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

조선시대 문신, 성리학자, 사상가, 정치가

num_of_likes 104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6:55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no image
조선시대 문신, 성리학자, 사상가, 정치가
report
Edit

• 조선시대 문신이자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로 과거시험 9번 장원급제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워 구도장원공으로 불렸다. • 십만 양병설과 개혁적인 경장론을 주장하며 나라의 미래를 내다본 선각자였다. • 동인과 서인의 붕당 갈등을 조정하려 노력했으나 오히려 양쪽의 비난을 받으며 정치적 한계를 경험했다. • 현재 대한민국 5천원권 지폐의 인물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연관 연혁
  1. 등록된 연관연혁이 없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1536

[조선의 별, 율곡 이이 탄생]

강원도 강릉 오죽헌의 몽룡실에서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흑룡 꿈을 꾸고 태어나 어릴 적 이름은 '현룡'이었으며, 후에 '이이'로 바꾸었다.

1537

[생후 1년, 천재의 싹을 보이다]

태어난 지 채 1년도 안 되어 말과 글을 깨우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3세 때는 글을 깨우치는 등 신동이라 불렸다.

1543

[8세 신동, 화석정에서 시를 짓다]

8세에 화석정에서 '팔세부시'를 지어 당대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큼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선보였다.

1548

[13세, 진사 초시 장원급제!]

13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른들도 따기 힘든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하여, 천재성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기록이었다.

1551

[16세, 어머니의 죽음과 3년 시묘]

16세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파주의 묘소 옆에 묘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며 지극한 효성을 다했다.

1554

[금강산에서 승려가 되다]

어머니 시묘살이를 마친 뒤,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 끝에 금강산 마가연에 들어가 '석담'이라는 법명으로 1년간 승려 생활을 했다.

1555

[1년 만의 환속, 《자경문》 집필]

불교가 유교에 미치지 못한다고 확신하고 1년 만에 금강산에서 환속하여 성리학에 몰두하며 유교적 삶을 다짐하는 《자경문》을 집필했다.

1558

[퇴계 이황과의 역사적인 만남]

23세에 당시 대학자였던 퇴계 이황을 찾아가 이틀간 학문에 대해 깊이 논의했고, 이황은 그의 재능에 크게 감탄하며 '후생가외'라 칭찬했다.

[빛나는 '구도장원공'의 탄생]

이해 겨울 별시에 장원급제하며, 13세부터 29세까지 총 아홉 차례의 과거에 장원급제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워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는 조선 역사상 유례없는 위업이었다.

1564

[관료 생활 시작, 외척을 탄핵하다]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좌랑, 예조좌랑 등을 거치며 관직에 나섰다.

특히 외척 윤원형과 승려 보우의 비행을 상소하여 이들을 탄핵하는 등 강직한 모습을 보였다.

1569

[《명종실록》 편찬과 《동호문답》]

명나라에서 귀국 후 홍문관부교리, 춘추관기사관으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이 무렵 송강 정철과 함께 '시무'와 '무실'을 강조하는 《동호문답》을 저술하여 선조에게 올렸다.

1570

[학문 수양을 위해 관직을 사퇴하다]

선조 3년, 관직을 사퇴하고 황해남도 해주 야두촌으로 돌아가 학문 연구에 매진했다.

1572

[이준경의 당쟁 유차 비판과 낙향]

학문 연구를 위해 관직을 사직하고 파주 율곡촌으로 낙향했다.

이 시기 이준경이 붕당 폐단을 예견하며 자신을 지목하자 강하게 비판했으나, 훗날 을해당론으로 당론이 확실해지자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기도 했다.

1573

[국정 개혁을 위한 《만언봉사》를 올리다]

선조의 부름을 받아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에 임명되었다.

이때 조선의 잘못된 정치와 사회 풍습 7가지를 지적하고 개선책을 요구하는 장문의 상소문 《만언봉사》를 올려 선조를 감동시켰다.

1577

[해주 낙향, 《격몽요결》을 저술하다]

황해도 해주의 석담으로 낙향하여 아동 교육 및 문맹 계몽을 위한 기초 지식 교육서인 《격몽요결》을 저술했다.

1581

[주자학 핵심 요약서 《성학집요》 발간]

홍문관 부제학으로 재직하면서 주자학의 핵심 내용을 요약한 《성학집요》를 저술하고 발간하여 보급했다.

선조는 이 책을 '성현의 말씀'이라 극찬했다.

1582

[이조판서 임명 및 다수의 저술 활동]

이조판서에 임명되었고, 선조의 왕명을 받아 '인심도심설'을 지어 올렸다.

또한 김시습의 일대기인 《김시습전》과 학생 계몽서인 《학교모범》을 저술하는 등 활발한 저작 활동을 펼쳤다.

[붕당 강경파 탄핵 시도와 개인적 공격]

동인 김효원, 서인 심의겸, 정철 등을 동시에 탄핵하여 양당의 강경파들을 후퇴시킴으로써 당쟁을 조절하려 했다.

하지만 동인들은 그가 승려였던 점과 첩을 두 명 거느린 점, 재종조부 이기 관련 논란 등을 들어 그를 집중 공격했다.

1583

[이탕개의 난 발발과 10만 양병설 주장]

변방에서 이탕개의 난이 일어나자,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경고하며 10만 명의 정병을 양성하여 국방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십만 양병설'을 주장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이 주장은 당시 조선의 사회적, 경제적 상황으로 불가능하다는 의혹도 있으며, 후대 유학자들이 율곡을 신성화하기 위해 추가한 내용이라는 학자들의 논란도 존재한다. 하지만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의 침략을 예언했다는 점에서 그의 선견지명이 높이 평가된다.

[동인의 맹공격에 관직 사퇴]

동인의 거듭된 탄핵과 '나라를 말아먹은 간신'이라는 송응개 등 삼사 언관들의 면전 혹평에 시달리다 결국 스스로 사직하게 된다.

당쟁을 조절하려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심한 좌절감을 느꼈다.

[병조판서 취임, 《시무육조》로 국방 강화 촉구]

병조판서에 임명된 후, 국방력 강화를 위해 '어진이 등용, 군대와 백성 육성, 재용 마련, 국경 견고화, 군마 확보, 교화'를 강조한 《시무육조》를 선조에게 올렸다.

[광범위한 개혁안 '봉사'를 다시 올리다]

이전에 주장했던 폐정 개혁안을 다시 한번 '봉사' 형태로 선조에게 요구했다.

공안 개혁, 군적 개편, 지방 관찰사 임기 보장, 서얼 제도 폐지 및 능력 중심 인재 발탁, 그리고 '찬집청', '경제사' 신설 등 파격적인 제안을 담았다.

1584

[49세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치다]

당쟁으로 인한 과로와 병세 악화로 경기도 파주 율곡촌과 한성을 오가며 요양했으나, 결국 향년 49세의 나이로 한성부 대사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재산은 책과 부싯돌 몇 개뿐이었다.

1592

1592.04 사후 8년

[임진왜란 발발, 선조의 뒤늦은 후회]

그가 세상을 떠난 지 8년 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의주로 파천하는 길에 그의 십만 양병설을 떠올리며 뒤늦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한탄했다.

1682

[우계 성혼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다]

숙종 8년, 평생의 학문적 동지였던 우계 성혼과 함께 문묘(文廟)에 종사되어 유교 성현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이후 기사환국으로 출향되었다가 갑술환국으로 다시 종사되었다.

1972

1972.07 사후 388년

[대한민국 5천원권 지폐의 주인공이 되다]

1972년 7월부터 대한민국에서 발행되는 5천원권 지폐의 도안 인물로 선정되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댓글 게시판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