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 (조선)

조선 국왕, 왕세자,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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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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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 왕세자,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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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0대 국왕. 숙종과 희빈 장씨의 아들로 재위 4년 동안 병약한 몸으로 노론과 소론의 극심한 당쟁에 시달렸다. 어머니 장희빈의 죽음과 자신의 즉위 과정에서 불안정한 위치에 놓였으며 후사 문제와 독살설은 영조의 정통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재위 기간 내내 끊이지 않는 정치적 갈등으로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1688

[희빈 장씨의 아들, 경종 탄생!]

숙종과 희빈 장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후사를 근심하던 숙종은 아들 탄생에 크게 기뻐했다.

이는 그의 비극적인 생애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1689

[백일도 안된 아기, 원자로 책봉되다!]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된 아기가 왕의 맏아들(원자)로 책봉되었다.

이와 함께 생모 장씨는 정1품 희빈이 되었는데, 이는 정치적 파란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인현왕후 폐위, 정국이 뒤집히다!]

숙종이 태어난 아기(경종)를 원자로 책봉하는 것에 서인이 반대하자, 숙종은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서인을 대거 실각시키고 남인을 기용하는 환국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서인 출신 인현왕후가 폐위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며 정국이 완전히 뒤집혔다.

1690

[미래의 왕, 왕세자로 책봉되다!]

경종이 정식으로 조선의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이는 그가 장차 왕위를 이을 것임을 공식화하는 중요한 절차였으나, 그의 지위는 어머니의 파란만장한 삶과 함께 늘 불안정했다.

[희빈 장씨, 왕비가 되다!]

인현왕후가 폐위된 후,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이는 왕실의 권력 구도를 완전히 뒤바꾸는 사건이자, 장희빈의 전성기를 알리는 순간이었다.

1694

[다시 뒤집힌 정국, 희빈 장씨는 빈으로 강등!]

숙종이 갑작스럽게 환국을 일으켜 남인 정권을 무너뜨리고 서인을 재등용했다.

이 과정에서 폐위되었던 인현왕후가 복위하고,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는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나 빈으로 강등되는 큰 변화를 겪었다.

이는 노론과 소론 간의 당쟁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696

[세자빈 심씨와 혼인하다!]

경종이 심호의 딸 심씨(후일 단의왕후)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세자빈 심씨는 경종의 즉위 이전에 사망하며 후사를 두지 못했다.

1701

[어머니 희빈 장씨, 사약을 받다!]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와 그 측근들이 인현왕후를 저주하고 모해했다는 노론의 고변이 있었다.

숙종은 관련자들을 처벌하고 희빈 장씨에게 자진을 명하여 사사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경종에게 큰 상처를 남겼고, 그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1717

[숙종과 노론 영수의 '밀담', 세자 지위 흔들리다!]

어머니 희빈 장씨가 사사되면서 경종의 세자 지위는 노론 세력의 압박 속에 불안정했다.

숙종이 노론의 영수 이이명과 단둘이 만나 세자의 후사에 대해 언급한 '정유독대'는 사관과 유생들의 강한 비판을 받으며 경종의 지지 세력인 소론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왕이 사관을 물리고 신하와 단둘이서 만나는 '독대'는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이명은 세종의 후손이었고, 이 만남의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되지 않았으나 경종의 후사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추정되어 소론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숙종, 병으로 세자에게 국사 맡기다!]

숙종은 자신의 병세가 심해졌음을 이유로 왕세자(경종)에게 국사를 대신 처리하는 '대리청정'을 명했다.

이는 숙종 말년 노론과 소론의 정쟁이 극심해지는 가운데 이루어진 조치였다.

1718

[세자빈 단의왕후 승하, 후사 문제 부각!]

경종의 첫 세자빈 심씨(후일 단의왕후로 추존)가 사망했다.

경종에게 후사가 없었기에 이는 이후 그의 이복동생인 연잉군(영조)을 둘러싼 후계 문제와 노론-소론 간의 정쟁을 더욱 격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세자빈, 선의왕후 어씨를 맞이하다!]

경종이 어유구의 딸 어씨(후일 선의왕후)를 새로운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다.

그녀는 경종의 계비가 되어 그의 짧은 재위 기간을 함께 했다.

1720

[제20대 조선의 왕, 경종 즉위!]

경희궁 숭정문에서 조선의 제20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숙종의 병신처분 이후 노론이 정국을 장악한 가운데 즉위했기에, 그의 왕권은 시작부터 불안정하고 미약했다.

이는 그의 짧은 치세 내내 이어질 정치적 격변을 예고했다.

[희빈 장씨 추숭, 다시 불붙은 당쟁!]

경종 즉위 직후 소론을 중심으로 유학 조중우가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의 명호(추존)를 정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는 장희빈 사사에 일조했던 노론의 거센 반대를 불러일으키며 다시 당쟁의 불씨가 되었다.

조중우는 제왕의 효행과 '어미가 아들로써 존귀하게 된다'는 유교적 대의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는 숙종이 희빈 장씨의 작호를 거두지 않고 천장과 망곡례를 허가한 것이 경종 즉위 후 희빈을 추존할 수 있도록 한 '은밀한 뜻'이었다고 주장했다.

[희빈 추숭 상소, 목숨을 앗아가다!]

희빈 장씨 추숭을 주장했던 유학 조중우가 유배를 가는 도중 사망했다.

경종은 그를 변방으로 유배 보내려 했으나, 노론 대신들은 조중우를 국문할 것을 요구하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노론의 반격, '무고의 옥' 재조명 요구!]

성균관 유생 대표 윤지술이 동맹휴학(권당)을 선언하며, 숙종대왕 묘비명(지문)에 희빈 장씨가 사사된 '무고의 옥' 사건을 다시 기록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희빈 장씨 추숭을 반대하는 노론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윤지술은 숙종이 희빈을 사사한 '신사년의 처분'은 국가의 만세를 염려한 일이며, 왕의 지문에 이를 누락하는 것은 왕의 의도를 감추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소론과 노론 간의 치열한 정치적 공방을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왕의 생모 비난, 결국 처형되다!]

국왕의 생모인 희빈 장씨를 망령되이 비난했다는 죄로 성균관 장의 윤지술이 처형되었다.

희빈 추숭을 주장한 조중우에 이어 윤지술까지 목숨을 잃으며 당시의 격렬한 당쟁 상황을 보여주었다.

1721

[영조, 왕세제로 책봉되다!]

경종에게 후사가 없자 노론의 거듭된 주청으로 이복동생 연잉군(후일 영조)이 왕세제(왕의 동생이지만 다음 왕위 계승자)로 책봉되었다.

이는 노론과 소론 간 권력 다툼의 새로운 불씨가 되었고, 왕권의 불안정성을 더욱 심화시켰다.

1722

[노론 4대신 처형! 피로 얼룩진 '신임사화'!]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 강경파가 왕세제 연잉군(영조)을 지지하는 노론 세력을 '불충'과 '반역'으로 몰아 대규모 숙청을 단행했다.

노론의 4대신(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을 포함해 50여 명의 고관이 사형당하고 그 일족이 유배, 투옥되는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노론은 정치적 위기를 맞았으나, 경종의 급서 후 영조가 즉위하면서 상황은 다시 역전된다.

[왕의 '건강'을 문제 삼은 불경한 언행!]

청나라에 세제 책봉 승인을 받기 위한 자문에 경종이 후사를 이을 수 없을 만큼 '병약하다(위약)'는 내용이 포함되어 왕을 모욕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이로 인해 주청 부사 윤양래와 서장관 유척기가 유배되는 등 경종의 위약 문제가 공공연히 거론되며 왕권의 위신이 추락했다.

'국본을 미리 세우는 것은 종묘를 중하게 여긴 까닭'이라며 세제 책봉의 정당성을 주장하던 노론은 청나라에 제출하는 자문에 '위약'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이 사실이 알려지자 소론은 이를 '없는 것을 날조하여 임금을 무함'한 불충한 행위라며 맹비난했다.

[경종, 어머니 희빈 장씨를 추존하다!]

신임옥사로 노론을 축출하고 소론이 정국을 주도하게 된 후, 경종은 비로소 어머니 희빈 장씨를 '옥산부대빈'으로 추존했다.

이는 21년 전 비극적으로 사사되었던 어머니의 명예를 회복시키려는 경종의 숙원 사업이었다.

1724

[경종 독살설, 조선을 뒤흔들다!]

경종의 갑작스러운 사망 후,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이 불거지며 왕세제였던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음모론이 소론 과격파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특히 경종이 승하 직전 게장과 감을 먹고, 영조가 어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삼과 부자를 강권한 점이 독살설의 주요 근거로 제시되었다.

이 독살설은 영조의 재위 기간 내내 그의 정통성에 대한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했다. 김일경의 모의 사건, 이천해의 난동, 이인좌의 난, 나주 괘서 사건 등 수많은 정치적 사건과 반란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특히 나주 괘서 사건의 주모자 신치운은 영조에게 친국을 받을 때 '갑진년(1724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는다'고 말하며 독살설을 간접적으로 암시해 영조를 분통하게 만들기도 했다.

[수상한 음식, 경종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다!]

평소 잔병치레와 소화불량에 시달리던 경종이 저녁에 게장과 감을 먹은 후 갑작스럽게 병세가 악화되었다.

당시 의가에서 금기시하던 음식 조합이라 후일 경종 독살설의 가장 중요한 근거 중 하나로 회자된다.

경종의 병세는 이미 8월 초부터 제대로 식사를 못할 정도로 좋지 않았다. 약방에서는 '게장과 생감은 의가에서 매우 꺼려하는 것'이라며 두시탕과 곽향정기산을 진어할 것을 청했다.

[의식불명 경종, 영조의 '인삼·부자' 처방 논란!]

경종이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자, 왕세제 영조가 어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삼과 부자가 양기를 회복시킨다'며 인삼과 부자를 강력히 처방하게 했다.

그러나 이 처방 후 경종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다음날 승하했고, 이는 훗날 독살설의 핵심 증거가 되었다.

어의 이공윤은 인삼차를 많이 쓰지 말라고 반대했지만, 영조는 '지금이 어떤 때인데 자기 의견을 세우려고 인삼 약제를 쓰지 못하게 하는가'라며 강권했다. 경종은 인삼차를 두 번 복용한 후 잠시 상태가 나아지는 듯했으나 결국 회복하지 못했다.

[조선 20대 왕 경종, 갑작스럽게 승하하다!]

조선의 제20대 왕 경종이 창경궁 환취정에서 35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승하했다.

그의 짧은 재위 기간은 어머니 희빈 장씨의 비극적인 죽음과 노론-소론 간의 극심한 당쟁으로 얼룩졌으며, 그의 죽음은 이후 영조의 정통성을 위협하는 '독살설'로 끊이지 않는 논란을 낳았다.

1754

[영조, '독살설' 해명을 담은 책을 펴다!]

영조는 자신이 경종의 죽음과 무관하다는 내용을 담은 책 '천의소감(闡義昭鑑)'을 직접 기록했다.

이는 수십 년간 이어진 독살설 논란과 자신의 정통성 시비에 대한 영조 자신의 공식적인 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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