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

조선시대 문신, 학자, 재상, 저술가

num_of_likes 209

최근 수정 시각 : 2026-01-17- 06:14:34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류성룡
연혁 피인용 수 2
조선시대 문신, 학자, 재상, 저술가
report
Edit

-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으로 전란을 총지휘하며 나라를 재건하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 이순신 장군을 천거한 주요 인물이며 그가 남긴 국보 징비록은 난중의 기록과 교훈을 담아 후세에 귀감이 되었습니다. - 청렴한 삶과 뛰어난 학문으로 조선의 5대 명재상 중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연관 연혁
주요사건만
최신순

1542

[신동의 탄생]

조선 중기 문신 류성룡이 경상도 의성 외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3살 때부터 유교 경전인 '대학'을 읽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 불리며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이는 훗날 그의 학문적 깊이와 정치적 역량의 기반이 됩니다.

1564

[과거의 첫걸음]

명종 시대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며 관료 생활을 위한 첫 관문을 통과했습니다.

이 합격은 그가 본격적으로 조선의 관리로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566

[한원 입성과 관직 시작]

별시 문과에 급제하며 한원(翰苑)에 입성했고, 이후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첫 관직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학문적 역량과 능력을 국가적으로 인정받은 순간이자, 본격적인 관료의 길에 들어선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1569

[명나라에서 인정받은 학자]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습니다.

이 방문에서 그는 명나라의 지식인들로부터 '서애 선생(西厓先生)'이라 불리며 깊은 존경을 받았는데, 이는 그의 학문적 명성이 조선을 넘어 국제적으로도 인정받기 시작한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1575

[붕당 정치의 소용돌이, 동인 합류]

조선 정치의 붕당 시대를 연 '을해당론'이 발생하며 동인과 서인으로 정치 세력이 분당되자, 그는 스승 이황의 제자였음에도 서인이 아닌 동인에 가담했습니다.

이 선택은 그의 정치적 노선과 신념을 확고히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1589

[정여립 사건과 남인의 형성]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가 발생하면서, 평소 정여립과 두터운 친분이 있던 류성룡의 이름이 죄인의 글에 나타나 탄핵 위기에 놓였습니다.

이는 동인 내부의 강경파(북인)와 온건파(남인)가 갈라서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그는 강경파와 결별하며 남인을 형성했습니다.

유생 정암수를 비롯한 50여 명이 그와 이산해 등을 정여립과 한몸이라며 죄를 줄 것을 상소했습니다. 하지만 선조는 크게 노하여 오히려 류성룡과 이산해를 위로하고 상소한 자들에게 벌을 내리려 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철의 처리 문제를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격화되며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완전히 갈라지게 됩니다.

1590

[고위 관직으로의 고속 승진]

예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차례로 거쳐 우의정에 올랐고, 조선 왕실의 계보 문제를 해결한 '종계변무'를 성공적으로 성사시킨 공로로 광국 공신 3등에 책록되며 풍원 부원군에 봉해졌습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던 시기였습니다.

1591

1591 1해당 사건의 피인용 횟수를 나타냅니다. 49세

[임진왜란 대비와 이순신 천거의 선견지명]

선조의 명장 천거 요청에 권율, 신충원과 함께 이순신을 천거했습니다.

이 결정은 훗날 임진왜란의 해상 전세를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왜가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중국에 미리 보고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왜란 발발 후 명나라가 조선을 의심하는 것을 막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연관사건

임진왜란 발발 1년 전 통신사가 파견되었을 때, 정사 황윤길은 왜의 침입을 경고했으나 부사 김성일은 반대했습니다. 당시 좌의정이었던 류성룡은 당파심에 김성일의 편을 들어 왜란 대비가 중단되는 아쉬운 판단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1592

[임진왜란 발발과 혼란 속 리더십]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몽진길에 올랐습니다.

영의정 이산해가 파직된 후 그 자리에 거론되기도 했으나, 김성일의 의견에 동조하여 왜란 대비를 소홀히 한 책임을 물어 좌의정에서도 철직당했습니다.

혼란 속에서도 그는 이일 장군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 철릭을 입혀주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1593

[전란 극복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

관서 도체찰사(關西都體察使)가 되어 안주에 주둔하며 백성들을 보살피고 군량을 준비하는 등 전란 수습에 힘썼습니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에게 평양 지도를 제공하며 전투의 편의를 돕는 등 조선의 전황 극복에 적극적으로 기여했습니다.

1597

[이순신 탄핵, 엇갈린 기록]

이순신 장군이 역모로 탄핵당했을 때, 류성룡은 자신이 저술한 '징비록'에는 이순신을 변호했다고 기록했지만, '선조실록'에는 그가 이순신 탄핵에 동조했음이 기록되어 있어 역사적 논란을 남깁니다.

당시 이순신을 옹호한 것은 이원익과 정탁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자신이 선조 앞에서 이순신을 직접 변호하고 사직 상소를 10여 차례 올렸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선조실록의 기록은 그와 다른 내용을 담고 있어, 당시 상황에 대한 역사적 해석의 여지를 보여줍니다. 살아남은 이순신은 복직 후 명량해전에서 대활약을 펼치며 조선을 다시 구원하게 됩니다.

1598

[영의정 재임과 비극적 퇴장]

다시 영의정에 보직되었으나, 명나라 장수 정응태가 조선이 왜와 공모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무고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의 진상을 해명하는 데 소극적이라는 북인들의 탄핵을 받아 결국 관직을 삭탈당하며 그의 정치 생명이 막을 내렸습니다.

1600

[낙향과 국보 '징비록' 집필]

관직 삭탈 후 고향인 안동에 낙향하여 임진왜란의 경험과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한 저서인 국보 '징비록' 집필에 몰두했습니다.

2년 만에 복권되어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친형과 모친, 아들 등 가족들의 연이은 죽음이라는 개인적인 비극을 겪으며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겪으면서 류성룡이 느낀 후회와 교훈을 담은 기록으로, 당시 조선의 상황과 그의 고뇌가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이 책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일본 문학에도 영향을 미쳤을 정도로 가치가 높습니다.

1607

[위대한 생애의 마무리]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류성룡이 66세(만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사당은 병산서원 뒤에 세워졌고, 퇴계 이황의 묘에 함께 모셔져 후세에 영원히 추모되고 있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았던 '청백리'로 기억됩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댓글 게시판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