객으로 왕권 강화를 주장하며 서인과 대립. 독창적 미수체를 남긴 서예 대가. 백성들의 삶을 중시하고 실학의 기반을 다진 선구적인 사상가이자 단군 국조설을 주장한 진보적인 역사관을 가진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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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

[허목, 한성부 창선방에서 탄생]

조선 후기를 대표할 문신이자 유학자, 화가, 서예가, 사상가인 허목이 한성부 창선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청렴결백한 명문벌족이었으며, 증조모는 왕족, 어머니는 백호 임제의 딸이었다.

1613

[오리 이원익의 손녀와 혼인]

당시 19세였던 허목은 스승 중 한 명인 명재상 오리 이원익의 손녀와 결혼했다.

그의 가난한 행색 때문에 신부 부모의 반대가 있었으나, 이원익 대감이 허목을 '정승감'이라며 적극 찬성하여 성사된 특별한 인연이었다.

1617

[명유(名儒)들의 문하에서 수학 시작]

아버지 허교의 임지를 따라 거창으로 가서 유학자 모계 문위의 문하에 들어갔다.

이후 문위의 추천으로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학통을 계승한 한강 정구의 제자가 되어 학문을 연마하며 학문적 기틀을 다졌다.

1620

[한강 정구 타계와 학문적 계승]

스승 한강 정구가 타계하자 애사(哀詞)를 지어 바치고 그의 학통을 계승했다.

허목은 이황과 조식의 학통을 근기지방으로 가져와 '근기학파'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는 후일 남인계 실학의 뿌리가 되었다.

1624

[광주 자봉산에서 독창적인 전서체 완성]

경기도 광주군 자봉산에 들어가 은거하며 독서와 글씨에 전념, 자신만의 독특한 전서(篆書)를 완성했다.

이는 훗날 '동방 제일'이라는 찬사를 받는 '미수체'의 기틀이 되었다.

1626

[박지계 유적 제명 및 유벌 받음]

동부학당 재임 시절, 인조의 생부 추숭을 제창한 박지계 등을 '임금에게 아첨하여 예를 혼란시켰다'고 규탄하며 유적(儒籍)에서 제적하는 유벌을 가했다.

이 사건으로 인조의 눈밖에 나게 되었다.

[인조 생모 복상 문제로 왕의 눈밖에 나다]

인조의 생모 인헌왕후 구씨의 복상 문제와 관련하여, 인조가 3년복을 입으려 했으나 1년복이 채택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허목은 1년복을 주장하여 인조의 눈밖에 났다.

1628

[정원대원군 추숭 반대, 평생 과거 응시 금지 처벌]

인조의 생부 정원대원군 추숭론에 반대하며 인조가 선조의 대통을 계승했음을 주장했다.

이로 인해 인조의 눈밖에 나 왕명으로 과거 응시가 금지되는 '정거'의 벌을 받았고, 이후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

1636

[병자호란 발발과 피난]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강원도로 피난을 떠났다.

이후 선대의 고향인 연천으로 돌아왔으나, 모친과 동생들이 남쪽으로 내려가 경상남도 의령으로 가서 생활하며 학문과 저술에 매진했다.

1647

[어머니 상중에 《경례유찬》 저술 시작]

어머니 나주 임씨의 상을 당하자 상중에 예학 서적인 《경례유찬》을 저술하기 시작하여 3년 뒤 상례편을 완성했다.

이는 그의 깊은 학문적 조예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1649

[효종의 천거에도 관직 고사]

효종 즉위 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능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에 욕심이 없었던 그는 이를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50

[정릉 참봉으로 잠시 출사, 한 달 만에 사퇴]

"박학능문하며 뜻이 고상하다"는 추천으로 정릉 참봉에 제수되자 어머니의 허락을 받고 관직에 나섰으나, 1개월 만에 사직했다.

그의 관직에 대한 초연한 태도를 보여준다.

1653

[부인 전주 이씨 사망]

부인 전주 이씨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655

[심지원, 원두표의 천거로 경연관 발탁]

우의정 심지원과 병조판서 원두표 등의 천거로 윤휴와 함께 발탁되었다.

심지원은 허목과 윤휴가 재주와 행실이 뛰어나 발탁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허목은 경연관으로 임명되며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된다.

1657

[공조정랑 임명 후 '군덕정폐소' 상소하며 낙향]

공조정랑에 임명되어 출사했으나, 이내 사헌부지평에 두 차례 제수되자 사양하며 '군덕정폐소'를 올려 임금이 지닐 덕과 시정의 폐단을 지적한 뒤 향리 연천으로 돌아갔다.

1658

[사헌부지평 취임 및 경연 입시]

여러 차례 사양 끝에 사헌부지평에 취임하여 상경했고, 경연관으로서 경연에 입시하며 왕에게 학문과 도리를 가르치는 역할을 수행했다.

1659

[효종 승하와 상례 논쟁의 서막]

효종이 갑자기 붕어하자 궐하에 나아가 상례에 관한 상소를 올리며 조대비의 복상기간 문제에 대한 논란의 불씨를 지폈다.

이는 훗날 조선의 정국을 뒤흔들 예송 논쟁으로 이어진다.

[사헌부장령 임명, 북벌론 반대 상소]

사헌부장령에 임명된 후 사직 상소를 올리며 '옥궤명'을 통해 송시열 등이 주도하는 북벌론이 백성에게 고통만 가중시키는 비현실적인 정책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준비 없는 북벌이 공리공담이라고 주장했다.

1660

[제1차 예송 논쟁 발발, 3년 복 주장]

효종의 계모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을 두고 송시열 등 서인이 1년설을 주장한 반면, 허목은 효종이 왕통을 계승했으므로 장남과 다름없어 3년 복을 입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예외 없는 예의 적용을 주장하는 송시열에 맞서 왕가의 예는 일반 사대부와 같을 수 없다고 항변했다.

[제1차 예송 논쟁 패배, 삼척부사로 좌천]

제1차 예송 논쟁에서 송시열의 1년설이 채택되자, 남인 강경파를 이끌던 허목은 책임을 지고 강원도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하지만 그는 척박한 임지에서도 뛰어난 치적을 남긴다.

1661

[가뭄 속 삼척 기근 피해 최소화]

전국적인 가뭄과 흉년에도 불구하고, 미리 곡물 비축량을 확보하여 삼척과 주변 지역의 기근 피해를 최소화하는 뛰어난 행정 능력을 보였다.

[삼척 척주동해비 및 평수토찬비 건립]

삼척부사 재직 중 해일과 재난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풍속을 교화할 목적으로 '척주동해비'를 건립했다.

또한 치수 치적을 기념하는 '대한평수토찬비'도 세워, 그의 애민 정신과 실용적 면모를 보여주었다.

허목은 서인 부사들의 훼손을 예상하여 비석을 세운 근처 땅에 1기 매설하였다. 이 예언은 훗날 적중하여, 1904년에 칙사의 명에 의해 복원되었다.

1662

[《척주지》 편찬 및 기줄다리기 놀이 고안]

삼척의 향토지인 《척주지》 2권을 완성하고 간행했다.

또한 주민들의 둑 건설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기줄다리기'라는 놀이를 고안하여, 그의 창의적인 행정 능력을 보여주었다.

[삼척부사 사퇴 후 연천 낙향]

삼척부사직을 사퇴하고 경기도 연천으로 낙향, 다시 학문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며 은거 생활을 이어갔다.

1665

[서얼 허통론 주장 및 실학자 유형원 발탁]

서얼이라도 재주와 식견이 있는 자는 등용해야 한다는 '서얼 허통론'을 주장하며 인재 등용의 폭을 넓힐 것을 강조했다.

이 시기 실학자 유형원과 학술 토론 후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정계로 추천했다.

1667

[독자적 역사서 《동사》, 《청사열전》 편찬]

자신의 독자적인 역사관을 담은 《동사》와 《청사열전》을 펴냈다.

특히 《동사》에서는 단군 왕검을 민족의 시조로 규정하며 조선의 역사를 중국과 무관한 자주적인 것으로 봤다.

1674

[갑인환국으로 남인 집권, 조정 복귀]

제2차 예송 논쟁 중 현종이 갑자기 사망하고 숙종이 즉위하자, 숙종은 허목의 견해를 채택하여 서인을 실각시키고 남인이 집권하게 했다.

허목은 이조참의 겸 경연참찬관으로 조정에 복귀하며 다시 권력의 중심에 섰다.

[제2차 예송 논쟁 발발, 기년 복 주장]

효종비 인선왕후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불거지자, 허목과 윤휴는 서인의 9개월설에 맞서 인선왕후가 왕통을 이은 효종의 비이므로 1년 복을 입어야 한다는 '기년설'을 주장했다.

1675

[대사헌 특별 기용 및 송시열 사형 주장]

남인이 조정을 장악하자 대사헌에 특별 기용되었다.

그는 예송 논쟁에서 효종을 깎아내렸다며 송시열을 사형에 처할 것을 숙종에게 강경하게 주장했으나, 숙종은 이를 거부했다.

[요직 역임하며 활발한 정치 활동]

자헌대부로 승진하여 의정부 우참찬 겸 성균관 제조, 한 달 뒤 좌참찬으로 옮겼고, 이조판서까지 역임하며 활발한 정치 활동을 펼쳤다.

이 시기에도 송시열의 처형을 주장했다.

[윤휴의 체찰사부 설치와 지패법 반대]

북벌론을 적극 주장하던 윤휴가 체부(도체찰사부) 설치를 주장하자, 허목은 서인이 병권 장악을 빌미로 남인을 공격할 것이라며 반대했다.

또한 오가작통법, 지패법 등도 반대하며 실용적인 정책 노선을 보였다.

1676

[우의정 발탁, 남인 '청남'의 영수 되다]

의정부 우의정에 발탁되며 과거를 거치지 않고 삼공(三公)에 오른 유일(遺逸)한 인물이 되었다.

이 시기 송시열 처벌 문제로 허적의 온건론에 맞서 강경론을 주장하며 남인 강경파인 '청남'의 영수가 되었다.

[효명옹주 석방 주청 성공]

큰 가뭄이 발생하여 억울한 죄인들을 석방할 때, 김자점의 옥사에 연루되어 구금되었던 인조의 서녀 효명옹주의 석방을 주청하여 성사시켰다.

1677

[《경설》 간행 및 숙종에게 경연 강의]

학문적 업적인 《경설》을 간행했다.

또한 경연관으로 숙종에게 유교 경전뿐 아니라 도교, 노장 사상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학문을 강의하며 왕의 스승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호포제 폐단 지적 및 폐지 주장]

당시 국론이던 호포제(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에 대해 양반의 권위를 훼손하고 민생에 오히려 폐단을 가져올 것이라며 완강히 반대했다.

그의 끈질긴 상소로 호포제가 결국 폐지되기에 이른다.

1678

[허적·허견 부자 권력 남용 비판으로 갈등 심화]

영의정 허적의 서자 허견의 권력 남용과 부녀자 겁탈 문제를 강력히 비판하며 허적 부자에게 잘못이 있는데 왜 애꿎은 선비들이 처벌받느냐고 항의했다.

이는 남인 내 탁남-청남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우의정 사직 및 판중추부사 임명]

고령을 이유로 의정부 우의정직 사직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고, 바로 행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679

[투서의 역변 진상 규명 상소]

강화도에서 발생한 '투서의 역변'에 대해 진상을 명확히 밝힐 것을 상소하여 국정 혼란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허적 독단 비난 및 송시열 처형 재차 주장]

상경하여 송시열을 처벌하지 않는 허적의 결정을 '독단, 전횡'이라고 맹렬히 비난하며, 송시열이 효종을 '가짜 임금'으로 만들고 선왕을 모독하는 등 세 가지 죽어 마땅한 죄가 있다고 주장하며 처형을 재차 건의했다.

[윤휴에게 탄핵당하며 윤휴와 결별]

허적과의 갈등 속에 윤휴가 허목의 허물을 지탄하는 상소를 올리며 허목을 '나이 아흔에 가까워 총명과 사고가 지난날과 같지 않다'고 비판했다.

이 사건으로 허목과 윤휴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되었다.

1680

[경신환국으로 파직, 투옥 및 삭탈관직]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고 허적, 윤휴 등이 처형되자, 허목 역시 송시열 모독 및 허견의 옥사 연루 혐의로 양사의 규탄을 받아 파직되고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혹독한 형문에도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문외 출송 및 사판 삭제]

거듭된 탄핵으로 도성 밖으로 추방되는 '문외 출송'을 당하고 사판(관리 명부)에서 삭제되었다.

서인들은 계속 국문을 건의했으나 숙종이 고령을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1682

[경기도 연천 은거당에서 병사]

모든 관직을 삭탈당한 채 경기도 연천 은거당에서 저술과 후진 교육에 힘쓰다 향년 87세(일설 89세)로 생을 마감했다.

숙종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일주일간 조회를 파했다.

1689

1689.03 사후 7년

[기사환국으로 복권 및 '문정공' 시호 추증]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관작이 회복되고 '문정(文正)' 시호가 추증되었다.

숙종은 그의 저서 《미수 기언》 간행을 명하고 자손들을 등용하는 등 특별한 예우를 베풀었다.

1692

[증 영의정 추서]

사후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 추서되며, 그의 학덕과 공적이 다시 한번 인정받았다.

1694

[갑술환국으로 다시 관작 추탈]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남인이 거세되자, 허목의 관작이 다시 추탈되는 불운을 겪었다.

그의 위상은 당쟁의 부침에 따라 계속 변화했다.

1697

[관작 재복권]

다시 관작이 복권되었다.

1701

[무고의 옥으로 다시 관작 추탈]

무고의 옥으로 인해 다시 관작이 추탈되며 서인들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매도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1795

1795.10 사후 113년

[정조 시대, 최종적으로 복권]

오랜 기간 동안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추탈과 복권을 반복하다가, 정조 시대인 1795년 최종적으로 복권되며 그의 학문과 인품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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