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사성
조선 정치인, 문신, 유학자, 명재상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6:53
고려 말 조선 초 격동기에 활약한 문신 정치인 유학자. 세종대왕의 핵심 측근이자 조선 초 문화 기틀 마련에 크게 기여한 명재상. 청백리이자 효자로 이름 높았으며 소탈하고 겸손한 인품으로 백성들에게도 존경받음. 예악 정비 북방 영토 확장(여진 정벌) 등 중요한 국가 정책을 주도하며 뛰어난 리더십 발휘. 강호사시가를 남긴 시인이자 음률에 능한 예술가적 면모도 겸비.
1360
[백성들의 영원한 벗, 고불 맹사성 태어나다]
고려 양광도 온양(현 충청남도 아산)에서 수문전제학 맹희도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었음에도 3년간 시묘살이를 할 정도로 지극한 효성을 보여 훗날 삼강행실도에 수록될 정도였습니다.
1386
[스물일곱, 문과에 급제하며 세상에 발을 딛다]
우왕 12년(1386년)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춘추관검열, 전의시승, 기거랑 등 여러 벼슬을 거쳤습니다.
1392
[격동의 시대, 이성계의 손을 잡고 새 나라의 기틀을 잡다]
고려가 멸망하자 잠시 관직을 사퇴했으나, 동료들의 권고와 이성계의 중용으로 조선에 출사했습니다.
이성계는 정적 최영의 손녀 사위였던 맹사성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적극적으로 기용했습니다.
1408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기, 태종의 심기를 거스르다]
사헌부 대사헌으로 재직하며 역모 사건을 취조하던 중, 태종의 허락 없이 부마 조대림을 고문하여 처형 직전까지 몰렸습니다.
하지만 영의정 성석린과 황희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1416
[세종대왕의 곁에서, 핵심 요직을 두루 거치다]
이조참판, 예조판서 등 핵심 요직에 임명되며 세종대왕의 곁에서 국정 운영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효성이 지극하여 병든 노부를 위해 여러 차례 사직을 청했지만 세종은 그의 청을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1416년 이조참판에 이어 예조판서가 되었고, 이듬해 생원시의 시관이 되어 권채 등 100인을 뽑았습니다. 그해 노부의 병환을 위해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고 역마와 약을 하사받았습니다. 이어 호조판서가 되어서도 노부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습니다. 1417년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고, 1418년 세종 즉위 후 공조판서가 되었고 이때도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습니다.
1419
[조선의 심장, 한양의 행정을 책임지다]
이조판서와 예문관대제학을 거쳐 판한성부사(현 서울시장 격)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듬해 다시 이조판서에 오르고 1421년에는 의정부찬성사를 지내는 등 세종조 핵심 관료로서의 입지를 굳혔습니다.
1419년 이조판서와 예문관대제학이 되었고, 같은 해 음력 9월 25일부터 음력 12월 7일까지 판한성부사를 역임했습니다. 그 이듬해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고, 1421년 의정부찬성사를 지냈습니다.
1431
[마침내 조선의 재상에 오르다, 명재상 시대의 개막!]
세종 13년(1431년) 좌의정에 올라 명재상으로서 이름을 날렸습니다.
황희와 함께 조선 초기 문화를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태종실록》 편찬과 《팔도지리지》 편찬을 감독하는 등 뛰어난 행정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1433
[북방 영토 확장의 숨은 주역, 여진 정벌을 성공으로 이끌다]
세종의 파저강 여진족 정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작전 시기, 군사 규모, 조직 등 모든 계획을 주도적으로 기획했습니다.
그의 뛰어난 전략 덕분에 조선군은 대승을 거두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북방 영토를 확정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조선 역사상 북방 영토를 확대한 세계최초의 전략적 승리 중 하나입니다.
당시 관료들이 현상 유지를 주장했음에도 맹사성은 세종의 뜻에 따라 주도적으로 작전을 기획했습니다. 정벌 후 모든 공을 최윤덕에게 돌려 그를 좌의정으로 승진시켜 줄 것을 건의하는 겸손함까지 보여주었습니다.
1434
[백성을 위한 온천, 조선 최초 복지 정책에 기여하다]
세종이 백성들의 건강 증진을 위해 온천탕을 만들고 장기간 치료할 수 있는 재원 마련을 추진할 때, 온양 출신이었던 맹사성은 온천의 효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즉시 찬성하여 정책 시행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는 조선시대 최초의 온천 복지 정책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세종이 격무로 인해 잦은 질병으로 온양 온천욕으로 치료하며 그 효험을 알게 된 후, 백성들에게도 온천의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여 백성을 위한 온천탕과 장기 치료 재원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맹사성은 이러한 세종의 뜻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여 실현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1435
[노년에 벼슬을 내려놓고, 국정에 큰 지혜를 더하다]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으나, 나라에 중요한 일이 생기면 세종은 반드시 맹사성에게 자문을 구하며 그의 깊은 지혜를 존중했습니다.
1438
[백성들의 영원한 스승, 고불 맹사성 서거하다]
1438년, 칩거하고 있던 온양 자택에서 78세의 나이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평소 소를 타고 다니며 악기를 즐겼고, 소탈하고 겸손한 인품으로 벼슬이 낮은 이에게도 늘 공복을 갖추고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효성이 지극하여 몇 번이나 노부의 병 간호를 위해 벼슬을 내놓으려 했으나 세종이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공무가 아닌 일에는 역마를 이용하지 않고 소를 타고 다니거나 걸어다녔으며,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는 청렴한 삶을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