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 (대한제국)
황제, 군주, 대한제국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8- 05:31:29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한국사의 비극적인 전환점에 선 인물 순종. 아편 독살 미수 사건으로 건강이 악화된 가운데 일본의 강압으로 강제 퇴위된 고종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올랐습니다. 재위 기간 동안 대한제국은 군대 해산 사법권 박탈 등 일본의 가혹한 국권 침탈을 겪으며 급속히 멸망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한일 병합 조약에 서명을 거부했으나 결국 이완용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고 창덕궁 이왕으로 불리며 망국의 한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6·10 만세 운동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1874
[비운의 황제, 순종의 탄생]
고종과 명성황후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명성황후의 자녀 중 유일하게 성인이 된 자녀였습니다.
1875
1882
1895
1897
1898
[아편 커피 독살 미수 사건 발생]
김홍륙의 사주로 고종과 함께 마시던 커피에 다량의 아편이 섞이는 독살 미수 사건을 겪었습니다.
고종은 알아차렸으나, 황태자는 이를 복용하여 치아가 빠지고 혈변을 누는 등 평생 건강이 악화되는 치명적인 후유증을 얻었습니다.
김홍륙은 유배 가는 길에 공홍식에게 아편을 건네 황제의 수라에 섞어 올리도록 사주했습니다. 공홍식은 이를 김종화에게 전달했고, 김종화는 주방에서 커피 찻주전자에 아편을 넣어 황제에게 진상했습니다. 고종은 커피의 이상한 향을 느끼고 땅에 버렸지만, 황태자는 이를 마셔 심각한 건강 문제를 겪게 됩니다. 사건의 배후 김홍륙은 10월 10일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1904
[황태자비 민씨 사망 및 순명효황후 추존]
황태자비 민씨가 사망하자 순명비로 추존되었고, 즉위 후에는 순명효황후로 다시 추존되었습니다.
1907
[대한제국군 해산과 의병 운동의 확산]
일본의 강압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이에 반발하는 거국적인 의병 운동(정미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일본은 신문지법을 제정해 언론을 탄압하는 등 국권 침탈을 가속화했습니다.
[대한제국 제2대 황제 즉위]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일본과 친일파의 압력으로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자, 그 뒤를 이어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로 등극했습니다.
즉위와 동시에 연호를 '융희'로 개원하고, 대원수로 승급했습니다.
1909
[기유각서 강요로 사법권 박탈]
이토 히로부미의 뒤를 이은 통감 소네 아라스케의 강요로 기유각서가 체결되며 대한제국의 감옥 사무 등 사법권마저 일본에 빼앗겼습니다.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의병 대대적 탄압]
일본은 남한 대토벌 작전을 실시하여 호남 지방의 의병들과 13도 창의군 등을 대대적으로 토벌하며 의병 운동을 무력화시켰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 의해 청나라 하얼빈에서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의 한반도 병합 계획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1910
[대한제국 멸망: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일본은 순종 황제에게 한일 병합 조약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순종은 끝까지 거부했으나, 당시 총리대신 이완용이 대신 서명하여 결국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합병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로써 순종은 한국사의 마지막 군주가 되었으며, 전제군주정이 붕괴되었습니다.
조약 체결 이후 순종은 모든 권한을 잃고 '창덕궁 이왕'으로 불리며 창덕궁에 거처하게 됩니다. 그는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살아야 했습니다.
1917
[일본 천황 알현을 위한 첫 해외 외유]
여행이라는 명목으로 일본 도쿄를 방문하여 일본 천황을 알현할 것을 강요받았습니다.
이는 순종의 생애 첫 해외 방문이었습니다.
경성을 떠나 부산으로, 시모노세키를 거쳐 나고야를 경유, 6월 12일 도쿄에 도착했습니다. 14일에는 다이쇼 천황과 데이메이 황후를 만나 오찬에 참석하고, 16일에는 토리이자카 왕세자궁을 방문하여 영친왕을 만났습니다. 이후 6월 23일과 24일 교토에 머문 뒤 6월 28일 조선으로 귀국했습니다.
1926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 승하]
오전 6시에 심장마비로 승하했습니다.
그의 능은 고종의 홍릉 근처인 유릉에 안장되었습니다.
[순종 장례일에 터져나온 6·10 만세 운동]
순종의 장례식 날짜에 맞추어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3·1 운동만큼 확산되지는 못했으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파가 합작한 신간회가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