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조선)
조선 국왕, 왕권 강화, 환국정치, 민생 경제 발전, 국방 강화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6:44
조선의 제19대 국왕으로 45년 10개월간 재위하여 조선 역대 임금 중 영조에 이어 두 번째로 긴 재위 기간을 기록했습니다. 재위 기간 동안 환국정치를 통해 신권(臣權)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력하게 강화했습니다.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상평통보를 장려하여 민생 안정과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백두산 정계비 건립과 안용복의 활동으로 국경과 영토를 확정하는 등 외교 및 국방 분야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1661
[숙종 탄생과 태몽]
현종과 명성왕후의 외아들로 경덕궁 회상전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효종은 태몽으로 용이 이불에 있는 꿈을 꾸고 손자의 이름을 용상이라 지었으나, 효종은 손자의 출생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숙종은 성인이 된 후 이름을 용상에서 광으로, 다시 돈 또는 순으로 개명했다.
1667
1674
[갑인예송과 남인 정권 수립]
즉위한 해 제2차 예송(갑인예송)이 터지자, 남인 허목 등의 기년설을 지지하고 서인을 배척하여 남인 정권을 수립했다.
이는 숙종이 왕권을 바탕으로 당파 간 세력 조절을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13세 어린 나이에 즉위, 친정 선언]
13세의 어린 나이로 조선의 제19대 임금으로 즉위했다.
그는 속깊은 모습으로 수렴청정을 거부하고 직접 국정을 통치하겠다고 선언하며 어린 나이에 주체적인 통치 시작을 알렸다.
1680
[경신환국 발발, 서인 집권]
허적의 서자 허견 등이 복선군을 추대하려던 '삼복의 옥' 음모가 발각되자, 숙종은 남인들을 대거 축출하고 서인을 등용하는 '경신환국'을 단행했다.
이는 숙종의 환국정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1682
[조선 5군영 체제 완성]
서인 정권이 남인이 장악했던 훈련별대를 정초군과 통합하여 '금위영'을 발족시킴으로써 조선의 군사 제도를 '5군영' 체제로 완성시켰다.
이로써 왕이 군대 통수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게 되었다.
1683
[서인 분열 (노론 vs 소론)]
서인 내부에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으로 분열이 일어났다.
이들은 대의명분과 실리를 두고 정책적 차이를 보였다.
1688
[희빈 장씨 총애와 승격]
숙종은 용모가 출중한 후궁 숙원 장씨를 총애하여 소의로 승격시켰다.
인현왕후가 6년이 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자, 이 총애는 이후 정치적 파란의 씨앗이 된다.
1689
[기사환국 발발, 희빈 장씨 왕비 등극]
희빈 장씨가 낳은 왕자 윤(경종)을 원자로 책봉하는 문제를 두고 남인과 서인이 극심하게 대립했다.
결국 서인들이 유배되거나 죽임을 당하고, 인현왕후가 폐위되는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희빈 장씨는 정비가 되고 그녀의 아들은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남인이 정권을 독점했다.
1691
[사육신 명예 회복]
숙종은 단종 폐위와 관련된 사육신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
이는 왕권 강화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려는 노력이었다.
1693
[소빙기와 인구 급감]
1693년부터 1699년까지 '소빙기'로 불리는 냉해가 이어져 한국에서도 잇단 흉년, 홍수, 질병으로 인해 약 142만 명의 인구가 감소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 시기 사회 불안이 가중되었다.
1694
[갑술환국 발발, 인현왕후 복위]
숙종의 갑작스러운 결정으로 폐위되었던 인현왕후의 복위가 선포되고, 당시 중궁이었던 희빈 장씨는 다시 빈으로 강등되는 '갑술환국'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남인은 거의 재기불능 상태에 빠지고 노론과 소론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수도 방위 강화 위한 성곽 축조]
청나라 내란과 관련하여 수도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강화도에 성을 쌓고, 맞은편 통진에도 문수산성을 축조하는 등 국방력 강화에 힘썼다.
1696
[안용복의 활약, 울릉도·독도 영유권 강화]
수군 출신 안용복이 울릉도와 우산도(독도)에 출몰하는 일본인들을 쫓아내고 일본 당국과 담판을 벌여 우리의 영토임을 천명했다.
이를 계기로 조선 정부는 일본 막부와 울릉도 귀속 문제를 확정하고 해양 방어 정책을 강화했다.
1697
[백성들의 조세 정책 저항]
숙종의 조세 정책 실패와 가혹한 수탈에 굶주린 경기도 광주 백성 수백 명이 서울로 몰려와 대신들에게 곡식을 요구하고 수어사의 집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숙종은 강경책으로 관련자들을 처형하며 사태를 수습했다.
1698
[단종과 정순왕후 명예 회복]
숙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비극적으로 죽은 단종(노산대군)과 그 아내 정순왕후(노산대군부인 송씨)의 복위를 청하는 주장을 받아들여 각각 묘호와 시호를 올렸다.
[청나라 곡물 수입으로 기근 해결]
지속되는 흉년과 기근으로 고통받는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청나라에서 좁쌀 4만 석을 수입하여 서울, 경기, 충청, 서북 지방에 나누어주며 급한 불을 껐다.
1701
[인현왕후 승하]
인현왕후가 복위된 지 7년 만에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사망 직전 희빈 장씨가 다시 중궁에 복위되는 것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희빈 장씨 사사]
인현왕후 사망 직후 숙종은 희빈 장씨 처소에 무당을 불러 굿을 한 것을 이유로,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혐의를 씌워 그녀를 사사시켰다.
이 사건은 세자(경종)의 입지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1703
1704
1705
[대보단 설치]
노론의 주장에 따라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운 명나라의 은혜를 기리고 명의 유교문화를 계승한 유일한 문명국임을 확인하기 위해 명나라 태조와 신종을 제사하는 대보단을 창덕궁 안에 설치했다.
1707
[이순신 사당 '현충' 호 하사]
이순신 사당에 '현충'이라는 호를 내리고, 1709년에는 의주에 강감찬 사당을 건립하여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1708
[대동법 전국 확대 (황해도)]
광해군 이후 꾸준히 확대되던 대동법을 황해도 지방까지 확대하여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실시하게 되었다.
이는 토지개혁과 함께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는 중요한 경제 조치였다.
1709
1711
1712
[백두산 정계비 건립, 국경 확정]
청나라와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청과 협상하여 함경감사 이선부로 하여금 백두산 정상에 '정계비'를 세워 청과 조선 간의 영토 경계선을 확정했다.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 토문강을 경계로 삼아 조선의 영토 확장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했다.
1713
[존호 추상 논쟁과 수락]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노론이 숙종에게 존호를 올리겠다고 주청했으나, 숙종은 이를 사양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국정이 마비될 지경에 이르자 숙종은 마지못해 '현의·광륜·예성·영렬'이라는 존호를 수락했다.
1717
[경종의 대리청정 시작]
숙종은 아들 경종(왕세자 윤)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했다.
이는 숙종 말년 정국을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이명과의 '정유독대']
숙종은 사관과 승지를 배제한 채 노론 영수 좌의정 이이명과 비밀리에 '정유독대'를 실시했다.
이 자리에서 숙종이 연잉군과 연령군을 부탁했다는 설이 있으며, 이는 후일 신임옥사의 빌미가 되었다.
1719
[조선 통신사 일본 파견 (3차)]
일본에 조선 통신사를 세 번째로 파견하여 왜은 사용 조례를 확정하고 왜관 무역을 정비시켰다.
1720
[숙종 승하]
재위 46년 동안 스트레스와 등창, 노환 등이 겹쳐 경덕궁 융복전에서 58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승하 직전 시력 저하와 배가 부풀어 오르는 증상이 있었으며, 구토 후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