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
문신, 학자, 정치가, 언어학자, 외교관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6:54
- 조선 전기의 뛰어난 학자이자 문신 정치가 언어학자 외교관입니다. - 6대 왕(세종~성종)을 섬기며 국가의 주요 정책 결정과 서적 편찬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 특히 훈민정음 창제와 해동제국기 저술 등 학문적 업적이 뛰어납니다. - 계유정난 이후 세조의 측근으로 활약하며 높은 관직에 올랐으나 사육신과의 입장 차이로 사림파의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 현대에는 그의 학문적·외교적 공적이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1417
[희현당 신숙주 출생]
희현당 신숙주가 전라도 나주군 노안면 금안리 오룡동에서 공조 참판을 지낸 신장과 나주 정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남달라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습니다.
희현당 신숙주가 1417년 8월 2일(음력 6월 20일) 전라도 나주군 노안면 금안리 오룡동에 있는 외가에서 공조 참판 신장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나주 정씨로 지성주군사 정유의 딸입니다. 위로 형 신맹주, 신중주가 있었고, 아래로는 동생 신송주, 신말주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남달랐으며, 자라면서 열심히 공부해 읽지 않은 책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이라 예견했습니다. 침착한 성격으로 깊이 생각한 뒤에 말을 했고, 아버지로부터 학문과 글씨를 배웠습니다.
1438
[생원시 및 진사시 합격]
21세의 나이에 시와 부로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같은 해 진사시에도 모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습니다. 이후 초시와 복시에서 모두 장원했습니다.
1438년(세종 20년), 신숙주는 21세의 나이로 시와 부로 생원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그 해의 진사시에도 모두 합격하여 바로 진사가 되었습니다. 그 뒤 초시(初試)에 장원한 뒤, 복시(覆試)에도 장원했습니다.
1439
[친시문과 급제 및 전농시 직장 임명]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전농시 직장이 되었습니다. 이때 이조에서 성균관 문묘 제례의 제집사로 특별 임명되었으나, 서리의 실수로 일을 빠뜨리게 되자 서리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거짓으로 자복하여 징계를 받았습니다. 이후 세종의 용서로 동료들의 신망을 얻었습니다.
1439년(세종 21년), 신숙주는 친시문과에 3등(병등급)으로 급제하였고 그해에 전농시 직장이 되었습니다. 이조에서 그를 성균관 문묘에 제례를 올릴 때 제집사로 특별히 임명하였으나, 이때 이조의 늙은 서리가 첩지를 전달하지 않아 일을 빠뜨리게 되었습니다. 사헌부에서 탄핵하자, 신숙주는 서리가 죄를 받아 파면당할 것을 염려하여 자신이 거짓으로 자복하고 대신 징계를 받았습니다. 뒤에 이 사실을 안 세종이 그를 특별히 용서해 주었고, 동료들로부터 신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1441
[집현전 부수찬 임명 및 학문 열성]
집현전 부수찬에 임명된 후, 장서각에 파묻혀 귀중한 서책들을 읽었으며, 자청하여 숙직을 도맡아 밤새도록 독서에 매진했습니다. 세종대왕은 그의 학문에 대한 열성을 높이 평가하며 어의를 하사하기도 했습니다.
1441년, 신숙주는 집현전 부수찬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입직할 때마다 장서각에 파묻혀서 귀중한 서책들을 읽었고, 자청하여 숙직을 도맡아 하거나 숙직이 없더라도 장서각에서 밤새도록 독서를 했습니다. 이러한 학문에 대한 열성이 세종에게까지 알려졌으며, 세종은 그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발견하고 어의를 하사하여 칭찬했습니다. 하루는 책을 읽다가 잠이 든 그를 발견하고 왕이 직접 자신의 옷과 포의, 이불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1442
[훈련원 주부 임명 및 통신사 서장관 선발]
훈련원 주부로 임명되었으며, 일본 통신사를 파견할 때 글에 능통한 선비로 서장관에 선발되었습니다. 그는 중국어, 일본어, 몽골어, 여진어, 유구어 등 동아시아 8개 국어에 능통했습니다.
1442년(세종 24년) 신숙주는 훈련원 주부가 되었습니다. 이때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게 되어 글 잘하는 선비를 서장관으로 삼기로 하였는데, 신숙주가 이에 뽑혔습니다. 그는 집현전 학사로서 언어에 능해 중국어, 일본어는 물론 몽골어, 여진어, 유구어 등 동아시아 8개 국어에 능통했습니다. 과로로 병을 앓다가 회복한 직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하된 사람으로서 평탄하거나 험한 것을 가릴 수 없다며 자청하여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1443
[훈민정음 창제 및 음운 연구 참여]
일본에서 귀국 후, 세종의 명을 받아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와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명나라 학자 황찬을 13번 찾아가 음운론을 의논하고, 명나라 사신과도 운서에 대해 질문하며 음운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1443년(세종 25)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으며, 신숙주는 귀국 이후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의 명을 받아 문자 개발 연구에 착수했습니다. 집현전에 있으면서 그는 세종의 뜻을 받들어 훈민정음 창제와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던 그는, 세종의 명으로 성균관 주부인 성삼문, 행사용 손수산 등과 함께 당시 죄를 짓고 만주의 요동에 귀양을 와 있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을 찾아갔고, 황찬을 만나 음운론과 인간의 발음, 언어에 대한 주요한 지식을 얻었고, 이후 13번이나 요동과 조선을 직접 왕래하면서 황찬을 찾아가 음운과 어휘에 관한 것을 의논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였던 황찬이 그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할 정도로 총명한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명나라의 사신이 조선에 입국했을 때도 태평관에 친히 왕래하면서 사신으로 온 명나라 학자에게 운서에 대해 질문하여 그 음을 정확하게 하는 등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음운을 연구했습니다. 이두는 물론 중국어·일본어·몽골어·여진어를 두루 구사하였는데, 훈민정음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이들 언어를 비교 분석하고 조선인의 발음과 비교 분석하여 유사점과 차이점을 가려냈습니다.
[일본 통신사 서장관으로 파견]
부사직에서 다시 훈련원 주부로 임명되어 조선 통신사 변효문의 서장관 겸 종사관으로 일본에 파견되었습니다. 일본을 여행하며 학문과 문화를 과시하고, 언어와 한자, 유학을 가르쳤으며, 그의 재주를 듣고 시를 써 달라는 사람들에게 즉석에서 시를 지어주어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1443년 2월 21일, 부사직이던 신숙주는 다시 훈련원 주부에 임명되어 조선 통신사 변효문의 서장관 겸 종사관으로 일본에 건너가서 우리의 학문과 문화를 과시하고, 언어와 한자, 유학을 가르쳤습니다. 일본을 여행할 때 그의 재주를 듣고 시를 써 달라는 사람이 마구 몰려들었는데, 즉석에서 붓을 들고 시를 줄줄 내려써서 주니 모두들 감탄했습니다.
[일본 통신사 임무 완수 및 계해조약 체결]
9개월간의 일본 체류를 마치고 귀환했습니다. 귀국길에 대마도에 들러 무역 협정을 체결했는데, 이것이 세견선 50척, 세사미두 200섬으로 제한하는 계해조약입니다. 또한 가는 곳마다 산천의 경계, 제도, 풍속 등을 기록하여 훗날 《해동제국기》 편찬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1443년 10월 19일까지 9개월간 일본에 다녀와서, 당시의 견문록과 일본의 인명·지명 등을 한자음으로 기록했습니다. 이 기록을 통해 후에 《해동제국기》가 1471년(성종 2)에 완성됩니다. 특히 이 책의 ‘조빙응접기’ 항에서는 일본 사신의 응대법에 대하여 상세히 규정하여 국가행사에 차질이 없도록 했습니다. 1443년에는 일본의 가는 곳마다 산천의 경계와 요해지를 살펴 지도를 작성하고 그들의 제도·풍속, 각지 영주들의 강약 등을 기록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에 들러서 무역 협정을 체결하니, 이는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 도주와 세견선(歲遣船)을 50척, 세사미두(歲賜米豆)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내용의 무역협정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이 곧 계해조약입니다.
1445
[《용비어천가》 보완 참여]
권제, 정인지, 안지 등이 지어 올린 《용비어천가》의 내용을 다른 학자들과 함께 1447년까지 보완하는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1445년(세종 27년), 신숙주는 권제, 정인지, 안지 등이 지어 올린 《용비어천가》의 내용을 다른 학자들과 함께 1447년(세종 29)까지에 걸쳐 보완했습니다.
1446
[《몽유도원도》 찬시 헌정 및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 완료]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그린 《몽유도원도》에 찬시를 써서 헌정했습니다. 또한 세종이 1443년 창제한 훈민정음의 해설서 집필에 참여하여, 다른 일곱 학자와 함께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을 완료했습니다.
1446년 신숙주는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이야기를 듣고 몽유도원도를 그리자 이에 대한 찬시를 써서 헌정했습니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세종대왕이 기획했던 말글정책을 충실히 보필하였으며, 세종대왕이 1443년(세종 25)에 창제한 훈민정음의 해설서 집필에 참여하여 다른 일곱 학자와 함께 1446년(세종 28) 9월에 훈민정음해례본 편찬을 완료했습니다.
1447
[문과 중시 합격 및 《동국정운》 편찬 완료]
집현전 부응교에 임명되었고, 그 해 문과 중시에 4등으로 합격하여 통훈대부로 승진하며 집현전 응교에 임명되었습니다. 이어 사헌부 장령, 집의를 지내고 경연시강관, 춘추관 수찬관, 세자시강원 필선 등을 겸임했습니다. 같은 해 우리나라 전승 한자음 표준화를 위한 《동국정운》 6권 편찬을 완료했습니다.
1447년(세종 29년) 신숙주는 집현전 부응교가 되었다가 그 해, 문과 중시(重試)에 4등으로 합격하여 통훈대부로 승진하고 집현전 응교에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이어 사헌부 장령, 집의를 지냈으며 겸 경연시강관과 춘추관 수찬관을 겸임하였고, 세자시강원필선도 겸임하여 세자를 보도하였으며 직제학(直提學)과 부제학(副提學) 등을 두루 역임합니다. 그는 또한 《동국정운》의 편찬에도 참여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승된 한자음을 정리하여 표준 한자음을 만들려는 목적에서 편찬한 『동국정운』을 1447년(세종 29년)에 6권으로 완성시켰습니다.
1448
[《동국정운》 출간 및 문종 대리청정 참여]
《동국정운》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해부터는 세자시강원 필선 자격으로 왕세자인 문종의 대리청정에도 참여하며, 세종의 만년에는 어린 원손 단종의 앞날을 부탁받기도 했습니다.
1448년(세종 30년) 『동국정운』이 출간되었습니다. 1448년부터는 세자시강원 필선 자격으로 세자인 문종의 대리청정에도 참여했습니다. 이후 세종의 명으로 윤회, 김종서 등과 함께 《고려사절요》, 《고려사》 등의 편찬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세종은 만년에 병환이 깊어지자 집현전의 학사들을 불러서 어린 원손 홍위(후일의 단종)의 앞날을 부탁한다고 했고, 이때 세종에게 어린 원손을 부탁받은 신하들 중에는 신숙주 외에 성삼문과 박팽년 등이 있었습니다.
1449
1449년 세손강서원 우익선으로 있을 때, 세손에게 사부를 세워 교육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1450
[세종 서거 후 양녕대군 탄핵]
사헌부 장령으로 재직 중 세종이 서거하자, 산릉전의 수반에 천거된 양녕대군을 태종 때의 득죄를 이유로 탄핵했습니다. 문종이 듣지 않자 계속 탄핵했으며, 그해 말 수사헌부 집의로 승임되었습니다.
1450년(문종 즉위년) 사헌부 장령으로 재직 중 세종이 죽자 산릉전의 수반에 양녕대군이 천거되자, 태종 때의 득죄를 이유로 양녕대군을 탄핵하였으나 문종이 듣지 않자 계속해서 양녕대군을 탄핵했습니다. 그해 말 수사헌부 집의로 승임되었습니다.
1451
[명나라 사신 예겸과 교류 및 직제학 임명]
명나라 사신 예겸이 다시 조선에 오자,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시 짓기에 나서 '동방거벽'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 해에 사헌부 장령, 집의를 거쳐 직제학에 임명되었습니다.
1451년(문종 1), 명나라 사신 예겸 등이 다시 조선에 오자 그는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시짓기에 나서 동방거벽(東方巨擘, 동방에서 가장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습니다. 이 해에 사헌부 장령, 집의를 거쳐 직제학에 임명되었습니다.
1452
[《세종실록》 편찬 참여]
사헌부집의가 되었다가, 집현전 직제학, 지제교, 경연시독관, 지승문원사, 춘추관 기주관을 겸임하며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습니다. 《세종실록》은 2년 만인 1454년 3월에 완성되었습니다.
집현전 직제학을 거쳐 1452년(문종 2년) 사헌부집의가 되었다가, 그해부터 집현전 직제학 지제교 경연 시독관 겸 지승문원사(通訓大夫行集賢殿直提學知製敎經筵侍讀官兼知承文院事)로 춘추관기주관을 겸하여 《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습니다. 《세종실록》은 2년만인 1454년(단종 2년) 3월에 완성되었습니다.
1453
[수양대군과 명나라 사은사 동행]
명나라 사은사로 떠나는 수양대군 일행에 서장관으로 동행하여 명나라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명분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귀국 후 수양대군과 급격히 가까워졌습니다.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은 명나라의 고명에 답하기 위해 사은사를 자청했는데 이 때 한명회와 권람의 조언에 따라 신숙주가 서장관으로 동행하며 그를 수행했습니다. 수양대군 일행은 공식적인 업무가 끝나자 도성인 연경으로부터 다소 떨어져 있는 명나라 성조 영락제의 장릉을 찾아갔습니다. 수양대군은 신숙주의 관리로서의 재능을 아꼈는데, 이듬해 4월 조선에 돌아온 뒤부터 둘 사이는 급격히 가까워졌습니다.
[승정원 동부승지 및 수양대군 거사 가담]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습니다. 이후 수양대군의 거사에 간접 지원 형태로 가담했습니다. 귀국 후 상호군 겸 지병조사가 되었습니다.
1453년초 귀국한 신숙주는 상호군 겸 지병조사가 되었으며 1453년 3월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습니다. 이후 수양대군의 거사에 신숙주는 간접 지원의 형태로 가담하게 됩니다.
[계유정난 참여 및 김종서 등 제거]
계유정난 모의에 참여하여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는 데 동참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집현전 학사들을 포섭할 것을 수양대군에게 건의했습니다. 이후 우승지를 거쳤습니다.
1453년 10월 수양대군이 한명회, 권람 등과 계유정난의 거사를 모의할 때 참여하여 어린 단종의 뒤에서 실력을 행사하는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는데 동참합니다. 이때 그는 수양대군에게 집현전 학사들을 포섭할 것을 건의합니다. 성삼문, 박팽년, 성승 등은 수양대군을 못마땅히 여겼으나 그의 회유와 권고로 정난공신의 지위를 일단 수용했습니다. 그해 10월 우승지를 거쳤습니다.
1454
[정난공신 책록 및 도승지 승진]
계유정난 성공 후 수충협책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고 승정원 도승지로 승진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단종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조에게 보고하며,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했습니다. 같은 해 3월 《세종실록》 편찬을 완료했습니다.
계유정난이 성공하고 집현전의 학사들까지 포섭하여 반발을 무마시킨 공로로 그는 수충협책정난공신 1등관에 오르고 이듬해 승정원 도승지로 승진했습니다. 신숙주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도승지의 위치에 있으면서 우부승지 권람, 동부승지 구치관과 함께 단종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하게 감시, 관찰하여 세조에게 보고했습니다. 반정 직후 그는 유언비어를 일소하는 한편, 어린 왕의 치세기간 중 일부 권신들과 재상들이 어린 왕의 눈과 귀를 가리고 정사를 마음대로 독단적으로 행사하였으며 민심이 바로 전달되는 것을 차단하였다며 민생을 위한 정책을 펼칠 것을 선언,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했습니다. 《세종실록》은 2년만인 1454년(단종 2년) 3월에 완성되었습니다.
1455
[좌익공신 책록 및 명나라 책봉 주청사 파견]
세조가 즉위하자 동덕좌익공신 1등에 고령군으로 봉해지고 예문관 대제학에 임명되었습니다. 새 왕의 즉위를 알리는 책봉 주청사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황제의 책봉 고명을 받아냈습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동덕좌익공신 1등에 고령군으로 봉군된 뒤 예문관 대제학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동년 그는 새 왕의 즉위를 알리는 책봉 주청사의 소임을 띠고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 황제의 책봉 고명을 받아냈습니다.
1456
[국방 강화 및 관직 역임]
변방의 축성을 강화하고 남해 해안가의 왜구를 격퇴하게 하였으며, 대마도 도주에게 조약문의 사본을 보내 경고했습니다. 또한 병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내고 판중추원사가 되어 판병조사를 겸했으며, 의정부 우찬성,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했습니다.
사육신의 처형 직후 그는 변방의 축성을 강화하고 남해 해안가에 출몰하는 왜구를 격퇴하게 하였으며, 대마도 도주에게 조약문의 사본을 보내 경고했습니다. 1456년(세조 2년) 병조판서로서 국방에 필요한 외교응대의 일을 위임받아 사실상 예조의 일도 관장했습니다. 1456년 병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내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어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하였으며, 그해 여름 의정부우찬성이 되어 성균관대사성을 지냈습니다.
[사육신 단종 복위 거사 제안 거절]
성삼문 등 사육신으로부터 단종 복위 거사 동참을 요청받았으나, 실현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단호하게 거절하고 사육신과 결별을 결심했습니다. 그는 후에 사림파로부터 배신자로 비판받게 됩니다.
귀국 직후 신숙주는 성삼문 등과 재회했습니다. 이때 사육신으로부터 세조 3부자 처형 거사에 동참할 것을 요청받았으나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신숙주는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운동이 명분상으로는 옳지만, 인력과 장비 부족으로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한명회나 권람 등에게는 이 사실을 고변하지 않았습니다. 뒤에 김질이 거사를 폭로하면서 알려지게 되지만, 그가 사육신의 거사를 밀고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김시습 등은 그를 추한 배신자와 변절자로 규탄했고, 사림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남아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며 사육신과는 결별을 결심했습니다.
[단종 강등 및 금성대군 처형 주장]
단종 복위 계획 발각 후, 정승들과 함께 단종을 강등시켜 서인으로 만들 것을 건의하여 노산군으로 강등시켰습니다. 또한 이보흠과 금성대군 등의 단종 복위 운동이 발생하자, 노산군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습니다. 이때 노산군의 부인 정순왕후 송씨를 자신의 노비로 내려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1456년(세조 2년) 성삼문, 하위지 등의 단종 복위 계획이 발각되고 사육신과 그 관련자들이 처형되었습니다. 신숙주는 정승들과 함께 입조하여 단종을 강등시키고 서인으로 만들 것을 건의했고,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습니다. 사육신인 성삼문과 박팽년은 형문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신숙주를 향해 반역자, 배신자라고 규탄했는데 이때 신숙주는 그들에게 그들은 단종의 충신이지만 금상(세조)의 충신은 아니라며 항변했습니다. 곧 이어 경상북도 지역에서 이보흠과 금성대군 등의 거사로 단종 복위 운동이 다시 발생하자, 탄핵 상소를 올려 노산군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으며, 그는 노산군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관철시켰습니다. 이때 그는 노산군의 부인 송씨를 자신의 노비로 내려줄 것을 요청했지만 세조도 그것만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세조는 신분만 비일 뿐 노비로서 사역시킬 수 없다 하여 정업원에 혼자 살게 하였습니다.
[아내 무송 윤씨 사망]
명나라에서 귀국하던 중 아내 무송 윤씨의 사망 소식을 접했습니다. 아내의 장례 후 큰아들 신주도 22살에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1455년 명나라에 있을 당시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1456년 귀국했습니다. 부인 무송군부인 무송 윤씨는 1456년 1월 23일(병자년 1월 21일) 사망했습니다. 아내의 장례 후 큰아들 신주도 22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큰며느리 한명회의 딸이 손자 신종호를 낳았으니 어린 손자들을 생각하면 그때의 심경을 헤아려 볼 만했습니다.
1457
[의정부 좌찬성 임명 및 서적 편찬]
가을에 의정부 좌찬성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세조의 명을 받아 《동국정운》 편찬에 참여했으며, 농업과 목축에 대한 서적인 《농산축목서》를 편찬했습니다.
1457년 가을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이 되었습니다. 그 뒤 신숙주는 세조의 명을 받아 《동국정운》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농업과 목축에 대한 간단한 백서인 《농산축목서》를 찬하기도 했습니다.
1458
[평안도 도체찰사 겸임 및 우의정 임명]
좌찬성 겸 평안도 도체찰사를 겸임했으며, 그해 말 의정부 우의정에 올랐습니다. 우의정 임명 후 10년간 예조판서를 겸하며 국가 외교에 큰 공적을 세웠습니다.
1458년(세조 3년) 9월 좌찬성으로 평안도 도체찰사를 겸하였으며, 1458년 말 의정부 우의정에 올랐습니다. 1458년(세조 4)에 우의정이 된 뒤에도 그는 10년간 예조판서를 겸하여 국가 외교에 있어서도 큰 공적을 세웠습니다.
1459
[의정부 좌의정 임명]
의정부 좌의정에 올랐습니다. 좌의정이 된 후에도 예조판서를 겸하며 명나라와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맡는 등 외교 정책의 입안자 겸 책임자로서 활약했습니다.
1459년(세조 5년)에 의정부 좌의정이 되었습니다. 그는 오래도록 예조판서로 재직하면서 명나라와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맡는 등 외교정책의 입안자 겸 책임자로서도 활약했습니다.
1460
[모련위 여진족 토벌 출정]
강원도·평안도·함길도 도체찰사 겸 선위사가 되어 병력을 이끌고 동북방면에 출몰하던 모련위 여진족을 2차례에 걸쳐 소탕했습니다. 뛰어난 전술로 야인의 소굴을 완파하고 돌아왔습니다.
1460년(세조 6)에는 강원도·평안도·함길도 도체찰사 겸 선위사가 되어 병력을 이끌고 2차례에 걸쳐 동북방면에 자주 출몰하여 약탈하던 모련위(毛憐衛) 여진족을 소탕하기 위해 출정했습니다. 모련위 여진족과의 교전에서 북방 오진에 이르러 그는 직접 강을 건너, 산악지대로 여진족을 유인하여 뛰어난 전술을 구사하여 야인의 소굴을 소탕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는 장병을 여러 부대로 나누어 두만강변에 진을 친 뒤 여러 길로 한꺼번에 진격하도록 하여, 깊숙이 진격하여 야인을 토벌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날 저녁 여진족이 밤을 타서 뒤를 공격해 오자 영중에서 이들을 상대했으나 그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히 대응했습니다. 야밤의 기습공격이었지만 장사들이 공이 이렇게 편안하고 한가한 것을 보고는 용기를 내어 오히려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방략을 가르쳐 주고 용기있는 자나 겁내는 자 모두 분발하게 하여 오히려 여진족을 역추격하여 그 다음날 여진족의 소굴을 완파했습니다.
1461
[《북정록》 저술 및 고령부원군 진봉]
왕명으로 여진족 토벌 기록을 담은 《북정록》을 저술했습니다. 남해안 왜구 토벌을 위한 병력 파견을 건의하고, 해안가와 변방의 성곽 수축을 상주하여 국방 강화에 힘썼습니다. 이 공로로 고령부원군으로 진봉되었습니다.
1461년에 여진족 토벌에 대하여 왕명으로 《북정록》을 저술했습니다. 또한 남해안에도 병력의 파견을 건의하여 남해안을 약탈하는 왜구를 토벌하게 했습니다. 이후에도 해안가와 변방에 성곽을 수축, 개보수하고 화포류를 설치하여 미구에 있을 외침을 대비할 것을 상주했습니다. 1품관이 되자 그의 공신 작위 역시 고령부원군으로 진봉되었습니다.
1462
[영의정부사 승진 및 사직]
영의정부사로 승진했습니다. 사육신과 갈라선 것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자 잠시 사임했다가 다시 복직했습니다. 1464년에는 자신의 지위가 너무 높아진 것을 염려하여 영의정직을 사직했습니다.
1462년(세조 8년) 5월 20일 영의정부사로 승진했습니다. 그의 영의정부사 임명 직후 사육신과 갈라선 것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자 일단 사임하였다가 다시 복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지위가 너무 높아진 것을 염려하여 1464년 영의정부사직을 사직했습니다. 세조는 그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그는 거듭 사직하여 물러났습니다.
1464
[영춘추관사 임명 및 일본 통신사 파견]
영춘추관사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7월 통신사로 일본을 방문했으나 일본 국왕 고하나조노 천황의 사망으로 소홀한 대접을 받고 12월에 귀국했습니다.
1464년 영춘추관사가 됐습니다. 1464년 7월 일본에 파견되는 통신사가 되어 배편으로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7월 19일 일본 국왕 고하나조노가 병으로 죽었으므로 일본측의 대접은 소홀하였고 그해 12월 배편으로 귀국했습니다.
1466
1466년 9월 외직에 오래 머물렀던 공신 양정이 임기가 차서 중앙에 소환되면서 세조가 북방에서 오래 근무한 일로 위로연을 베풀었는데, 이 자리에서 양정은 취중에 세조에게 '상감께서도 오랫동안 왕위에 계셨으니 이제 편히 여생을 즐기는 것이 어떠냐'며 왕위를 선위하라고 진언했습니다. 신숙주 등은 그의 발언을 말렸으나 사태는 확대되었습니다. 양정의 취중 발언에 화가 난 세조는 승지를 불러 그 뜻을 말하고 황위를 세자에게 물려주려 하니 승지들은 한사코 이에 응하려 하지 않고 기세가 매우 험악하였습니다. 신숙주는 죽음을 각오하고 양위 사태를 말려서 무마했습니다.
1467
[이시애의 난 무고 및 건주위 토벌]
이시애의 난에 협력했다는 무고를 당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습니다. 같은 해 건주위 토벌에 출정하여 공을 세워 12월에 군공 3등에 녹훈되었습니다. 이후 북방과 해안가의 방비를 강화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1467년에는 이시애의 난 때 난에 협력했다는 무고를 당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습니다. 1467년 건주위 토벌에 출정하여 공을 세워 그해 12월 군공 3등에 녹훈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평안도와 함경도에 성곽을 쌓고, 각 군에도 성곽을 개보수하게 하여 미구에 있을 여진족과 몽골족 등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1467년 예조판서를 겸임했습니다.
1468
[세조 서거 및 남이의 옥사 참여]
세조가 서거하기 직전 '당 태종에게는 위징, 나에게는 숙주'라고 말하며 그에 대한 깊은 신뢰를 표했습니다. 예종 즉위 후 남이의 옥사가 발생하자 유자광 등과 함께 위관으로 참여하여 남이 장군과 강순 등을 숙청했습니다.
1468년 세조는 죽음을 앞두고 '당 태종에게는 위징, 나에게는 숙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세조가 신숙주를 당 태종의 위징에 비견한 것은 자신도 당 태종처럼 신숙주를 통해 문화 통치를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한편으로는 그만큼 신숙주를 신뢰했다는 뜻이 됩니다. 1468년 세조가 병으로 죽고 예종이 어려서 즉위하자 신숙주는 한명회, 구치관, 정인지 등과 함께 원상의 한사람으로 승정원에 들어가 정희왕후와 함께 서정을 처결하고 혼란을 수습하였으며, 예종 즉위 후 남이의 옥사가 발생하자 그는 유자광 등과 함께 위관으로 참여, 남이 장군과 강순 등을 심문한 뒤 숙청하여,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에 책록되었습니다.
1469
[성종 즉위 추천 및 예조판서 대리]
예종이 재위 1년 만에 서거하자, 정희왕후에게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 혈(성종)을 왕으로 추천하여 적극 지지했습니다. 이후 예조판서 대리, 겸 춘추관 영사를 지냈습니다.
1469년 예종이 재위 1년 만에 죽자 그는 정희왕후에게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 혈을 왕으로 추천했습니다. 정희왕후가 자을산군으로 후계자를 결정하였을 때 귀성군을 추천하는 반대 의견이 나오자 그는 '속히 상주를 정하여 인심을 안정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여 정희왕후의 결정을 적극 지지합니다. 1469년 예조판서 대리, 겸 춘추관 영사를 지냈습니다. 그는 1467년부터 오래 예조판서를 겸임했습니다. 그는 사대교린을 자신의 신념처럼 여겼다 합니다.
[경연청 영사 겸임 및 외교 활동]
성종의 왕명으로 한명회, 구치관, 최항, 조석문, 김질 등과 함께 경연청 영사를 겸임했습니다. 그는 외교 업무를 맡으면서 상대 외교국으로부터 환심을 얻으며 '외교의 달인'이라 불렸습니다.
1469년(성종 1년) 12월 29일 왕명으로 한명회, 구치관, 최항, 조석문, 김질 등과 함께 경연청 영사를 겸임했습니다. 그는 사대교린을 신념으로 삼아 명나라와 여진족, 일본, 유구국 등에 보내는 표전과 사명 문건을 모두 직접 최종 검토했습니다. 외교업무를 맡으면서도 주는 것은 후하고 받는 것은 적어서 국내에서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상대 외교국으로부터는 언제나 환심을 얻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외교의 달인이라며 칭찬했습니다.
1471
[좌리공신 책록 및 영의정 재임]
성종 즉위 공로로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 1등에 책록되고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습니다. 노병을 이유로 여러 번 사직을 청했으나 성종의 윤허를 받지 못하고 정계에 남아 있었습니다. 또한 병력 1만 이상 증강을 건의하여 북방과 해안가 방비에 힘썼습니다.
성종이 즉위하자 그를 추대한 공로로 1471년(성종 2년)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 1등에 책록되고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이때 노병을 이유로 여러번 사직하였으나 성종의 윤허를 받지 못했으며, 이후 정치적, 학문적 영향력을 발휘하며 정계에 남아 있었습니다. 신숙주는 병력 1만 이상을 증강하도록 건의하여 병력을 양성하여 북방과 해안가의 방비에 힘썼습니다.
1473
[충훈부 당상 임명 및 정미수 탄핵]
충훈부 당상이 되었으며,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가 분에 넘치는 혜택을 받는다는 이유로 탄핵했으나 성종이 듣지 않았습니다. 평생 사치하지 않고 겸손하게 처신하여 세인들의 칭송을 받았으나, 김시습은 끝까지 그를 비판했습니다.
1473년 충훈부 당상이 되었으며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가 분에 넘치는 혜택을 받는다는 이유로 탄핵하였으나 성종이 듣지 않았습니다. 훈구 공신의 지위에 있었으나 공신과 훈구파의 세력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신숙주는 평생 사치스럽게 행동하지 않았고,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위세를 부리지 않고 겸손하게 처신하여 세인들의 칭송과 덕망높은 인물이라는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김시습만큼은 그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의 가마나 교자 행차 시에 나타나 욕설과 조롱을 퍼붓고 야유를 보냈습니다. 신숙주의 하인들이 김시습을 제지하려 하였으나 그는 하인들을 나무라며 만류했습니다.
1474
[병으로 사직 상소 반려 및 국장도감 도제조 주관]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성종이 이를 반려했습니다. 같은 해 4월 24일 공혜왕후 국상 시 국장도감 도제조에 임명되어 6월까지 장례식을 주관했습니다.
1474년(성종 5년) 2월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성종이 이를 반려했습니다. 1474년 4월 24일 공혜왕후의 국상 시 국장도감 도제조에 임명되어 그해 6월까지 장례식을 주관했습니다.
1475
[영의정 재직 중 서거]
병으로 사직을 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아 계속 영의정직에 있다가 서거했습니다. 임종 직전 문병 온 성종에게 '일본과의 화친 관계를 잃지 마소서'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사후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고산리 야산에 안장되었고, 문충 시호가 추서되었으며 성종의 묘정에 종사되었습니다.
1475년 병으로 사직을 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아 계속 영의정직에 있었습니다. 왕이 그에게 특별히 궤장과 안대를 하사하려 하였지만 그는 자신이 궤장을 받을 나이는 아니라며 조용히 사양했습니다. 한편으로 일본과 여진을 경계하여 북방과 해안가의 방비에 주력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임종 직전에 문병 온 성종이 조언을 묻자 '일본과의 화친 관계를 잃지 마소서'라고 유언했습니다. 그러고는 병으로 죽었습니다. 사후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고산리(현 의정부시 고산동) 산5번지 야산에 부인 무송윤씨와 쌍분으로 안장되었으며, 성종의 묘정에 종사되고, 문충의 시호가 추서되었습니다. 충청북도 청주시 가덕면 인차리 구봉영당, 청주시 낭성면 관정리의 묵정서원 등에 제향되었습니다. 그는 정난공신, 좌익공신, 익대공신, 보사공신, 좌리공신 등에 책록되었으므로 성종은 그에게 부조지전을 내려 불천지위가 되었습니다.
1971
[신숙주 묘정에 한글 창제 사적비 건립]
한글학회에서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산53번지에 위치한 신숙주 묘정에 ‘한글 창제 사적비’를 건립했습니다. 이는 그의 한글 창제 공적을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한글학회에서는 1971년 10월 9일 한글날에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산53번지에 위치한 신숙주 묘정에다 ‘한글 창제 사적비’를 건립했습니다. 이는 1910년 이후 나타난 그의 한글 창제 공적 재조명 여론의 일환입니다.
1977
[신숙주 영정, 대한민국 보물 제613호 지정]
1445년경 명나라 화가가 그린 원본 신숙주 영정이 대한민국 보물 제61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1445년경 명나라 화공본 영정은 현 청주시에 위치한 구봉영당에 봉안되어 있다가 1970년 이후 공개되었고, 모사본은 청주 묵정영당과 고잔묘 등에 봉안되어 있었습니다. 이 중 1445년에 명나라 화가가 그린 원본 신숙주 영정은 1977년 11월 15일 대한민국 보물 제61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2002
[문화관광부, 이 달의 문화인물로 신숙주 선정]
문화관광부가 신숙주를 이 달의 문화인물로 선정했습니다. 이는 그의 업적에 대한 현대적 재평가의 일환입니다.
문화관광부는 2002년도 10월의 문화인물로 신숙주를 선정했습니다. 이는 1980년대 이후부터 진행된 신숙주에 대한 재평가 노력의 결과입니다.
2007
2007년 9월 15일 경기도 평택시 청북읍 청북면 고잔리에 신숙주 문학비가 세워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