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회

조선 시대 인물, 정치인, 문신, 군인, 외척, 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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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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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인물, 정치인, 문신, 군인, 외척, 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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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가장 강력한 권력을 누린 문신이자 책사입니다. 세조의 장량으로 불리며 계유정난과 세조 즉위를 주도한 일등 공신입니다. 두 왕(예종 성종)의 장인으로서 겹사돈 관계를 통해 막강한 외척 권력을 형성했습니다. 오가작통법 및 면리제 창시 등 조선 행정 제도 확립에 기여했습니다. 만년에 압구정 건축 관련 논란과 관직 삭탈을 겪었으며 연산군 대 갑자사화로 부관참시 당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았습니다. 중종 반정 후 복권되어 세조 묘정에 배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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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

[조선 최고의 권신, 한명회 탄생]

조선 전기의 문신, 군인, 정치인이자 외척인 한명회가 한성부에서 개국공신 한상질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는 미숙아로 태어나 한때 버려질 뻔했으나 늙은 여종의 보살핌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한명회는 1415년 태종 15년 음력 10월 25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한상질은 조선 개국 공신이며, 사후 증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된 한기의 아들이다. 미숙아로 태어나 칠삭동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몸이 빈약하여 일찍 죽으리라 여겨졌으나 늙은 여종의 보살핌으로 살아남았다. 배에는 태성과 북두칠성 모양의 점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후에 권람, 서거정 등과 교류하고 류태재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452

[권력의 발판, 경덕궁직에 오르다]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하며 불우한 청년기를 보낸 한명회는 38세가 되던 해 음서 제도를 통해 처음으로 경덕궁직이라는 관직을 얻어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 시기 그는 수양대군과 교류하며 그의 모사가로 활약하게 된다.

한명회는 글을 읽어 성취한 바 있었으나 번번이 과거에 실패하여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1452년(문종 2년) 음서 제도로 처음 관직에 나아가 송도(개성)에서 경덕궁직이라는 벼슬을 얻었다. 이때부터 수양대군과 자주 교류하며 그의 모사로 활약하기 시작했으며, 경덕궁직으로 함께 있던 무사 홍달손, 홍윤성, 양정 등을 수양대군에게 천거하여 거사에 필요한 인력을 모으는 데 기여했다.

1453

[피바람 부른 책사, 계유정난을 성공시키다]

수양대군의 심복 참모로서 비밀리에 병력과 재물을 동원하여 계유정난을 일으켜 한성부를 점령했다.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등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이 과정에서 '살생부'를 작성하여 조정 대신들의 운명을 좌우했다.

1453년(단종 1년) 군기감 녹사가 된 한명회는 그해 초부터 수양대군의 심복 참모로서 집권 계획을 준비하고 무사들을 천거했다. 10월, 거사를 위해 의병을 조직했으나 군사들이 동요하자 칼을 빼어 들고 사직을 위한 죽음의 당위성을 역설하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그날 저녁 사병들을 동원하여 한성부를 점령하고 홍윤성, 홍달손의 군사와 합류, 김종서와 황보인의 집을 습격하여 이들 일파를 제거했다. 이후 군기녹사,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 1등관에 올랐고, 신하들의 성향을 파악하여 '살생부'를 작성해 숙청과 인사를 주도했다.

1455

[세조의 왕위 등극과 함께 권력 핵심으로 부상]

단종이 세조에게 양위하여 세조가 즉위하자, 한명회는 그의 측근으로서 왕위 등극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동덕좌익공신에 책록되었다. 이후 승정원 좌부승지를 거쳐 그해 가을 우승지에 오르며 권력의 핵심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1455년(단종 3년) 경연 참찬관 겸 판사재감사 지예조사를 거쳐 6월 우부승지가 되었다. 같은 해 6월, 세조가 단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국왕으로 즉위하자 한명회는 승정원 좌부승지에 동덕좌익공신이 되었다가 곧이어 그해 가을 승정원 우승지에 올랐다. 이로써 그는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왕실의 핵심적인 인물이 되었다.

1456

[사육신의 비극, 복위 운동을 좌절시키다]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이 세조 3부자 암살 계획을 세운 정보를 입수, 연회장의 운검 출입을 차단하며 단종 복위 운동을 사전에 적발했다. 사위 김질의 고변으로 성삼문, 하위지 등을 체포하고 국문을 통해 800여 명을 처형하고 수천 명을 유배시키는 등 대대적인 숙청을 주도했다.

1456년(세조 2년) 2월부터 성삼문과 집현전 학사들이 세조 3부자를 연회장에서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6월 1일 명나라 사신이 한성부에 도착하자, 그는 사태에 대비해 광연루 연회에 세자 불참과 운검들의 입시를 막도록 주청했다.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이 운검을 차고 들어오려 하자 제지하며 거사를 저지했다. 6월 2일, 사육신과 함께 거사에 가담하기로 했던 김질이 장인 정창손의 설득으로 가담자들을 폭로하면서 성삼문, 하위지, 김문기 등이 체포되었다. 이들을 국문하여 처형하고 관련자 800여 명을 처형하고 수천 명을 유배시키는 대규모 숙청을 단행했다. 이후 승정원 좌승지, 도승지, 이조판서에 올랐다.

1457

[국방 강화에 기여, 상당군에 봉군되다]

숭정대부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및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오르며 상당군에 봉군되었다. 같은 해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의 모의를 적발해 처형했으며, 세자 책봉 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국가 주요 업무를 수행했다.

1457년(세조 2년) 초 숭정대부로 승진하고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와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한 뒤, 상당군에 봉군되었다. 그해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의 모의를 적발하여 처형시켰다. 같은 해 겨울 조선 예종 해양대군의 왕세자 책봉을 주청하기 위한 세자책봉 주청사가 되어 명나라의 연경에 들어갔다. 1458년 봄 귀국 후 병조판서가 되었고, 충청·경상·전라 3도의 순찰사로 파견되어 구휼 활동을 벌였다. 또한 평안도와 함경도에 출정하여 여진족을 토벌하고 북변을 수습, 축성하여 방어를 강화하는 등 국방 활동에 큰 공을 세웠다.

1461

[최고위 공신, 상당부원군에 진봉]

북방 경계 강화 등 국방 활동에서의 남다른 공적으로 세조의 깊은 신임을 얻어 특명으로 상당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이는 그가 최고위 권력자이자 공신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이후 우의정, 좌의정에 오르며 정권을 장악했다.

한명회는 오지였던 북방 파견에도 망설임이 없었고, 북방의 야인들을 토벌한 뒤에는 경계를 견고하게 하는 데 남다른 공적을 쌓았다. 이 일로 한명회에 대한 세조의 또 다른 신임을 얻게 되어 1461년 특명으로 상당부원군에 진봉되었다. 다시 보국숭록대부 상당부원군에 임명되고 판병조사와 병조판서, 판의금부사를 겸임했다가 1462년(세조 7년) 여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이 되었으며,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 체찰사를 겸하였다. 1463년에는 의정부 좌의정이 되었다.

1466

[영의정 재임, 법전 편찬을 주도하다]

조선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에 임명되어 영예문관 홍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및 세자사를 겸임했다. 또한 신숙주, 정인지 등과 함께 조선의 새로운 법전인 《신제대전》 편찬에 착수하여 이듬해 초 초안을 완성하는 데 기여했다.

1466년 영의정이 되어 영예문관 홍문관 춘추관 관상감사(領藝文館弘文館春秋館觀象監事)와 세자사(世子師)를 겸임했으나 병으로 한때 사직하였다. 이후 신숙주, 정인지 등과 함께 《신제대전 (新制大典)》의 편찬에 착수하여 초안을 작성, 1467년 초에 《신제대전》 초안을 완성시켰다. 이 시기 그는 자신과 함께 정난에 가담했던 인물들과 친인척 관계를 맺어 권력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다.

1467

[권신의 위기, 이시애의 난에 연루되어 투옥]

함경북도 일대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난 당시, 이시애의 모함으로 신숙주와 함께 반란을 꾀했다는 혐의로 의금부에 투옥되어 신문을 받았다. 백성들은 통쾌해했으나, 이시애의 장계가 거짓임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1467년(세조 13년) 함경북도 일대에서 이시애가 병란을 일으켰을 때, 이시애가 한명회와 신숙주가 일찍이 성삼문과 반란을 모의하려 했다고 모함하자 투옥되었다. 그는 신숙주와 함께 반역 혐의로 의금부에 투옥되어 신문을 당했으나 뚜렷한 혐의가 없었다. 즉위 이후 왕위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던 세조는 이시애의 보고문을 믿고 그들을 옥에 가두었으나, 이시애의 장계가 거짓임이 밝혀지면서 신숙주와 함께 석방되었다.

1468

[남이의 옥사, 권력 유지를 위한 숙청]

혜성 출현으로 인한 천변을 예언하고 창덕궁 호위를 건의했다. 그해 남이가 쓴 시구가 문제가 되어 모역 사건으로 몰리자 유자광의 고변을 듣고 신숙주 등과 함께 남이와 강순의 사형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이 공로로 추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 1등관에 책록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년)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세조의 유언에 따라 신숙주, 홍윤성, 정인지 등과 함께 공동 원상으로서 서정을 맡아보았다. 같은 해 초 혜성이 나타나자 천변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창덕궁의 성벽이 없고 방비가 허술한 점을 들어 중신들로 하여금 군병을 거느리고 호위하게 할 것을 건의했다. 그해 남이가 쓴 시구가 문제가 되어 남이의 모역사건으로 몰리자 유자광의 고변을 듣고, 신숙주, 유자광 등과 함께 남이, 강순 등의 사형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남이 등이 처형된 후 이 공로로 추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 1등관의 호를 받았다.

1469

[성종 즉위의 주역, 겹사돈으로 권력 공고히 하다]

갑작스럽게 예종이 죽자 자신의 넷째 사위인 자을산군 이혈(성종)을 적극 지지하여 차기 왕으로 즉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공로로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판이조사, 판병조사를 겸하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불편한 관계였던 예종이 갑자기 죽자, 그는 새 왕의 즉위시까지 정무를 맡아보는 원상으로서 서정을 결재했으며 병권과 인사권까지 장악했다. 이때 그는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이자 자신의 넷째 사위인 자을산군 이혈을 적극 지지하여 차기 왕으로 즉위시켰다. 성종이 즉위하자 판이조사와 판병조사를 겸했고 성종의 즉위를 지지한 공로로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 1등의 공신호를 받았다. 이어 그해 춘추관영사로서 최항, 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한명회는 자신의 딸들을 예종비(장순왕후)와 성종비(공혜왕후)로 만들어 두 왕의 국구가 되었고, 손자를 성종의 서녀와 혼인시켜 3대에 걸쳐 왕실과 겹사돈 관계를 형성하며 권력 기반을 다졌다.

1476

[권력의 공백, 좌의정직에서 물러나다]

자신에 대한 지속적인 탄핵과 병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했고, 성종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좌의정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부원군이자 국가 원로로서 조정에 참여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1474년(성종 5년) 다시 의정부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1476년(성종 7년) 자신에 대한 탄핵과 병을 이유로 여러 번 사직을 청했다. 성종은 만류하다가 음력 3월 29일 그의 사직을 받아들여 좌의정직에서 해임했다. 해임 이후에도 그는 상당부원군이자 국가 원로로서 조정에 참여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고, 유자광과 언관들의 공격도 계속 받았다.

1479

[훗날 비극의 씨앗, 폐비 윤씨 폐출에 연루]

성종의 두 번째 부인이자 후궁 출신 왕비인 폐비 윤씨의 폐출 사건에 참여했다. 이 사건은 훗날 연산군 대 갑자사화의 원인이 되어 한명회가 부관참시를 당하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1479년 6월, 한명회는 성종의 두 번째 부인이자 후궁 출신 왕비인 폐비 윤씨 폐출 사건에 참여했다. 이 사건은 훗날 연산군 대에 이르러 갑자사화가 발생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며, 한명회가 사후 부관참시를 당하게 되는 직접적인 빌미가 된다. 그는 이 사건 외에도 명나라의 건주위 여진족 토벌 지원 파병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키는 등 국가 원로로서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1480

[은퇴를 꿈꾼 정자, 압구정 건립]

만년에 은퇴를 결심하고 한성부 중심부에 '물새들이 희롱하는 정자'라는 뜻의 압구정을 지었다. 이는 그가 권력이 아닌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임을 과시하려 한 것이었으나, 당시 백성들은 이를 권력과 벗하는 곳으로 인식하며 비웃기도 했다.

한명회는 은퇴를 결심하고 서울 중심부에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만들었다. 정자의 이름을 '물새들이 희롱하는 정자'라는 뜻의 압구정이라고 지었으며, 오늘날 압구정동의 지명이 여기에서 유래했다. 그는 스스로를 '젊어서는 종묘와 사직을 위하여 몸을 바치고 늙어서는 강가에 누워 세상을 관조한다'고 자평했다. 조정의 문사들이 압다투어 압구정을 예찬하는 시를 지었으나, 이는 권력을 탐하는 무리들의 행태로 비춰져 일반 백성들은 이를 비웃기도 했다.

1485

[조선 행정의 기틀, 오가작통법과 면리제 창시]

지방 통치 강화를 위해 주민들의 자치 조직인 오가작통법을 창시하고, 면과 리라는 행정구역을 만들었다. 이 제도는 20세기까지 이어져 조선 행정 제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행정권력이 지방과 산골까지 미치지 못하는 점을 이용,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주민들의 자치 조직인 오가작통법을 창시했다. 한명회의 오가작통법은 면과 리라는 행정구역을 만들었으며, 이는 20세기 이후의 면리제로 이어졌다. 1485년(성종 16년) 한명회의 발의에 따라 채택되어 《경국대전》에 올랐다. 이 법은 다섯 집을 1통으로, 5통을 1리로 하여 통주와 권농관을 두는 방식이었으며, 주로 호구 파악, 범죄자 색출, 세금 징수, 부역 동원, 인보 자치조직을 목적으로 했다.

[만년의 과오, 압구정 사신 접대로 삭탈관직]

은퇴를 결심하고 지은 자신의 정자 압구정에서 명나라 사신들을 사사로이 불러 접대한 일로 탄핵을 받아 모든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는 그의 만년 권력에 대한 탐욕과 무례함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1484년(성종 14년) 70세가 되어 궤장을 하사받았다. 같은 해 명나라 사신과 일본 사신들이 그의 정자 압구정을 구경하려 하자, 궁중에서만 쓰는 용봉차일을 쳐서 화려하게 꾸미려 했다. 그러나 성종이 허락하지 않자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보여 대간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다가 사면되었다. 1485년(성종 15년), 병을 이유로 치사(致仕)를 청했으나 성종이 허락하지 않고 지팡이와 의자를 하사했다. 하지만 그해 압구정에서 명나라 사신들을 사사로이 불러 접대한 일로 다시 탄핵을 받아 모든 관직에서 삭탈되었다. 야사에서는 유자광의 사주를 받은 언관들에 의해 탄핵받았다고 전해진다.

1487

[파란만장한 삶의 끝, 한명회 사망]

관직 삭탈 후 병석에 눕게 되자 성종은 내의와 신하를 보내 문병하며 그의 쾌유를 빌었다. 임종 직전 '처음에는 부지런하고 나중에는 게으른 것이 사람의 상정이니 원컨대 나중을 삼가기를 처음처럼 하소서'라는 유언을 남기고 향년 73세로 생을 마감했다.

1487년(성종 17년) 한명회가 병석에 눕게 되자 성종은 특별히 내의를 보내 치료하게 하고 날마다 내관과 신하들을 보내 문병하게 했다. 병세가 악화되자 승지를 보내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임종 직전 '처음에는 부지런하고 나중에는 게으른 것이 사람의 상정이니 원컨대 나중을 삼가기를 처음처럼 하소서'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해 음력 11월 14일 갑자기 사망했으며, 당시 향년 73세였다.

1504

[죽어서도 편치 못한 비극, 갑자사화로 부관참시]

연산군 대 갑자사화 때 폐비 윤씨 폐출 사건에 대한 책임자로 지목되어 관작을 추탈당하고 무덤에서 시체가 꺼내져 부관참시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의 시신은 토막 나 한양 네거리에 걸리는 치욕을 당했다.

1476년(성종 6년) 1월 청원군 장명리에 안장되었으나 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로 이장되었다. 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1488년 신도비가 세워졌다. 그러나 폐비 윤씨 폐출 사건을 막지 않은 책임이 있다고 하여 조선 연산군 대에 와서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정창손 등과 함께 12간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관작을 추탈당하고 그 시체가 무덤에서 꺼내져 부관참시당했다. 시체는 토막 내졌으며 목을 잘라 한양 네거리에 걸리는 치욕을 당했다. 그의 부관참시를 하던 날 갑자기 날이 흐려지고 비가 와서 병사들이 집행을 주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506

[명예 회복, 중종 반정으로 신원 및 복관]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한 중종 반정 이후, 갑자사화의 희생자로서 그의 억울함이 풀려 신원되고 관작이 복원되었다. 이는 죽어서도 편치 못했던 그의 명예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 반정 이후 신원되어 복관되었다. 1507년(중종 1년) 10월 예관을 보내 재장사한 뒤 세조의 묘정에 다시 배향하였다. 충청남도 천안군의 충성사 등에 제향되었다. 그의 묘비문은 동문이자 오랜 친구였던 서거정이 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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