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문신, 유학자, 혁명가, 사상가, 정치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4- 05:50:39
고려 말 혼란을 혁명으로 극복한 불세출의 정치가. 성리학 이념으로 조선 건국의 기틀을 다진 설계자. 한양 도성 설계 유교적 이상을 담은 제도 정비 주도. 재상 중심의 정치 체제를 꿈꾼 입헌군주제의 선구자. 요동 정벌 추진과 사병 혁파로 왕권과 갈등 비극적 최후를 맞았으나 후대에 재평가된 인물.
1342
[정도전의 탄생과 유년기]
정도전은 1342년 10월 6일 아버지 정운경과 어머니 영주 우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영주와 양주 삼각산에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정도전의 출생 연도에는 1337년 설도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 따라 1342년이 정설로 여겨집니다. 아버지 정운경은 형부상서를 지냈고, 어머니는 영주 우씨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친교로 이색과 가깝게 지냈으며, 성균관에서 이색을 만나 성리학을 심도 있게 연구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1360
[과거 급제와 성리학 입문]
공민왕 때 진사시에 급제한 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이색과 교류하며 성리학적 이념과 사상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맹자의 역성혁명론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또한 부패한 권문세족과 불교가 국가 경제를 저해하고 민생을 황폐하게 한다고 보아, 강력한 불교 비판론을 펼치기 시작했으며 이는 훗날 《불씨잡변》으로 집대성됩니다. 이 시기 정몽주와 학문적, 사상적 동지로 교류하며 고려 사회 개혁에 대한 뜻을 함께했습니다.
1363
[관료 생활 시작과 낙향]
1362년 문과에 급제한 후 1363년 충주사록, 전교시주부 등의 관직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1365년 공민왕이 신돈을 기용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는 등 순탄치 않은 관료 생활을 보냈습니다.
1366년에는 부모님이 연이어 돌아가시자 영주에서 3년간 여묘살이를 하며 학문 연구에 힘썼습니다. 그는 주자가례에 따라 3년상을 봉행하며 당대 관행과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1370년에는 박상충 등의 천거로 성균관박사가 되어 정몽주 등과 함께 성리학을 강론했습니다.
1375
[원 사신 영접 거부와 유배]
우왕 때 성균관사예·지제교가 되었으나, 원나라 사신 영접 문제로 친원파 이인임과 대립했습니다.
그는 원 사신 영접을 거부하며 '사신의 머리를 베든지 명나라로 보내겠다'고 주장하다 나주로 유배당했습니다.
유배지에서 성리학 서적을 연구하며 청년들에게 학문을 가르쳤습니다. 1377년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도 영주, 안동 등지를 유랑하며 백성들의 고통과 권문세족의 횡포를 직접 목격,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1383
[이성계와의 운명적인 만남]
1383년 가을, 정도전은 함길도 함흥의 이성계를 찾아가 세상을 구하는 길은 혁명밖에 없다고 판단, 이성계의 군사력을 절실히 여겼습니다.
이성계 또한 정도전의 학문과 경륜에 감탄하며 두 사람은 역성혁명의 동지가 되었습니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정예 군대와 일사불란한 지휘통솔에 감탄하며 '이 정도의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성공시키지 못하겠습니까?'라며 은근히 혁명의 뜻을 내비쳤습니다. 이 만남을 계기로 정도전은 이성계의 최측근이 되어 조선 건국을 위한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1388
[위화도 회군 이후 권력 장악 및 토지 개혁]
1388년 음력 6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하자, 정도전은 밀직부사로 승진하여 조준, 남은 등과 함께 전제(田制) 개혁에 착수, 조세 제도와 토지 제도를 대폭 개혁했습니다.
그는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하고 백성들에게 균등 분배하는 것을 건의하여 새로운 정권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스승 이색과 친구 정몽주 등과 의견 차이가 발생하며 관계가 소원해졌습니다. 우왕의 장인 최영 등 구세력을 제거하여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1389
[우왕 폐위와 공양왕 추대]
1389년 음력 11월, 유배된 우왕의 이성계 제거 음모가 발각되자, 정도전은 이성계, 조준 등과 함께 창왕을 폐위시키고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명분으로 공양왕을 추대하며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이 공로로 봉화현 충의군에 봉해지고 공신에 책록되었습니다.
그는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는 주장을 폈는데, 이는 후대 학계에서 조선왕조의 조작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이후 삼사좌사, 경연지사 등을 역임하며 새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주력했습니다.
1391
[군권 장악과 정몽주와의 갈등 심화]
이성계가 삼군도총제부를 만들고 정도전은 우군도총제 자리를 맡아 군권을 장악했습니다.
이어서 불교 배척과 함께 이색, 우현보 등을 처단할 것을 상소했으나, 정몽주의 탄핵을 받아 봉화로 유배되고 두 아들도 삭탈관직되었습니다.
정몽주는 정도전이 '가풍이 부정하고 파계가 불명함에도 큰 벼슬을 받아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다'고 탄핵했으나, 실제 목적은 이성계 세력 제거였습니다. 1392년 3월 이성계가 사냥 중 낙마하여 부상을 입자 정몽주 등에 의해 투옥되는 등 거듭 정치적 위기를 겪었습니다.
1392
[정몽주 격살과 정치적 재기]
1392년 4월 10일, 이방원과 조영규 등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격살함으로써 고려 왕조를 지지하는 세력이 와해되었습니다.
이는 정도전에게 큰 정치적 전환점이 되었으며, 같은 해 6월 10일 유배에서 풀려 개경으로 소환, 복직됩니다.
정도전은 유배에서 풀려나자마자 새 왕조 창업을 위한 정지 작업에 돌입하며 이성계를 도왔습니다. 이 사건은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을 결정짓는 중요한 분기점이었습니다.
[조선 건국과 개국공신]
1392년 7월 17일, 공양왕의 선양을 이끌어내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고 태조로 즉위했습니다.
정도전은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으로 문하시랑찬성사 겸 판의흥삼군부사 등 군국 요직을 겸하며 조선의 핵심 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왕명을 받아 새로운 왕조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17조의 〈편민사목〉을 발표하고, 조선 건국을 반대한 정적들을 일소했습니다. 행정, 군사, 외교, 교육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전반적인 문물 제도와 정책의 대부분을 정비하여 500년 왕조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1394
[세계 최초! 한양 도성 설계의 총책임자]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조선의 새 수도로 결정한 후, 정도전은 한양의 도시 설계에 지대한 역할을 했습니다.
경복궁 자리와 함께 궁궐, 전각, 문의 이름, 사대문과 사소문의 현판 등을 직접 지어 유교적 덕목을 담아내었습니다.
경복궁의 근정전, 인정전 등 전각 이름과 한성부의 행정분할까지 그의 손에서 탄생했습니다. 종묘의 제례법과 음악까지 제정하며 조선의 수도가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건설되도록 했습니다. 1396년부터 1년여 만에 총 길이 5만 9천 5백 자의 도성 성곽 축조를 총지휘했습니다. 그의 설계는 조선 500년의 수도를 완성하는 핵심적인 업적이었습니다.
1396
[명나라와의 외교 갈등 중심에 서다]
명나라 주원장이 조선의 외교 문서 문구를 문제 삼아 정도전을 '조선의 화의 근원'이라 지적하며 소환을 요구했습니다.
태조는 여러 이유로 거부했으나, 결국 정도전은 공직에서 물러나 동북면도선무찰리사로 체직되었습니다.
이러한 외교적 압박 속에서도 정도전은 요동 정벌 계획을 세우고, 각 지역의 왕실 측근과 공신들이 사적으로 보유하던 사병을 모두 혁파하여 국가 정규군으로 개편하려는 사병 혁파를 추진했습니다. 이는 이방원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하며 훗날 비극의 씨앗이 됩니다.
1398
[이방원과의 갈등 심화]
자신이 세운 재상 중심의 정치 체제를 위해 어린 세자 방석을 교육하고 왕권과 자신의 입지 강화를 두려워한 이방원의 눈엣가시가 되었습니다.
음력 8월, 명 태조의 사례를 인용하여 이방원을 전라도로, 이방번을 동북면으로 보내야 한다고 건의하여 태조의 승인을 얻었으나 이방원이 거부했습니다.
이방원은 정도전이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죽일 계략을 세웠다고 누명을 씌워 암살을 기도했습니다. 이 시기 정도전은 상무정신 함양과 요동 정벌 준비를 위해 사병 혁파를 강력히 추진했으나, 이는 조준 등 다른 개국공신들의 반발까지 불러일으켰습니다.
[비극적인 최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피살]
1398년 10월 6일(음력 8월 26일), 송현 남은의 첩의 집에서 술을 마시던 중 이방원의 사병들이 급습하여 피살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불리며, 정도전의 두 아들과 조카들도 함께 살해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도전이 목숨을 구걸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승자의 입장에서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삼봉집》에는 그가 피살 직전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자조(自嘲)'라는 시를 남겨 영웅다운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 조선왕조 500년간 역적으로 매도되기도 했으나, 근대에 이르러 재평가받았습니다.
1865
[고종 대 재평가와 복권]
고종 2년(1865년) 9월, 경복궁 중건 공로를 인정받아 그의 관작이 회복되고 '문헌(文憲)'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후손이 사는 경기도 양성현에 사당이 건립되고 불천지위에 추대되었습니다.
1872년에는 개국공신으로 공식 복권되고 이듬해 관직과 작위가 회복되었습니다. 고종은 유종공종(儒宗功宗) 현판을 하사하며 그의 조선 건국과 제도 마련의 공로를 기렸습니다. 이는 조선왕조 500여 년간 역적으로 매도되었던 정도전의 역사적 위상을 회복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3
[현대 재평가와 학술 연구 활성화]
2003년 삼봉 정도전 기념사업회가 출범하고, 2003년 11월과 2007년 12월에는 정도전 재평가와 그의 학문 연구를 위한 '삼봉학 학술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박정희 정부 시기에는 정몽주가 충절의 상징으로 부각되며 정도전이 폄하되기도 했으나, 1970년대 이후 재평가 여론이 일었습니다. 그의 신권정치 사상은 현대의 총리제 등과 비교되며, 토지개혁 사상은 조봉암의 농지개혁법 바탕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