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조선의 문신, 성리학자, 철학자, 정치인, 교육자, 사상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6:59
조선 중후기 서인 노론의 학문적 정치적 영수로 주자학을 계승하고 심화하여 조선 성리학을 집대성했습니다. 효종 현종의 스승이자 주요 대신으로서 북벌론을 주창하고 예송논쟁의 중심에 서며 격동의 시대를 보냈습니다. 만년에는 기사환국으로 제주도에 유배된 뒤 정읍에서 사사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사후 정조에 의해 송자로 추대되며 국가의 스승으로 공인되었고 그의 사상과 학문은 조선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여성 교육 노비종모법 등 당시로는 혁신적인 사회 개혁에도 깊은 관심을 보인 인물입니다.
- 성인이 점지한 아들, 우암 송시열 탄생
- 과거 급제, 관직의 첫발
- 왕실의 스승이 되다
- 청과의 대립, 북벌 사상의 시작
- 북벌론의 기수, 정계에 다시 나서다
- 윤휴와의 학문적 대립, 사문난적 규탄
- 북벌의 꿈, 효종의 죽음과 함께 잠들다
- 상복 논쟁, 국정을 뒤흔들다 (1차 예송 논쟁)
- 소현세자 복권 주장
- 북벌 계획, 왕과 신하의 마지막 밀담
- 죽음의 위협에 직면하다
-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복권 주도
- 인선왕후 복상 논쟁으로 실각 (2차 예송 논쟁)
- 숙종의 부름, 유배에서 풀려나다
- 거듭된 유배 생활
- 스승을 구명하려다 죽은 제자
- 단종과 사육신, 명예를 되찾다
- 남인 실각, 유배에서 풀려나다
- 서인,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
- 장희빈 아들 원자책봉 반대
- 명나라 의리 지킨 만동묘 설립 유지
- 원자 책봉 반대로 다시 유배
- 조선 최고 학자의 비극적 순교
- 사후 명예 회복
- 학자로서 최고의 영예, 문묘 배향
- '송자'로 추대, 국가의 스승이 되다
1607
[성인이 점지한 아들, 우암 송시열 탄생]
충청도 옥천군 외갓집에서 송갑조와 곽씨 부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태몽과 아버지의 꿈 덕분에 '성인이 주신 아들'이라는 의미의 아명 '성뢰(聖賚)'를 얻었습니다.
1614
[학문의 길에 들어선 우암]
8세에 친척 송이창의 제자가 되어 송준길과 함께 공부하며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었습니다.
이는 우암의 학문적 기틀을 다지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1618
[주자학에 눈뜨다]
인목대비 폐모론에 항거하다 낙향한 아버지 송갑조로부터 《격몽요결》 등을 배우며 주자와 율곡의 학문에 깊이 공감하고 평생 사표로 삼게 됩니다.
이는 그의 학문적 신념의 토대가 됩니다.
1625
[성리학 대가, 김장생 문하에 입문]
송준길과 함께 성리학 대가 김장생의 문하생이 되어 《근사록》, 《심경》, 《가례》 등을 배웠습니다.
같은 해 이덕사의 딸 한산 이씨와 결혼하며 가정을 이룹니다.
1631
[학문의 깊이를 더하다]
스승 김장생이 작고하자 그의 아들 김집에게서 학문을 사사받았습니다.
이때 윤선거, 윤휴 등 당대의 명망가들을 만나며 학문적 교류를 시작합니다.
1633
[과거 급제, 관직의 첫발]
사마시에 장원 급제하여 생원이 되었고,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한 달 만에 사직하며 관직에 대한 초연함을 보였습니다.
1635
[왕실의 스승이 되다]
대군사부가 되어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에게 학문을 가르치며 왕실과의 깊은 인연을 맺었습니다.
이때 윤선도도 대군사부에 임명되었습니다.
1636
[청과의 대립, 북벌 사상의 시작]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청나라에 항복을 반대했으나, 1637년 결국 화의가 성립되자 벼슬을 사직하고 낙향하여 학문 연구에 전념했습니다.
이는 그의 북벌 사상의 시작점이 됩니다.
1649
[북벌론의 기수, 정계에 다시 나서다]
효종 즉위 후 사헌부 장령에 등용되어 13조목의 '기축봉사'를 올려 '정사를 닦아 이적을 물리치라'는 북벌의 대의를 개진하며 정계에 다시 나섰습니다.
1650
[북벌 의지, 청의 압력으로 좌절]
김자점 일파의 청나라 밀고로 효종의 북벌 계획이 발각되고 청의 압력을 받자 벼슬을 사직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며 북벌 의지는 잠시 좌절됩니다.
1653
[윤휴와의 학문적 대립, 사문난적 규탄]
윤휴의 독자적인 경전 해석에 대해 황산서원과 동학사에서 학인들과 토론하며 윤휴를 '사문난적'이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이로 인해 친구 윤선거와도 관계가 소원해졌습니다.
1657
[백성 안정 우선, 북벌 준비 재촉]
찬선에 임명되었으나 고사하고 '정유봉사'를 올려 '시무 19조'를 건의했습니다.
효종이 염원하는 북벌을 위해서는 양민이 우선이고, 기강 진작과 군주의 사치 억제가 중요함을 강조했습니다.
1658
[효종의 간곡한 부름에 응답]
6년 만에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나왔고, 9월 이조판서로 승진했습니다.
10월에는 효종에게서 특별 선물로 초피(담비 가죽) 모자를 받으며 깊은 신임을 얻었습니다.
[효종의 북벌 의지, 은밀한 교감]
효종이 은밀히 불러 초구(담비 가죽으로 지은 옷)를 내려주며 북벌에 대한 의지를 암시했습니다.
그러나 송시열은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 우선이라며 효종 방식의 북벌에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습니다.
1659
[북벌의 꿈, 효종의 죽음과 함께 잠들다]
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북벌 계획은 중지되었습니다.
송시열은 효종의 죽음 앞에서 뒷일을 부탁받지 못했고, 이는 그의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상복 논쟁, 국정을 뒤흔들다 (1차 예송 논쟁)]
효종의 계모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남인(3년복)과 서인 송시열(기년복) 간에 대립이 격화되었습니다.
송시열은 주자가례에 따라 효종이 차남이므로 기년복을 주장했습니다.
[소현세자 복권 주장]
효종 즉위 초부터 송준길과 함께 소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음을 공론화하며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의 복위를 주장했습니다.
이는 서인의 당론으로 채택되었습니다.
[북벌 계획, 왕과 신하의 마지막 밀담]
효종은 국왕의 독대 금지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송시열을 불러 북벌에 대한 깊은 생각을 토로했고, 송시열은 '악대설화'로 그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북벌 논의의 처음이자 마지막 구체적 대화였습니다.
1660
[정치 공세에 지쳐 낙향]
효종의 장지를 잘못 잡았다는 남인들의 정치 공세를 받자 우찬성에서 사직하고 낙향했습니다.
그러나 현종의 간곡한 부름으로 다시 병조판서에 제수되며 관직에 복귀했습니다.
[죽음의 위협에 직면하다]
호군 윤선도는 송시열이 효종의 종통을 부정하려 한다며 사형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는 송시열의 남인에 대한 반감을 극대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661
[죄인에 대한 단호한 입장]
남인 허목 등이 흉년과 기근을 이유로 윤선도의 유배지를 옮길 것을 청했으나, 송시열과 송준길은 죄인 신분으로 불필요한 배려라며 반대하여 유배지 이전은 무산되었습니다.
1662
[명나라 멸망에 대한 비통]
금강산 여행 중 명나라 멸망 소식을 접하고 애통해했습니다.
이후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다가 1655년에 정철의 묘소 이장을 주관하기도 했습니다.
1666
[세자 교육에 다시 참여]
세자이사(世子貳師)에 임명되어 세자 교육에 다시 참여하며 왕실 교육에 대한 그의 중요성이 재확인되었습니다.
1668
[허적과의 갈등, 재차 낙향]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남인 좌의정 허적과의 갈등으로 곧 사퇴하고 낙향했습니다.
정치적 마찰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1669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복권 주도]
신덕왕후 복위를 건의하여 성사시켰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의 능침 의절 손상과 배향 결손이 당시 예관의 무지 때문이라 주장했습니다.
[남인과의 화해, 단호히 거절]
윤선거가 남인과의 화해를 청하며 윤휴, 허목 등의 등용을 권고했으나, 송시열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며 학문적 신념과 정치적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1671
[여성 교육의 선구자]
다시 우의정으로 복직하여 좌의정 허적과 마찰을 빚었으나 현종의 부탁으로 관직에 머물렀습니다.
이 시기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며느리, 딸들에게 한글 서신과 서책으로 교훈을 전했습니다.
1672
[송준길의 죽음과 좌의정 승진]
동문수학한 친구 송준길이 사망하자 3년간 상복을 입으며 깊은 애도를 표했습니다.
이후 허적의 후임으로 좌의정에 승진했습니다.
1674
[인선왕후 복상 논쟁으로 실각 (2차 예송 논쟁)]
인선왕후 사망으로 다시 자의대비 복상 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을 주장했으나,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되어 실각했습니다.
1차 복상 때 기년설 채택의 죄로 남인의 보복성 공격을 받았습니다.
[숙종의 부름, 유배에서 풀려나다]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하자 성균관 유생들이 송시열을 '덕을 쌓은 유학의 종주'라며 복직을 상소했습니다.
영중추로 복직했으나, 관직을 고사하고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1675
[거듭된 유배 생활]
남인들의 맹공으로 함경남도 덕원에 유배되었습니다.
이후 장기, 거제, 청풍 등지로 유배지가 여러 번 옮겨지는 고난의 시기를 보냅니다.
1677
[유배지에서 맞은 아내의 죽음]
유배지인 경상도 장기에서 부인 이씨의 사망 소식을 접하며 큰 슬픔을 겪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학문에 정진합니다.
1679
[스승을 구명하려다 죽은 제자]
제자 송상민이 《석곡봉사》를 올려 송시열의 처벌이 부당함을 호소하며 구명을 청했으나, 숙종은 오히려 송상민을 사사하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1680
[단종과 사육신, 명예를 되찾다]
단종 복위 여론을 조성하며 단종이 세조에게 양위했음을, 사육신은 '당대에는 난신이나 후세에는 충신'임을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그의 노력으로 단종과 사육신의 명예가 회복됩니다.
[남인 실각, 유배에서 풀려나다]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유배에서 석방되어 귀향했습니다.
중추부 영사 겸 영경연사로 기용되며 다시 정계의 중심에 섰습니다.
1683
[정계 은퇴, 기로소에 들다]
고령을 이유로 치사(致仕)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기로소에 들어갔고 봉조하가 되었습니다.
이후 청주 화양동에 은거하며 학문에만 전념합니다.
[서인,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
김익훈의 허새 옥사 날조에 대한 처벌에 송시열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윤증 등 소장파들이 실망하여 서인 내에서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습니다.
1688
[장희빈 아들 원자책봉 반대]
희빈 장씨가 숙종의 아들을 낳자 이를 원자로 정하는 것을 반대하여 숙종의 눈 밖에 났습니다.
이는 이후 그의 비극적인 최후의 단초가 됩니다.
1689
[명나라 의리 지킨 만동묘 설립 유지]
제주도로 유배 가는 길에 수제자 권상하에게 화양동에 만동묘를 세워 명나라 신종과 숭정제를 제사지낼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는 임진왜란 때의 은혜와 망국에 대한 책임을 기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원자 책봉 반대로 다시 유배]
희빈 장씨의 아들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송나라 철종의 고사를 들어 시기상조라 반대 상소를 올렸습니다.
숙종은 크게 노하여 그의 모든 관작을 박탈하고 제주도로 귀양 보냈습니다.
[조선 최고 학자의 비극적 순교]
제주도 유배에서 한양으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 이르러 금부도사가 건넨 사약을 받고 83세의 나이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의를 위한 순교로 여겼습니다.
1694
[사후 명예 회복]
갑술옥사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억울한 죽음이 신원되고 관작이 복구되었습니다.
수원, 정읍, 충주 등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건립되며 그의 명예가 회복되었습니다.
1697
[학문과 정신의 계승, 남간사 건립]
송시열, 송상민, 권상하의 위패를 모신 남간사가 건립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학문과 정신이 후대에 계승되고 기려지는 상징적인 장소가 됩니다.
1756
[학자로서 최고의 영예, 문묘 배향]
영조에 의해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송준길과 함께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습니다.
이는 학자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었습니다.
1787
['송자'로 추대, 국가의 스승이 되다]
세손 시절부터 그를 존경하던 정조에 의해 효종의 종묘에 종사되었고, 공자, 맹자, 주자에 버금가는 '송자', '송부자'로 추대되며 국가의 스승으로 공인되었습니다.
1984
[송시열 집터, 문화재로 지정]
'우암 송시열 집터'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삶의 흔적이 후대에까지 보존되는 의미 있는 일입니다.
1988
[송자대전, 현대어로 번역 출간]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이 국사편찬위원회 주도 하에 한글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방대한 학문 세계를 대중이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7
[우암 학문 연구의 중심, 연구소 설립]
충북대학교에 우암연구소가 설립되어 송시열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체계적이고 심층적인 연구를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암 정신의 현대적 계승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