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

문신, 재상, 정치인, 유학자, 청백리, 종묘배향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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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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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재상, 정치인, 유학자, 청백리, 종묘배향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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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문신이자 재상. - 세종대왕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조선 역대 영의정 중 최장수인 18년간 재임한 기록을 보유. - 백성들에게는 청렴함의 상징으로 알려졌으나 가족 비리 뇌물수수 간통 등의 논란에 휘말리기도 함. - 문물과 제도의 정비 국방 강화 등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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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순

1363

[황희의 탄생]

고려 개경부 개풍 가조리에서 자헌대부 판강릉부사 황군서의 서자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났습니다.

1376

[음서로 관직 생활 시작]

14세의 나이로 음서 제도를 통해 관직에 나아가 복안궁 녹사가 되었습니다.

1380

[첫 결혼]

17세에 판사복시사 최안의 딸과 결혼하여 1녀를 두었습니다.

이후 부인 최씨는 24세에 사망했습니다.

1385

[과거 시험 급제]

21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곧이어 진사시에도 급제했습니다.

1388

[재혼]

26세에 공조전서 양진의 딸과 재혼하여 슬하에 치신, 보신, 수신의 3남과 1녀를 두었습니다.

1389

[별장으로 문과 급제]

별장으로 재직 중 문과에 급제하여 적성현 훈도를 역임했습니다.

이후 성균관 학록과 학관에 보직되었습니다.

황희는 스무 살 때 이미 진사의 벼슬에 있었으며, 논밭에서 농부와의 대화를 통해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흉을 보면 기분 상하는 것을 깨닫고 학문에 더욱 힘썼다고 전해집니다.

1392

[조선 건국 후 출사]

고려 멸망 후 다른 70여 명의 고려 유신과 함께 개성 두문동에 들어가 외부와 연락을 끊고 고려 왕조에 대한 지조를 지키려 했습니다.

이후 이성계의 부름과 동료들의 추천으로 다시 관직에 나섰습니다.

조정의 요청으로 황희는 성균관학관으로 세자우정자를 겸무하고 직예문 춘추관, 사헌부 감찰, 우습유 등을 거치며 조선 관직에 올랐습니다.

1397

[태조의 노여움으로 파직]

문하부우습유 재직 중 부모의 상기를 마치지 않은 정란의 복직 문제에 반대하다 태조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습니다.

이후에도 발언 문제로 여러 차례 파직과 복직을 반복했습니다.

1398년 문하부우습유 재직 중 사사로이 정치를 논의해 경원교수로 전출되었다가 정종 즉위 후 우습유로 소환되었습니다. 1399년 발언 문제로 파직되었다가 2월 문하부우보궐에 복직되었고, 다시 언사로 파직되어 경기도도사, 경원 교수관으로 폄직되었습니다.

1401

[태종의 신임을 얻다]

승정원 지신사 박석명의 추천으로 도평의사사경력이 되었으며, 태종의 각별한 신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태종은 황희를 공신 대접하며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 접견할 정도로 특별히 신임했습니다. 박석명의 강력한 추천이 아니었으면 황희를 중용하지 않았을 것이라 전해집니다.

1402

[부친상 중 특별 복직]

부친상을 당해 잠시 사직했으나, 인물난으로 인해 3년상을 마치기도 전에 대호군 겸 승추부경력에 특별 제수되었습니다.

1405

[승정원지신사 임명]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지신사(오늘날의 비서실장 격)에 오르며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인 정치 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건국 후 공신들이 정계에 포진한 상황에서 공신 출신이 아닌 황희가 태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배경으로 요직에 중용되었습니다. 태종은 황희에게 "이 일은 나와 경만이 알고 있으니 만약 일이 누설된다면 경이 아니면 내 입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오."라고 할 정도로 그를 신뢰했습니다.

1413

[양녕대군 폐립 반대]

이조판서 재직 중 세자 양녕대군의 폐립 문제에 반대 의견을 내어 태종의 노여움을 사 좌천되었다가 복직되었습니다.

양녕대군 폐위 반대는 순간적으로 태종의 분노를 초래했으나, 후에는 태종이 황희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깊이 신뢰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1415

[송사 처리 문제로 파직과 복직]

송사 처리 문제에 대한 잘못으로 문책당해 파직되었다가, 한 달 뒤 행랑도감제조로 복직되었습니다.

이후 의정부 참찬과 호조판서 등 주요 관직을 역임했습니다.

1418

[세종의 세자 책봉 반대로 유배]

충녕대군(세종)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국본을 쉽게 바꾼다며 이를 반대하다가 결국 폐서인되어 교하(파주)로 유배되었습니다.

교하가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태종의 노여움을 사 남원으로 옮겨 5년간 유배 생활을 했습니다.

유배지인 남원에서 도교의 이치를 따라 춘향전의 무대가 되는 광한루를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1422

[세종의 특별한 신뢰로 복직]

태종의 명으로 소환되어 직첩을 받고 관직에 복귀했습니다.

세종은 자신이 세자에 책봉되는 것을 반대했음에도 황희의 사람됨이 바르다는 것을 알고 과감히 그를 등용했습니다.

세종 4년(1422년) 3월에 과전(科田)과 고신(告身)을 되돌려받고, 10월에는 경시서 제조와 의정부 좌참찬이 되었습니다. 세종은 황희의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를 끝까지 중용했습니다.

1423

[강원도 관찰사 재임 중 선정]

기근이 장기화된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 백성 구휼에 힘쓰고 선정을 베풀어 민심을 얻었습니다.

그가 이임하자 주민들이 아쉬워했으며, 1425년 삼척에서는 그의 유덕을 기려 '소공대'와 '정승고개'라 불렀습니다.

세종대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그해 12월 숭정대부 판우군 도총제부사에 특별 승진 임명하고 강원도 관찰사를 겸임하게 했습니다.

1425

[뇌물 수수 논란과 자백]

사헌부 대사헌을 겸무하던 중 남원부사가 보낸 뇌물을 수수했는데, 조정의 다른 재상들과 달리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여 당시 여론이 그를 정직하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황희는 1426년 이조판서, 5월 의정부 우의정, 1427년 의정부 좌의정 겸 판이조사에 올랐습니다.

1427

[친인척 비리 및 사위 사건 비호 논란]

좌의정 재임 중 교하현령에게 토지를 요구하고 그 대가로 현령의 아들을 행수로 임명한 사실과, 사위 서달의 살인 사건을 비호한 일이 드러나 사헌부와 사간원의 끈질긴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가 한 달 만에 복직했습니다.

황희의 사위 서달이 지방 관아 아전을 몽둥이로 때려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황희는 맹사성과 함께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 직권을 남용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세종은 예의상 황희를 파직했다가 불과 7일 만에 다시 기용하는 파격적인 신뢰를 보여주었습니다.

1428

[간통 및 범죄자 은닉 논란]

박포의 아내와 간통하고 살인자를 은닉했다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박포의 아내가 살인 후 황희의 집 토굴에 숨어 살았고, 이때 황희가 그녀와 간통했다는 소문이 확산되었습니다.

왕조실록에 따르면, 박포의 아내가 자기 종을 죽여 연못에 버린 뒤 황희의 집 토굴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살았는데, 이때 황희가 간통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430

[치죄 개입으로 파직]

제주도 감목관 태석균의 치죄에 사사로운 정으로 사헌부에 부탁한 일이 드러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습니다.

1431

[조선 역대 영의정 중 최장수 재임 시작]

69세의 나이로 영의정부사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후 18년 동안 세종을 보필하며 태평성대를 이끌었습니다.

이는 조선 역대 영의정 중 최장수 기록입니다.

영의정 재직 동안 농사 개량, 예법 개정, 양반가문 천첩 소생의 천역 면제 건의, 국방 강화 정책(4군6진 개척 건의 및 김종서, 최윤덕 중용), 형관들의 남형 금지 조항 신설, 소나무 남벌 금지령 제정, 지역 수령 근무실적 조사 제도 제정, 《경제육전》 편찬 감독 등 훌륭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1440

[서자 부정 논란]

왕조실록 기록에 따르면 내섬시 여종 사이에서 얻은 아들 황중생의 절도 사건이 드러나자, 그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부인하며 서자의 성을 조씨로 바꾸게 했습니다.

실록에는 "처음에 영의정 황희(黃喜)가 내섬시(內贍寺)의 여종[婢]을 첩(妾)으로 삼아 아들을 낳았는데, 황중생(黃仲生)이라 하였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1449

[영의정에서 은퇴]

87세의 나이로 영의정에서 은퇴했습니다.

병으로 쇠약해진 세종은 여러 번 그의 은퇴를 만류했습니다.

1452

[황희의 사망과 사후 평가]

향년 90세로 사망했습니다.

사망 후 익성(翼成)의 시호가 내려졌고, 세종묘에 배향되었습니다.

그의 사후 두 아들 황치신과 황수신이 세조 반정 이후 공신이자 정승을 역임하며 그는 청백리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금승리(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에 안장되었으며, 1455년(세조 1년) 증 순충보조공신에 책록되고 남원부원군에 추봉되었습니다.

1976

1976.08.27 사후 524년

[황희선생묘 기념물 지정]

황희선생묘가 경기도 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1999

1999.07 사후 547년

[방촌황희기념관 건립]

경기도 파주에 방촌황희기념관이 착공되어 2000년 6월에 건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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