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
조선의 문신, 사상가, 성리학자, 정치가, 개혁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6:56
* 조선 중기 개혁을 꿈꾼 사림파의 핵심 정치가. * 중종의 전폭적 지지 아래 최초의 현량과 실시 소격서 철폐 향약 전국적 보급 등 급진 개혁 추진. * 특히 부당한 정국공신 76명 위훈 삭제로 부패 척결에 앞장서며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삼. * 성리학적 왕도정치 실현에 매진했으나 결국 기묘사화로 37세 젊은 나이에 비운의 최후를 맞이. * 사후 복권되어 조선 사림의 정신적 스승으로 추앙받으며 도학 정치의 선구자로 평가됨.
- 조광조, 한성에서 태어나다
- 유배 중이던 스승 김굉필과의 운명적 만남
- 진사시 급제 및 성균관 입학
- **중종 친시 알성문과 을과 급제**
- 사간원 정언 임명 및 논란의 파격 상소
- **향약 전국 실시를 이끌다**
- **과거 급제 30개월 만에 당상관 승진**
- 조선 최고 사정기관 수장, 대사헌에 오르다
- **인재 등용의 새 장을 연 현량과 최초 실시**
- **조선 최대 규모의 위훈 삭제 단행**
- **기묘사화 발발: 조광조 개혁의 좌절**
- **화순 능주 유배지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다**
- 김인후, 조광조 신원 복원 최초 건의
- 인종 즉위 후 조광조 공식 사면 복권
- **선조 시대, 영의정 증직 및 '문정' 시호 추증**
-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다: 동방 5현의 반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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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한성에서 태어나다]
태조 이성계의 생질 조온의 4대손으로, 감찰 조원강의 아들로 한성에서 태어났습니다.
개국공신 가문이었으나, 훗날 김굉필과의 만남으로 그의 인생은 크게 달라집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엄격한 훈육을 받고 자랐으며, 학문에 큰 뜻을 두어 출세만을 위한 글쓰기를 거부했습니다. 이로 인해 친척들에게 꾸짖음을 듣기도 했으나, 학문 욕구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1500
[유배 중이던 스승 김굉필과의 운명적 만남]
아버지 조원강이 희천 어천도찰방으로 부임하자 따라갔다가, 무오사화로 유배 중이던 성리학자 김굉필을 만나 사제지간의 연을 맺었습니다.
김굉필은 어린 조광조의 영특함을 알아보았고, 이때부터 조광조는 김종직의 학통을 잇는 사림파의 일원이 됩니다.
김굉필과의 만남은 조광조의 삶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됩니다. 이후 김굉필의 가르침을 받아 《소학》, 《근사록》 등을 토대로 경전을 연구하며 학문에 정진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실현하기 위해 평생 노력했으며, 당시 사화 직후라 '광인', '화태'라 조롱받기도 했으나 굴하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1504
[스승 김굉필의 비극적 죽음]
스승 김굉필이 갑자사화로 사사되면서 조광조는 스승과 이별하게 됩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이를 실현하려 노력했으나, 연이은 사화로 인해 주변 사람들은 김굉필의 제자인 그를 기피하고 조롱했습니다.
김굉필이 사사된 후에도 조광조는 학문에 더욱 매진하며 이러한 비난에도 개의치 않고 성리학 연구에만 전념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공자, 주자, 정몽주를 인생의 모델로 삼고, 흐트러짐 없는 예의범절을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1507
[반정공신 비방 사건 연루]
박경과 문서귀 등이 반정공신인 유자광, 박원종 등을 비방한 일에 연루되어 공초를 받았으나, 다행히 풀려났습니다.
이 시기에 과거 급제 전 선배 사림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학문을 논했습니다.
특히 남곤과의 인연이 있었는데, 조광조의 어머니는 남곤의 차갑고 모진 성품을 경고하며 아들에게 그를 멀리하라고 충고하고 이사까지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1510
[진사시 급제 및 성균관 입학]
소과인 진사시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성균관에 입학했습니다.
성균관에서 《중용》을 강의하며 학문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며, 유숭조 문하에서도 공부했습니다.
이듬해 성균관 사경 황여헌의 천거를 받았고,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관직에 천거하는 과정에서 동료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았으나, 당시 반대 여론으로 인해 관직에 나가지는 못했습니다.
1515
[관직에 첫발을 내딛다]
학행으로 참봉직에 낙점된 후, 이조판서 안당과 남곤 등의 추천으로 선무랑에 발탁되었습니다.
그의 거침없는 논리와 열정은 많은 관료들의 탄복을 자아냈고, 곧 조지서 사지에 임명되었습니다.
관직에 오른 뒤에도 학문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기방 출입을 자제하며 청렴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급제 직후 성균관 전적 임명]
알성문과 급제 직후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며 본격적인 관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사헌부 감찰을 거쳤습니다.
짧은 기간 내에 고속 승진을 거듭하며 중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중종 친시 알성문과 을과 급제]
마침 그해 8월 22일 치러진 알성시에서 중종이 직접 출제한 '어려운 시대를 헤치고 이상적인 정치를 할 방법'이라는 질문에 '성실하게 도를 밝히고 항상 삼가는 태도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답안을 제출, 중종을 감격시켜 을과로 급제했습니다.
이는 그가 왕에게 직접 자신의 정치 철학을 피력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그의 답안은 시험관들마저 탄복하게 했으며, 중종은 그를 친히 만나 세상을 구할 방법을 물었습니다. 조광조는 임금이 솔선수범하여 도덕정치를 펼쳐야 함을 강조하며 왕도정치와 지치주의 실현을 역설했습니다.
[사간원 정언 임명 및 논란의 파격 상소]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자마자 이튿날 정국을 뒤흔드는 파격 상소를 올렸습니다.
왕에게 자신을 파직시키거나 사헌부, 사간원 관리 모두를 파직시킬 것을 주장하며, 언로 탄압을 비판했습니다.
이 논란은 3개월간 이어졌으며, 결국 중종이 조광조의 손을 들어주면서 그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는 젊은 나이에 사림의 영수로 떠올랐습니다.
1516
[언로 논란의 마무리와 위상 강화]
1515년 11월에 시작된 언로 탄압에 대한 격한 공방전이 3개월 만에 마무리되며, 조광조의 주장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로써 그는 젊은 나이에 사림의 영수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게 됩니다.
이후 사간원 정언 재직 중 단경왕후 복권 주장을 펴며, 이를 탄압하는 이행을 파직시키는 등 언관으로서의 강직함을 보였습니다.
[홍문관 부수찬 및 수찬 임명]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가 바로 수찬으로 승진했습니다.
이후 검토관으로 경연에 참여하며 왕의 자문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조와 예조의 천거로 천문이습관이 되는 등 빠르게 관직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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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약 전국 실시를 이끌다]
홍문관 교리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을 겸직하며 지방 향촌의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여씨향약을 조선 8도에 실시할 것을 상소하여 중종의 윤허를 받았습니다.
조선 최초로 향약이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전한에 임명되었습니다.
향약 보급은 성리학적 질서와 사림파의 지방 입지를 강화하는 중요한 개혁 조치였습니다. 그의 노력으로 사회 전반에 유교적 도덕 이념이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급제 30개월 만에 당상관 승진]
과거 급제 후 30개월도 채 되지 않아 직제학으로 파격 승진했습니다.
그의 곧은 신념과 인물 판단력으로 공경 이하 모두가 그를 외경하거나 미워하는 등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 어진 선비들이 요직에 앉아 오래된 폐단을 개혁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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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 부승지 임명 및 소격서 폐지 주장]
승정원 부승지에 임명되었고, 이후 부제학을 거치며 성리학 이념에 어긋나는 미신 타파를 주장했습니다.
특히 국가기관인 소격서를 미신으로 규정하며 폐지를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소격서는 해와 달, 별 등에 제사 지내는 도교적 기관으로, 유학자 정치를 구현하려는 조광조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격서 폐지를 관철시키려 노력했습니다.
[조선 최고 사정기관 수장, 대사헌에 오르다]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세자부빈객을 겸임했습니다.
당시 요직에 어진 선비들이 뽑혀 협력하며 과거 성종 때의 법을 실행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성균관 동지사를 겸임하며 성균관으로부터 해임하지 말 것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인재 등용의 새 장을 연 현량과 최초 실시]
대사헌으로서 재행(材行)을 겸비한 사림 선비들을 추천으로 뽑는 천거시취제인 현량과를 조선 역사상 최초로 실시했습니다.
김식, 안처겸 등 28명의 신진 사류를 뽑아 홍문관, 사간원 등 요직에 등용하며 정계 진출의 길을 활짝 열었습니다.
이는 기존의 음서 제도나 인맥 위주의 인재 등용 방식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되었으며, 오직 실력과 학문적 소양을 기준으로 인재를 선발하려는 조광조의 의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또한 성리학 이론서와 기본 서적을 무료로 인쇄하여 전국에 보급하고, 아녀자들을 위한 한글 번역본까지 배포하는 등 성리학 이념 확산에 힘썼습니다.
1519
이후 9일 만에 복귀했으나 낙마 사고를 당해 홍문관 부제학으로 전임되었고, 다시 동지성균관사 겸직을 맡았으나 사직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재차 사헌부 대사헌 임명]
사헌부 대사헌에 다시 임명되며 개혁 추진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8월에는 원자보양관을 겸임했습니다.
이 시기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는 성리학적 철인 군주주의를 내세우며 기성 귀족들을 '소인'이라 지목하는 등 급진적인 정치를 펼치려 했습니다.
[조선 최대 규모의 위훈 삭제 단행]
대사간 이성동 등과 함께 중종반정(1506년) 때 정국공신 105명 중 공로가 의심스러운 76명을 가짜 공신으로 지목하고 훈적 박탈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조선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위훈 삭제를 단행하여 공신전과 노비를 몰수했습니다.
이는 반정공신들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조광조는 유자광과 심정 등 부패한 반정 공신들을 숙청해야 왕도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때 가까웠던 남곤까지 '소인배'로 비판하며 불만 세력을 양산했고, 이는 훈구파의 반격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기묘사화 발발: 조광조 개혁의 좌절]
위훈 삭제에 원한을 품은 홍경주, 남곤, 심정 등 훈구파가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나뭇잎 모략을 꾸며 조광조 일파가 역모를 꾀한다고 중종에게 고변했습니다.
이 모략이 성공하며 결국 조광조를 위시한 사림파 핵심 인물들이 체포되고 투옥되었습니다.
이는 조광조가 추진하던 개혁이 좌절되는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중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조광조를 키웠으나, 사림파의 급진적인 개혁과 강한 간언에 피로를 느꼈고, 훈구파의 압력과 모략에 넘어가 조광조를 버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조광조는 옥중에서 '임금을 어버이같이 사랑하고, 나라 걱정을 내 집같이 했다'며 마지막까지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화순 능주 유배지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다]
옥에 갇힌 조광조는 유배형이 내려져 전남 화순 능주로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심정과 남곤, 홍경주가 그를 살려두려 하지 않아 결국 중종의 명으로 사약을 받았습니다.
금부도사가 도착하자 한성부를 향해 큰절 세 번을 올린 뒤 절명시를 남기고 사약을 마셨습니다.
그의 나이 향년 37세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동지인 김식, 김정 등의 자결과 처형으로 이어졌습니다. 유배지에서는 학포 양팽손의 위로를 받으며 학문 강의를 이어갔으나, 개혁가로서의 꿈을 펼치지 못하고 비운의 삶을 마감했습니다. 백성들은 그의 죽음과 이듬해 가뭄을 연결시키며 나라를 걱정했고, 조정을 향한 비난 여론이 일자 함구령이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1521
[조광조 관련자 숙청, 신사무옥 발생]
조광조, 김식 등이 사사된 후 김종직 학파 내에서 남곤, 김전 등을 배신자로 인식하고 비판했습니다.
성균관 학유 안처겸 형제가 심정, 홍경주 등 훈구파를 제거하려 모의했으나, 송사련의 밀고로 탄로 나 안처겸 등의 일파가 숙청되는 신사무옥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남곤은 비록 조광조의 사사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구명하지 않은 일로 인해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1543
[김인후, 조광조 신원 복원 최초 건의]
홍문관 부수찬 김인후가 경연에서 차자를 올려 기묘사화 희생자들의 신원 복원을 문신으로서 최초로 개진했습니다. 이는 죽음을 각오해야만 할 수 있는 용기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사림의 입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듬해 성균관 생원 신백령 등이 사면 상소를 올리는 등 조광조 복권 논의가 점화되었습니다.
1544
[인종 즉위 후 조광조 공식 사면 복권]
인종이 즉위하자 평소 조광조를 동정하던 뜻에 따라, 스승 김인후와 이황 등의 영향으로 기묘명현들의 신원을 무엇보다 먼저 복원하여 조광조가 공식적으로 사면 복권되었습니다.
하지만 명종 즉위 후 훈구파 이기에 의해 다시 추탈되는 등 복권과 추탈을 반복하며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습니다.
1567
[선조 시대, 영의정 증직 및 '문정' 시호 추증]
선조 즉위 후 기대승 등의 상소로 조광조에 대한 복권과 증직 요청이 계속되었고, 결국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이는 그의 개혁 정신이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묘소 근처에는 심곡서원이 세워져 배향되었으며, 능주의 죽수서원, 양주의 도봉서원, 희천의 상현사 등 여러 서원에도 배향되었습니다.
1591
[광국원종공신 1등관 추서]
광국원종공신 1등관에 추서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사후에도 국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조선시대 제작된 그의 영정은 대부분 실전되었으나, 1750년 정홍래가 그린 영정이 후대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1610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다: 동방 5현의 반열]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면서 유학의 성인으로 추앙받게 되었습니다.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등과 함께 '동방 5현'으로 일컬어지며 조선 유학의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는 그의 사상과 학문이 조선 유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의 문하생들은 훗날 기호학파와 서인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