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
성리학자, 문신, 사상가, 정치가, 시인, 교육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4- 04:50:42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영남학파를 이끈 거목입니다. 이기이원론을 통해 주자학을 심화시켰으며 기대승과의 사단칠정 논쟁은 한국 유학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했습니다. 청렴하고 겸손한 인품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도산서원을 세워 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000원권 지폐의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1502
[이황 출생]
조선 중기의 대표적 성리학자이자 문신인 이황이 경상도 예안현(현 경북 안동시 도산면)에서 진사 이식과 춘천 박씨 부부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어머니는 공자가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고 전해진다.
이황은 1502년 1월 13일(음력 1501년 11월 25일) 조선 경상도 예안현(현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계리에서 진사 이식과 춘천 박씨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식이 40세 때 진사시에 합격한 해에 어머니가 '공자가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황을 낳았다고 하여 대문을 성림문(聖臨門)이라 불렀다.
이황의 아버지는 이황이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마흔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황은 홀어머니 춘천 박씨 밑에서 자라야 했다. 월, 일은 불확실하다.
1508
[형의 상처에 공감하며 통곡]
이황이 8세 때 중형 이징이 칼에 손을 베였는데, 다른 형제들은 울지 않았으나 이황만 이를 보고 통곡하며 아픔을 공감했다.
1508년(중종 3) 8세 때 이황의 중형 이징이 칼에 손을 베였다. 다른 형제들 중 그만이 이를 보고 통곡했는데, 어머니가 손을 베인 형은 울지 않는데 네가 어째서 우느냐고 묻자 이황은 "어찌 저렇게 피가 나는데 아프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1512
[숙부 이우에게 논어 수학]
12세에 숙부 송재 이우로부터 『논어』를 배우며 학문의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다. 숙부는 바쁜 와중에도 조카와 동리 청년들을 가르쳤다.
1512년(중종 7) 12세에 숙부 송재 이우로부터 『논어』를 배웠다. 송재 이우는 당시 관직에 있었는데, 바쁜 일과 중에도 친히 조카 퇴계를 비롯한 동리 청년들을 가르쳤다.
1514
[독서에 몰두, 도연명과 주자 흠모]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는 것을 즐겼으며, 특히 도연명의 시를 사랑하고 그 인품을 흠모하여 도연명과 주자를 인생의 사표로 삼았다.
1514년(중종 9)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특히 도연명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여, 도연명과 주자를 인생의 사표로 삼았다.
1520
[『주역』 공부로 건강 악화]
20세 무렵부터 침식을 잊고 밤낮으로 독서하며 《주역》 공부에 몰두한 결과 건강을 해쳐 이후 잔병치레에 시달렸다.
1520년(중종 15) 20세 무렵부터 침식을 잊고 밤낮으로 독서를 하고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병을 얻었는데, 이후부터 그는 잔병치레에 시달렸다.
1527
[향시 진사시·생원시 초시 합격]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그해 향시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했다.
1527년(중종 22) 향시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갔다.
1528
[생원시 급제 및 첫 부인 허씨 사망]
소과인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나, 그해 28세 때 부인 허씨가 둘째 아들을 낳고 한 달 만에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1528년(중종 23)에 소과인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퇴계가 28세 때, 부인 허씨는 둘째 아들을 낳고 1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비록 아내는 죽었으나 사위로서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홀로 된 장모를 도와 그가 죽을 때까지 처가집의 대소사를 끝까지 챙겼다.
1530
[둘째 부인 권씨와 재혼]
예안으로 유배된 권질의 부탁을 받아 정신질환이 있던 그의 딸과 재혼하였고, 이후 그녀를 아끼고 존중하며 생활했다.
권질은 1506년 중종반정 이후 해배되었으나, 기묘사화 후 다시 무고로 인한 옥사인 무옥으로 예안 땅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평소 퇴계의 사람됨을 눈여겨 본 후 퇴계를 불러 집안의 참극으로 인하지 않은 충격으로 정신이 혼미한 자신의 딸을 의탁하였다. 그는 심사숙고 후 예를 표하고 어머니의 윤허를 받고 혼례를 갖출 테니 심려 마시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권질이 예안으로 유배된 지 9년이 되는 1530년에 권씨 부인을 맞이하였다.
1533
[김인후와 교유, 《심경부주》 입수 및 김안국 만남]
성균관에서 하서 김인후와 학문적 교류를 하며 《심경부주》를 입수해 심취했고, 귀향 도중 김안국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1533년(중종 28) 성균관에서 하서 김인후와 더불어 서로 교유하며 뜻이 맞아 끊임없이 토론하고 연구하며 서로 도와 학문과 덕을 닦았다. 이때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또한 노수신과도 만나 친분을 쌓았는데, 이황은 조광조의 직계 제자는 아니었으나 노수신은 조광조의 제자인 이연경의 문인이었으므로 그를 통해 조광조의 영향을 받게 된다. 1533년 귀향 도중 김안국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1534
1534년(중종 29)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539
[홍문관 수찬 및 사가독서]
홍문관 수찬이 되었고, 같은 해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관원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하게 하는 제도)를 하였다.
1539년(중종 34) 홍문관수찬이 되었으며, 동년 곧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 하였다.
1540
1540년(중종 35)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는 등 승진을 거듭하였다.
1543
[《주자대전》 입수]
오랫동안 수소문 끝에 송나라 주자의 저서인 《주자대전》을 입수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성리학 연구에 더욱 깊이 몰두했다.
그는 송나라의 주자의 문서인 주자대전을 입수하려고 오랫동안 노력을 기울였다. 각처를 수소문한 끝에 1543년(중종 38) 그는 드디어 주자대전을 입수하였다. 그는 이언적이 쓴 저서들, 조광조가 쓴 저서들을 모두 탐독, 독파하였는데 이언적의 저서가 많고, 사서육경과 주자에 대한 원문과 그에 대한 해석, 주해와 이언적 자신의 생각, 견해를 적은 것을 읽고 크게 칭송하였다.
중종 말년인 1543년(중종 38)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8월에 부모 봉양의 걸양을 청하여 먼저 고향으로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보냈다.
[성균관 사성 사직 및 고향 낙향]
성균관 사성으로 임명되었으나, 성묘를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 연마에 힘썼다.
1543년(중종 38) 10월에 성균관 사성이 되었으나, 성묘를 핑계삼아 사직하고 고향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다.
1545
[홍문관 전한 임명 및 일본 강화 상소]
조정에서 다시 불러 홍문관 전한이 되었고, 일본과의 강화를 통해 변경을 방어할 것을 상소했다.
조정에서 다시 불러 1545년(인종 원년) 6월 홍문관 전한이 되었다. 바로 일본과 강화를 하고 변경을 방어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을사사화 연루로 파직 및 복직]
을사사화와 관련하여 이기에게 탄핵당해 삭탈관직 되었으나, 곧바로 이기가 죄가 없다고 변호하여 복관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10월 이기로부터 을사사화의 역신인 김저와 같은 무리라 탄핵 당하여 삭탈관직 되었으나, 곧바로 10월 말 이기가 죄가 없다고 하여 다시 복관되었다. 그 뒤 사복시 정 겸 승문원 참교가 되었다.
1546
[둘째 부인 권씨 및 아이 사망]
47세 되던 해, 둘째 부인 권씨가 난산으로 사망하고 태어난 아이도 며칠 후 죽는 불행을 겪었다. 이후 재혼하지 않고 기녀 두향 외에는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1546년(명종 원년) 47세 때, 권씨 부인과 혼인한지 16년이 되는 해였는데, 부인이 출산 중 난산으로 사망하였고 태어난 아이도 며칠 후 죽고 말았다. 권씨 부인이 사망한 후에도 전처 소생의 두 아들은 평소 친어머니처럼 깍듯이 예우할 것을 당부한 아버지 퇴계의 말대로 계모 권씨 무덤이 있던 산기슭에 노막을 지어 시묘살이를 하였고, 퇴계는 그 건너편에 암자를 짓고 1년여를 기거하였다.
[명나라 자문 문제로 탄핵 위기]
지제교로 있을 때 명나라에 보내는 자문을 잘못 지어 사은사의 탄핵을 당했으나, 대제학 신광한의 변호로 처벌을 모면했다.
1546년(명종 원년)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그해 3월 지제교(知製敎)로 있을 때 명나라에 보내는 자문을 잘못 지어 사은사 남세건의 탄핵을 당하였다. 대제학 신광한의 변호로 처벌을 모면하였다.
1546년(명종 원년) 8월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로 임명되었다.
1547
1547년(명종 2) 7월 안동 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부사)로 부임했다가, 1개월 만에 홍문관 부응교로 임명되어 다시 상경하였다.
1547년(명종 2)에는 안동대도호부사, 홍문관 부응교, 의빈부 경력 등으로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토계(兎溪) 인근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일찍 그가 서울에 있을 때 《주자전서》를 읽고 여기 몰두하여 성리학을 연구하여, 마침내 대성하여 '동방의 주자', '이부자'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배웠다.
1548
[단양군수 부임, 기녀 두향과의 만남]
충청도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기녀 두향을 만났는데, 그녀는 이황이 떠난 후에도 그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
1548년(명종 3) 1월 충청도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기녀 두향을 만났다.
[둘째 아들 요절 및 며느리 개가 허용]
이황의 둘째 아들이 일찍 요절하자, 정혼한 지 1년도 안 된 며느리에게 개가를 허용하고 친정으로 돌려보내는 자애로운 모습을 보였다.
1548년(명종 3) 2월 이황의 둘째 아들이 일찍 요절하였다. 그는 둘째 며느리가 정혼한지 1년도 안되어 남편이 죽고 청상과부가 되자, 며느리의 개가를 허용하고 남의 눈을 피해 친정으로 몰래 돌려보낸다.
[풍기군수로 전임 및 소수서원 사액 추진]
형 이해가 충청도 관찰사로 발령되자, 상피제에 따라 경상도 풍기군수로 옮겼다. 풍기군수 시절 서원을 지원하고 소수서원 사액을 실현시켰다.
단양군수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형 이해가 충청도 관찰사로 발령받자, 상피제(相避制)에 따라 경상도 풍기군수로 옮겼다. 풍기군수 시절에 서원들을 지원하였으며, 소수서원 사액을 실현시켰다. 지방관으로 활동하면서 향약과 주자가례의 장려와 보급에 치중했고, 퇴청 후에는 문하생을 교육하여 성리학자들을 양성했다.
1549
1549년 풍기군수를 사퇴한 직후부터 주자대전을 읽기 시작해서 완독하였다.
1550
형은 온계 이해로 마찬가지로 학자였으나 구수담의 일파로 연루되어 유배가는 도중 병사하였다.
1552
[홍문관 교리 임명 및 불교 배척 건의]
다시 내직으로 소환되어 홍문관 교리, 시독관이 되었으며,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적 왕도 정치를 확립할 것을 건의했다.
1552년(명종 7년) 다시 내직으로 소환되어 홍문관 교리가 되었고, 시독관이 되었다. 이어 불교를 배척할 것을 건의하였다.
1552년(명종 7) 5월 사헌부집의에 임명되었다.
1552년(명종 7) 6월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에 임명되었다.
1552년(명종 7) 7월 성균 대사성 지제교(成均大司成知製敎)에 임명되었다.
1552년(명종 7) 11월 사직하였다.
1553
[대사성 사직 및 서얼 허통 지지]
행성균관 사예를 거쳐 다시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했고, 서얼 방금법 허용 논의에 참석하여 인재 채용 시 귀천을 두지 말아야 한다며 서얼 허통을 지지했다.
1553년 행성균관 사예를 거쳐 다시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사직상소를 올렸다. 이후 성균관대사성·부제학·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553년(명종 8) 행상호군으로 빈전에서 서얼 방금법 허용 논의에 참석하였다. 이때 그는 서얼 허통을 지지하였는데 그는 일부 서자들이 적장자를 무시할 수 있음을 언급하였으나 서자라고 해도 실력이 있는 자는 채용해야 된다며 인재 채용시 귀천을 두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1554
1554년(명종 9) 5월 형조 참의에 임명되어 상경하였다.
1554년(명종 9) 6월 병조 참의를 거쳤다.
1554년(명종 9) 12월 첨지중추부사로 전임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555
[상호군 임명 및 옷 사양]
상호군에 임명되어 한성에 왔을 때, 가난하여 의복이 없었으나 판서 조사수가 준 옷을 사양하며 청렴함을 보였다.
1555년(명종 10) 2월 다시 상호군에 임명되어 한성에 왔는데, 상경할 적에 가난하여 의복과 관대(冠帶)가 없으므로 판서 조사수가 겉옷 1벌을 주었지만 사양하고 옷을 받지 않았다.
1555년(명종 10) 5월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자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556
1556년(명종 11) 5월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556년(명종 11) 8월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557
[도산서당 건립 착수]
앞서 풍기 군수의 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왔을 때 한서암을 짓고, 1557년에는 도산서당을 세우기 시작했다.
앞서 풍기 군수의 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왔을 때 그는 한서암을 짓고 1557년에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세우기 시작했다.
1558
[대사성, 공조참판 고사 및 충무위상호군직 임명]
성균관 대사성과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고사했고, 한직인 충무위상호군직에 임명되었다.
1558년(명종 13)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고사하였고, 한직인 충무위상호군직에 임명되었다.
1559
[공조참판 상경 및 사직, 동지중추부사 임명 후 낙향]
여러 번 권고 끝에 공조참판 제수로 상경하였으나, 정사를 올리고 사직했으며,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된 후 다시 낙향했다.
1559년(명종 14) 다시 공조참판에 제수하여 불렀으나 올라오지 않았고, 여러번 그에게 올라올 것을 권고하여 그해 7월 상경하여 정사를 올려 사직하였다. 바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고 낙향하였다.
1560
[도산서당 건립 및 학문 연구 전념]
고향 토계동에 도산서당을 짓고 아호를 도옹으로 고쳤으며, 이후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며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1560년(명종 15) 고향 토계동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으로 고쳤으며, 이후 7년간 주로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문하생들이 찾아와 이를 지도하였다.
1565
1565년(명종 20) 4월 다시 동지중추부사직을 사직하였으나 왕이 반려하였다.
1566
1566년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자 왕이 반려하였다.
1567
[선왕 행장수찬청당상경 및 예조판서 임명, 질병으로 귀향]
선조 즉위 후 선왕의 행장을 짓는 행장수찬청당상경 및 예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질병으로 인해 부득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명종이 갑자기 죽고 선조가 즉위하여 그를 선왕의 행장을 짓는 행장수찬청당상경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으나 질병으로 부득이 귀향하게 되었다.
[주요 관직 역임 및 《무진육조소》, 《성학십도》 저술]
명종 말년 예조 판서, 대제학, 판중추 겸 지경연사 등을 역임하며 《무진육조소》와 성리학을 쉽게 서술한 《성학십도》를 지어 임금에게 올렸다.
명종 말에 예조 판서가 되고 대제학·판중추 겸 지경연사 등이 되어 유명한 《무진육조소》와 《성학십도》를 지어 임금께 올리니 이는 국은에 보답하고 학문을 개발하기 위한 만년의 대표작이다.
1568
1568년(선조 원년) 1월 행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의를 표하였다.
1568년(선조 원년) 7월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어 상경하였다.
1569
[이조 판서 임명 후 사직, 고향 복귀]
이조 판서에 임명되어 상경했으나, 여러 번 사직 상소를 올린 끝에 수리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1569년(선조 2) 이조 판서가 되어 상경하였으나 여러번 사직 상소를 올린 끝에, 사직소가 수리되어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1571
[사후 시호 및 관직 추증, 문묘 종사]
사후 '문순공'의 시호가 내려지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등이 추증되었으며, 1610년에는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어 한국 유학의 거목으로 존경받았다.
그 뒤 문순공의 시호를 내리고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춘추관사를 추증하였으며, 1610년(광해군 2) 성균관 문묘(文廟)에 종사되었다. 안동의 도산서원을 비롯한 전국 40여 개 서원에서 제사하고 있다.
[이황 사망]
70세의 나이로 고향인 안동 토계동에서 의관을 정제하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파하고 조회를 하지 않을 정도로 애도했다.
평생 겸손함을 강조하며 청렴하게 살았으며, 생각이나 헤아림을 멈춘 상태에서 마음을 고요하게 간직하는 사색과 '경'(敬)을 중시했다. 만년에 병을 핑계로 낙향, 1570년(선조 3) 음력 12월 8일 고향인 안동 토계동에서 의관을 정제하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향년 70세였다. 그가 죽자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파하고 조회를 하지 않았다. 사후 상례와 석물을 화려하게 하지 말고 작은 비석이나 하나 세우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산소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쓴 작은 비석이 하나 세워졌다.
[기생 두향의 투신 순사]
이황의 부음을 들은 기생 두향은 충주 강선대에서 충주호로 몸을 던져 절개를 지켰다. 이후 이황 후손들은 두향의 묘소를 찾아 시제를 드린다.
1571년(선조 4) 그의 부음을 들은 기생 두향은 충주 강선대에서 충주호로 몸을 던져 투신했다. 그 뒤 매년 10월이면 이황의 후손들은 이황에 대한 절개를 지켜 순사한 두향의 묘소를 찾아 벌초하고 시제를 드린다 한다.
1592
1592년(선조 25년)부터 발생한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지역의 서적과 도공 등이 상당수 약탈당했는데, 이때 이황의 저서가 상당수 약탈당하였다. 경상북도의 해안가를 통해 유출된 이황의 서적, 서한들은 후일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18세기 미국에 의해 서구 문물이 강제로 유입되기 전까지 일본에는 조선에서 전래된 이황 계열의 성리학이 막부 세력의 사상적 기반이 되어 유행하였다.
1968
1968년 대통령 박정희의 특별 지시로 1천원 권의 첫 주인공으로 도안이 완성되었다. 이후 30년간 천원권 지폐의 도안 인물로 계속 유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