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조선 국왕, 개혁 군주, 문화 군주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4- 21:57:18
조선의 22대 국왕 정조는 혼란 속 왕권 강화에 힘쓴 개혁 군주입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을 딛고 역경을 극복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규장각과 장용영 설립으로 인재 육성 및 친위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실학자 등용 수원 화성 축조 등 눈부신 문예 부흥을 주도했습니다. 탕평책을 펼치며 백성들의 삶 개선에 노력했으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꿈을 다 이루지 못했습니다.
-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 이산 탄생 및 원손 책봉
-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 (임오화변)
- 효장세자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 계승권 유지
- 세손 대리청정 시작
- 조선 제22대 국왕으로 즉위
- 홍인한과 정후겸 처형
- 왕권 강화의 요람, 규장각 설치
- 정조의 즉위를 반대하는 '정유역변' 발생
- 규장각 검서관에 서얼 인재 등용
- 홍국영, 도승지 사임
- 인재 양성의 산실, 초계문신 제도 시행
- 새로운 법전 《대전통편》 간행
- 정순왕후의 '한글 교서'로 왕실 갈등 표면화
- 사도세자 묘의 수원 이장 (현륭원 조성)
- 조선 최초의 천주교 탄압, 신해박해
- 정약용에게 '거중기' 고안 지시
- 꿈의 도시 수원 화성 축조 시작
- 왕권 과시의 정점, 을묘원행
- 세계적 무예 교본 《무예도보통지》 간행
-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 완공
- 조선 개혁의 군주, 갑작스러운 승하
1752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 이산 탄생 및 원손 책봉]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나, 요절한 형 의소세자 대신 원손으로 책봉되었습니다.
태어나던 날 왕통을 이을 원손으로 지정되며, 그의 삶은 시작부터 비범했습니다.
정조는 1752년 10월 28일(양력)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습니다. 형인 의소세자가 3살의 어린 나이로 요절한 뒤 태어났기에, 탄생 당일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원손(元孫)이 되었습니다.
1755
[4세 정조의 남다른 총명함]
네 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영조 앞에서 경전을 외우고 글씨를 쓰는 등 뛰어난 총명함을 보였습니다.
이는 왕실 내 그의 특별한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영조 31년(1755년), 영조는 어린 원손의 총명함을 기뻐하며 신하들 앞에서 경전을 읽고 글을 써보도록 했습니다. 원손은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 10자를 외고 '부모' 두 글자를 써서 영조와 신하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1757
[영조의 친필로 이름 '이산'을 받다]
할아버지 영조가 직접 『자서(字書)』를 보고 그의 이름을 '이산(李祘)'으로 정했습니다.
이는 정조에 대한 영조의 깊은 기대와 애정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영조는 1757년 2월 5일 직접 『자서』를 보고 글자를 골라 원손의 이름을 '이산'으로 정했습니다. 이는 정조의 휘(諱)로 사용되었습니다.
1761
[성균관 입학]
세손으로서 성균관에 입학했습니다.
이는 왕위 계승자로서의 정식 교육 과정을 시작했음을 의미하며, 훗날 학문적 깊이를 지닌 군주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영조 37년 음력 3월 10일(1761년) 정조는 성균관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왕실 교육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김종수 등을 사부로 모시고 엄격하게 학문을 단련했습니다.
1762
[세손,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기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망 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요청으로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는 죄인의 아들이라는 낙인으로부터 세손을 보호하려는 조치였습니다.
정조는 즉위 전까지 경희궁에서 생활했습니다.
사도세자 사망 후 세손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영조에게 세손이 경희궁에 머무를 수 있도록 요청했습니다. 자식과 생이별을 하는 셈이었지만, 아버지가 죄인으로 몰려 죽은 상황에서 세손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었으며, 정조는 1776년 국왕으로 즉위하기 전까지 경희궁에서 살았습니다.
[세손 가례(嘉禮) 거행]
훗날 효의왕후가 되는 김시묵의 딸과 가례를 올렸습니다.
이는 정조가 왕위 계승자로서의 기반을 다지는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1762년 2월 2일 정조는 김시묵의 딸을 세손빈으로 맞아 가례를 올렸습니다. 그녀는 훗날 효의왕후가 됩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 (임오화변)]
친아버지 사도세자가 할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사건은 정조의 삶과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평생의 한으로 남았습니다.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는 흉언에 맞서는 그의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1762년 윤5월 21일(음력),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혔고 8일 뒤 사망했습니다. 어린 정조는 이 비극적인 사건을 직접 목격해야 했으며, 이는 그의 즉위 후 정치적 행보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뒤 그를 복위시키고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지만, 정조는 이후에도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명예를 회복하려 노력했습니다.
1764
[효장세자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 계승권 유지]
요절한 영조의 첫 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었습니다.
이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위태로워진 정조의 왕위 후계자 지위를 법적으로 공고히 하는 중요한 절차였습니다.
영조 40년(1764년), 영조는 세손을 요절한 첫 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아 왕위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도록 했습니다. 효장세자의 빈이었던 효순왕후도 정조가 태어나기 전에 별세했으므로, 이는 왕위계승권을 유지하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였습니다.
1769
[세손 시절 기방 출입 사건]
세손 시절, 기방에 출입한 사실이 드러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걱정을 샀습니다.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와 같은 불행이 반복될까 단식농성까지 하며 사건 수습을 요청했습니다.
이는 당시 세손의 위태로운 처지를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세손은 1769년 흥은부위 정재화 등과 함께 기방에 출입했다가 화완옹주, 홍국영 등이 목격하여 혜경궁 홍씨에게 알려졌습니다.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와 같은 일이 벌어질까 염려하여 단식농성까지 하며 친정아버지 홍봉한에게 사건 수습을 요청했습니다. 홍봉한의 개입으로 기생들을 유배 보내는 등 사건이 수습되었습니다. 이 내용은 왕조실록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1772
[스승 김종수의 유배]
노론 내 청명류의 정치적 결사체가 드러나자, 영조는 당파를 조장한다고 보고 스승 김종수를 비롯한 핵심 인사들을 유배 보냈습니다.
이는 세손의 정치적 입지가 위태로웠던 상황을 보여줍니다.
1772년 노론 내 청명류(淸名流)의 정치적 결사체가 드러나자 영조는 이들이 오히려 당론을 조장한다고 보고 김종수를 비롯한 조정, 김치인, 정존겸, 이명식 등을 유배 보냈습니다. 김종수는 경상도 기장현의 금갑도로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 방면되었습니다.
1775
[세손 대리청정 시작]
82세의 영조가 노환으로 정무를 보기 어려워지자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습니다.
이는 정조의 즉위를 막으려던 노론 벽파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으며, 정조가 본격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첫걸음이 되었습니다.
1775년(영조 51년) 봄, 영조는 82세의 나이로 노환에 시달려 정무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자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습니다. 그러나 세손이 대리청정을 할 경우 입지가 궁색하게 될 것을 염려한 노론 벽파는 이를 극구 반대했습니다. 영조는 홍인한을 파직시키고 옥새를 세자궁으로 옮겨 대리청정을 맡겼으며, 세자시강원의 홍국영이 이들을 탄핵하여 세손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1776
[조선 제22대 국왕으로 즉위]
할아버지 영조의 승하로 조선의 제22대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즉위 당일, 자신의 정통성을 확고히 하고 반대 세력에 맞서기 위해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는 파격적인 선언을 했습니다.
영조의 승하(1776년 음력 3월 10일) 후, 정조는 즉위식과 동시에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했습니다. 이는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는 여덟 글자의 흉언을 유포시키던 노론 벽파 측에 정면으로 대응한 것이었습니다. 정조는 양아버지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숭하고, 친아버지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으로 추숭했습니다.
[홍인한과 정후겸 처형]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한 홍인한과 정후겸을 유배 보냈다가 사약을 내려 처형했습니다.
이는 즉위 초 정조가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지를 보여준 단호한 조치였습니다.
정조는 즉위 후 아버지의 죽음에 관여한 정후겸과 홍인한을 유배 보냈다가 사약을 내려 죽였습니다. 신하들은 정조의 외할아버지인 홍봉한의 사형도 요구했으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단식하며 반대하여 그만두었습니다.
[왕권 강화의 요람, 규장각 설치]
왕실의 글, 어진, 유품 등을 보관하고 학문을 연구하며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규장각을 설치했습니다.
이는 왕권 강화와 학문 진흥을 위한 정조의 핵심 개혁 기구였습니다.
정조는 즉위 후 창덕궁 후원에 영조의 글, 어진, 유품 등을 모아 보관할 건물을 짓고 규장각이라고 했습니다. 규장각은 선대 왕의 유품을 보관하는 왕실 박물관이자 왕실 도서관 역할 외에, 친위 세력 양성을 위한 정치적 목적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홍국영의 특별 발탁과 득세]
즉위 초 자신을 도운 홍국영을 왕실 호위 임무를 맡는 숙위대장으로 임명하며 막강한 실권을 부여했습니다.
전례 없는 그의 득세는 세도 정치의 시작으로 평가되기도 했습니다.
정조는 홍국영을 특별히 발탁하여 동부승지로 삼았다가 도승지로 올리고, 임금의 호위를 위한 숙위소를 설치하여 홍국영을 숙위대장에 임명했습니다. 전례가 없던 이러한 조치로 홍국영은 막강한 실권을 쥐게 되었으며, 그의 득세는 실권을 쥔 세도 정치의 시작으로 평가됩니다.
1777
[경희궁 괴한 침입 사건]
괴한이 경희궁에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정조는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는 왕실의 안위가 위협받는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1777년(정조 1년) 7월, 괴한이 경희궁에 침입하자 정조는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정조의 즉위를 반대하는 '정유역변' 발생]
정조의 외척인 홍상범 등이 반정을 꾀한 '정유역변'이 발생했습니다.
홍국영이 사건을 책임지고 추대된 은전군을 자진하도록 조치하는 등 반대 세력을 제거하며 왕권을 안정시켰습니다.
1777년 8월, 괴한이 다시 침입하다 잡혔는데, 조사 결과 정조의 외척인 홍상범, 홍계능 등이 유배되어 있던 홍술해와 모의하여 반정을 꾀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홍국영이 이 사건을 책임지고 처리하여 이들이 추대한 은전군을 자진하도록 조치하고 홍술해, 홍상범에게 사형을 내렸습니다. 정후겸의 양모인 화완옹주도 유배되었습니다. 이로써 정조 즉위 1년 안에 즉위에 반대했던 세력은 김귀주를 제외하고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1778
[금난전권 폐지 건의]
채제공이 육의전의 독점권인 금난전권 폐지를 건의했습니다.
이는 정조의 상업 개혁 정책의 중요한 시발점이 됩니다.
1778년(정조 2년), 채제공은 박제가, 이덕무 등과 함께 사은사 겸 진주사로 베이징에 다녀온 후 이용후생의 경제학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채제공은 육의전이 금난전권을 남용하여 물산을 독점하고 물가를 올리는 것을 막기 위해 금난전권의 폐지를 건의했습니다.
1779
[규장각 검서관에 서얼 인재 등용]
규장각에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 등 서얼 출신 4명을 검서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이는 신분과 재능을 중시하는 정조의 인재 등용 원칙을 보여주는 파격적인 조치였습니다.
1779년(정조 3년) 규장각에는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 등 네 명이 검서(檢書)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서류(庶類), 즉 서얼 신분이었습니다. 정조는 이들을 발탁한 이유로 '문장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들의 처지가 남과 다르기 때문에 스스로 능력을 드러내도록 돕고자 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홍국영, 도승지 사임]
과도한 권력을 행사하던 홍국영이 도승지에서 사임하며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는 정조가 측근의 독주를 경계하고 왕권 중심의 정치를 펼치려는 의지를 보여준 사건입니다.
1779년(정조 3년) 홍국영은 도승지를 사임했습니다. 이는 그의 지나친 권력 탐욕과 외척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억제하려는 정조의 정책에 반하는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홍국영은 낙향 후 탄핵 상소가 이어져 횡성과 강릉 등지로 방출되었다가 1781년 사망했습니다. 정조는 그의 죽음을 듣고 스스로를 탓하기도 했습니다.
1781
[인재 양성의 산실, 초계문신 제도 시행]
37세 이하의 젊은 당하관을 선발하여 규장각에서 집중 교육하는 '초계문신' 제도를 시행했습니다.
이는 왕권의 친위 세력을 양성하고 인재를 재교육하기 위한 혁신적인 정책이었습니다.
정약용, 채홍원 등이 이 제도를 통해 성장했습니다.
정조는 초계문신(抄啓文臣)제도를 두어 규장각에서 교육을 담당하게 했습니다. 본래 의정부에서 학문적 재능이 있는 젊은 인재를 발탁하여 보고하는 제도였으나, 정조는 37세 이하의 당하관을 초계문신이라 칭하고 규장각에서 학문을 연마하도록 했습니다. 이들은 40세가 되면 실제 국정에 참여했으며, 정조 재위기간 동안 총 138명이 초계문신이 되었습니다. 정조는 초계문신이 배워야 할 학문의 강목을 규정하고 정기적으로 시험을 보게 했습니다.
1783
[뛰어난 화가 발굴, 자비대령화원 선발]
도화서 화원 중 '자비대령화원'을 선발하여 규장각에 파견, 왕실의 주요 화사(畵事)를 담당하게 했습니다.
정조는 화원들의 그림에 대한 탁월한 안목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는 조선 회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783년(정조 7년) 도화서의 화원 가운데 자비대령화원을 선발하여 규장각에 파견하여 왕실의 주요 화사(畵事)를 담당하게 했습니다. 정조는 규장각 자비대령화원제를 운영하면서 각 화원들의 장단점을 일일이 품평할 만큼 세심한 안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1785
[새로운 법전 《대전통편》 간행]
경국대전과 속대전을 통합한 법전 《대전통편》을 간행했습니다.
이는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정조의 개혁 조치를 법제화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업이었습니다.
《대전통편》은 1785년(정조 9년) 발간된 법전으로, 정조는 편찬 사업에 직접 관여하고 보고를 받았습니다. 이 법전은 총 723조로 구성되었으며, 기존의 법령을 통합하고 새롭게 도입한 규장각 제도를 정비하는 등 중앙집권체제를 한층 강화한 법령이었습니다. 《대전통편》은 훗날 《대전회통》이 발간될 때까지 사용되었습니다.
1786
[정순왕후의 '한글 교서'로 왕실 갈등 표면화]
정조의 후궁과 아들이 차례로 사망하자, 법적 할머니이자 왕실 최고 어른인 정순왕후가 이들의 죽음이 수상하다는 한글 교서를 승정원에 내려 왕실 내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났습니다.
이는 은언군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등 정조의 반대파가 세력을 견제하려는 시도로 이어졌습니다.
1786년(정조 10년)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와 문효세자, 옹주가 차례로 사망하자, 정순왕후는 한글로 된 교서를 승정원에 보내 이들의 죽음이 수상하니 범인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정순왕후는 상계군 이담을 장조(사도세자)의 죽음에 연루시켜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을 죄인으로 몰아갔습니다. 은언군은 결국 강화도로 유배되었습니다. 훗날 '강화도령'으로 불리는 철종이 그의 손자입니다.
1789
[사도세자 묘의 수원 이장 (현륭원 조성)]
오랫동안 미뤄왔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이장하고 '현륭원'이라 명명했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명예 회복과 더불어 수원 화성 축조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789년(정조 13년) 10월,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명명했습니다. 이는 정조의 오랜 숙원이었습니다.
1791
[조선 최초의 천주교 탄압, 신해박해]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 신주를 불태우고 유교식 상례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처형된 '신해박해'가 발생했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 천주교 탄압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791년(정조 15년) 천주교 신자인 윤지충(尹持忠)이 조상 숭배를 거부하고 신주를 모두 불태워 땅에 묻었으며 어머니의 상례를 전통적인 유교 방식으로 치르지 않아 참수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의 로마 가톨릭교회 교계에서 최초의 천주교 탄압으로 기록됩니다.
1792
[정약용에게 '거중기' 고안 지시]
수원 화성 축조를 위해 실학자 정약용에게 효율적인 도구 개발을 지시하여, 서양의 과학 기술이 집약된 '거중기'를 고안하게 했습니다.
이는 최첨단 기술을 활용한 그의 실용적인 면모를 보여줍니다.
1792년(정조 16년) 초여름, 정조는 정약용에게 성을 축조하는 데 유용한 도구를 개발하라고 지시하여 거중기를 고안하게 했습니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참고 자료로 청나라 강희제 때 편찬한 백과사전인 『도서집성』과 독일 출신 선교사 요하네스 테렌츠가 지은 물리학 원리를 설명한 『기기도설』을 전달했습니다.
1794
[꿈의 도시 수원 화성 축조 시작]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보호하고, 왕권 강화의 상징이자 새로운 정치 구상의 중심지로 삼기 위해 수원 화성 축조를 시작했습니다.
최신 건축 기술과 과학 원리가 총동원된 이 성은 그의 비전이 담긴 역작입니다.
정조는 아버지 장조(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긴 뒤 화성(華城)을 축조했습니다. 화성은 1794년에 착공되었습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 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 형태의 성으로, 문루, 수문, 공심돈, 장대 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하나의 성곽을 이루었습니다.
1795
[왕권 과시의 정점, 을묘원행]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여 수원에서 대규모 과거 시험을 열고 대소 신료와 군사를 이끌고 능행을 했습니다.
이는 왕권과 위엄을 대내외에 과시한 정조 시대 최대 규모의 행사였습니다.
1795년(정조 19년) 을묘 원행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여 수원에서 과거를 열고 대소 신료와 군사를 이끌고 대규모로 거둥한 것입니다. 친위 부대인 장용영의 군사들을 수반한 을묘 원행은 군주의 힘을 대내외에 과시한 것이었습니다. 이때의 원행을 기록한 그림이 《정조 대왕 능행 반차도》로, 1,779명의 인물과 779마리의 마필이 등장합니다.
[주문모 밀입국 사건과 남인 세력 약화]
중국 천주교 신부 주문모가 밀입국한 사건이 적발되면서, 당시 정조의 핵심 측근이던 정약용이 외직으로 나가고 채제공이 수세에 몰리는 등 남인 세력이 중앙 정치에서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795년(정조 19년) 중국 천주교 신부 주문모가 밀입국한 사건이 적발되면서 정약용이 외직으로 나가게 되고, 채제공은 수세에 몰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후 남인은 중앙정치에서 세력을 형성할 수 없었습니다.
[세계적 무예 교본 《무예도보통지》 간행]
국왕 직속 친위부대 장용영의 훈련 교본인 《무예도보통지》를 간행했습니다.
이는 정조가 무예 단련에 큰 관심을 기울였음을 보여주는 역작입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의 일기를 모아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여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한 것도 이 시기입니다.
정조는 《병학통》을 직접 지어 군사 훈련을 중요시했고, 정기적인 훈련을 감독하고 직접 군사를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30명에서 출발한 장용영은 수원으로 진영을 옮긴 뒤 18,000명까지 늘어났습니다. 정조는 규장각 검서인 이덕무, 박제가와 장용영 장교인 백동수에게 훈련교본인 《무예도보통지》를 간행하도록 하고, 1795년(정조 19년) 이순신의 글을 모아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하면서 이순신의 일기들을 모아 《난중일기》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1796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 완공]
착공 2년 7개월 만에 수원 화성이 완공되었습니다.
이는 거중기 등 최신 기술과 효율적인 공정 관리를 통해 이룩한 조선 건축사의 기념비적인 성과입니다.
공사 과정에서 인부들에게 정당한 급여를 지급하고 모든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여 후대에 귀감이 되었습니다.
수원 화성은 1794년 착공하여 1796년 완공되었습니다. 공사 책임자는 채제공이었고,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를 활용하여 비용을 절감하고 기간을 단축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정조가 백성을 부역의 형태로 강제 징발하는 대신, 축조에 동원된 인부에게 급여를 지급하고 공사에 사용된 자재, 인건비 등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입니다. 『화성성역의궤』는 화성 복원 공사의 밑바탕이 되어 원형 그대로 복원할 수 있게 했습니다.
1797
[정확한 한자음 규범, 《규장전운》 간행]
현실 한자음(속음)이 없는 규범음 중심의 운서 《규장전운》을 간행했습니다.
이 책은 한겨울 제주 문과 시험과 수원 무과 시험에 상으로 하사될 만큼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1797년 정조는 현실 한자음(속음)이 없는 것은 세종 시대의 『동국정운』과 같으나 규범음이 추가로 표기된 『규장전운』을 간행했습니다. 이는 한자 발음의 표준을 제시하고자 한 노력이었습니다. 정조는 편찬된 《규장전운》을 제주 문과 시험과 수원 무과 시험에 상으로 하사했습니다.
1800
[조선 개혁의 군주, 갑작스러운 승하]
갑작스러운 종기 발병 후 병세가 악화되어 창경궁 영춘헌에서 47세의 나이로 승하했습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독살설' 등 다양한 추측이 제기될 만큼, 조선에 큰 파장을 남긴 비극적인 순간이었습니다.
1800년(정조 24) 음력 6월 초 정조는 종기를 앓았고,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양력 8월 18일(음력 6월 28일) 창경궁 영춘헌에서 47세를 일기로 승하했습니다. 종기 치료를 위해 수은 증기를 쐬는 연훈방까지 시도했으나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의 죽음 직후 경상도 안동에서는 장시경 등 남인 출신 거족들이 정조의 독살을 주장하며 거병하려다 실패하여 처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정약용 또한 자신의 문집에 독살설을 암시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1821
[건릉 천장 및 효의왕후와 합장]
효의왕후 승하 후, 정조의 능인 건릉이 현재의 화성시 자리로 천장되어 효의왕후와 합장되었습니다.
이는 정조가 생전에 아버지 곁에 묻히고 싶어 했던 소망을 이룬 결과였습니다.
정조는 생전에 아버지 사도세자 곁에 묻히고 싶어 했으며, 본래 능인 건릉은 아버지 장조(사도세자)의 융릉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821년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영돈녕부사 박수종의 건의로 건릉은 현재의 자리(경기도 화성시)로 천장되어 효의왕후와 함께 합장되었습니다.
1899
[묘호 '정조'로 격상]
대한제국 고종 황제에 의해 정조의 묘호가 '정종(正宗)'에서 '정조(正祖)'로 격상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업적과 위대함이 후대에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정조의 본래 묘호는 '정종(正宗)'으로, 사후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이었습니다. 묘호인 정종(正宗)은 '올바름으로 모든 사람을 감복(복종)시켰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대한제국 고종 황제 때인 1899년, '정종'에서 '정조'로 격상되었으며, '선황제(宣皇帝)'로 추존되어 정식 시호는 '정조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