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조선 국왕, 폐위된 군주, 외교 정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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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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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 폐위된 군주, 외교 정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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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5대 국왕 광해군은 임진왜란 후 피폐해진 민생을 안정시키려 대동법을 시행하고 명-후금 사이에서 실리 외교로 격변하는 국제 정세 속 조선의 생존을 도모했습니다. 그러나 친형제와 이복동생을 숙청하고 생모를 폐위하는 폐모살제 논란 그리고 무리한 궁궐 공사로 민심을 잃어 결국 연산군에 이어 두 번째로 반정에 의해 폐위된 비운의 왕입니다. 현대에는 그의 외교적 역량이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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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5

[탄생과 유년기]

조선 14대 국왕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서차남입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부왕 선조의 냉대 속에 성장했으며, 임진왜란 중 외할아버지 김희철마저 전사하며 기댈 곳 없이 외로운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1591

[종계변무 공신 책록]

부왕 선조가 기뻐했던 종계변무(宗系辨誣) 성사 당시, 광해군은 친형 임해군, 이복동생 신성군, 정원군, 순화군 등과 함께 '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책록되었습니다.

왕자로서의 첫 공식적인 기록입니다.

1592

[임진왜란 발발과 세자 책봉 문제의 급부상]

임진왜란이 갑작스럽게 발발하며 왕세자 책봉 문제가 급부상했습니다.

선조는 총애하던 신성군을 염두에 두었으나, 전란 속에서 신성군이 사망하고 '분조(分朝)'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될 운명을 맞게 됩니다.

[전시 세자 책봉과 분조 지휘로 민심 확보]

임진왜란 발발 직후, 피난지 평양에서 조선의 왕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광포한 성격의 형 임해군을 대신해 세자의 자리에 오른 그는 '권섭국사(權攝國事)'의 직위로 '분조'를 이끌며, 피난 간 선조를 대신해 전란 수습의 중책을 맡았습니다.

특히 평안도, 함경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고 민심을 위무하며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습니다.

1598

[임진왜란 종전 후 선조의 견제 심화]

임진왜란 종전 후에도 광해군은 부왕 선조의 심한 견제를 받았습니다.

신성군과 정원군이 호성공신에 추가 수록된 반면, 전쟁 승리에 큰 공을 세운 광해군에 대한 포상은 기록에 없어 냉대와 불안한 입지를 보여줍니다.

명나라도 적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의 세자 책봉 승인을 거부하며 입지를 더욱 흔들었습니다.

1600

[의인왕후 사망]

부왕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가 사망했습니다.

이는 2년 뒤 인목왕후가 선조의 계비가 되며 영창대군 출생과 폐모살제 사건의 시발점이 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1602

[인목왕후, 선조의 계비로 책봉]

선조의 계비로 인목왕후가 책봉되었습니다.

이는 훗날 광해군과의 비극적인 갈등의 씨앗이 됩니다.

1604

[명나라의 왕세자 광해군 승인 거부]

명나라는 조선 왕세자로 광해군을 승인하는 것을 거듭 거부하며 그의 왕위 계승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광해군의 정통성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었습니다.

1606

[영창대군 출생과 왕위 계승 위기 심화]

인목왕후가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낳자, 선조는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습니다.

선조는 서얼 출신으로서 겪었던 어려움 때문에 적통 계승을 선호했으나, 임진왜란 중 신망을 쌓은 광해군을 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북인 내부에서도 광해군 지지파(대북)와 영창대군 지지파(소북)로 나뉘는 등 정국은 더욱 혼란에 빠졌습니다.

1608

[민생 안정의 초석, 대동법 시행]

즉위 초,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민생 안정을 위해 '선혜청'을 설치하고 경기도에서 쌀로 조세를 내도록 하는 조세 개혁인 '대동법'을 시행했습니다.

이는 소득에 따라 세금을 내는 방식의 개혁으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자 한 그의 노력을 보여줍니다.

[수많은 난관 끝에 조선 15대 국왕으로 즉위]

지병이 악화된 선조가 광해군에게 왕위를 계승한다는 교서를 내렸으나, 유영경이 이를 감추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선조 사망 후 왕위 계승 결정권이 인목왕후에게 넘어갔고, 인목왕후는 유영경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광해군 즉위를 결정, 마침내 34세의 나이로 조선의 15대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1609

[왕권 강화를 위한 친형 임해군 숙청]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의 유일한 친형제인 임해군을 교동으로 유배 보내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이 사건은 왕위 계승의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함이었으나, 불투명한 살해 과정으로 일부 신료들에게 의구심을 남겼으며, 훗날 그의 패륜 논란의 근거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전쟁 후 일본과의 관계 재정립: 기유약조]

임진왜란의 잔재를 정리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일본과 수교를 단행, '기유약조'를 체결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을 전쟁 반대파로 내세워 적극적인 외교 교섭을 요청했고, 광해군은 국서 선행 및 무덤 훼손 범인 인도 등의 조건을 내걸어 이를 수용한 일본과 관계를 정상화했습니다.

1610

[생모 공빈 김씨 추존]

즉위 후 생모인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고 어머니의 위상을 높이려는 시도였습니다.

1612

[김직재의 옥 발생]

김직재의 옥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계축옥사와 연결되며 광해군이 정적을 숙청하는 과정의 일환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통치 방식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613

[계축옥사와 인목왕후 아버지 김제남 숙청]

'계축옥사'가 발생하자 영창대군을 추대하여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목왕후의 '의인왕후 능 저주설'이 조작되기도 했으며, 김제남은 사망 3년 후 부관참시까지 당하며 그 일족이 큰 화를 입었습니다.

1614

[충격적인 이복동생 영창대군 살해]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 보낸 후, 방 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이 사건은 광해군의 왕권 강화를 위한 잔인한 숙청의 극치로 평가되며, 훗날 '폐모살제(廢母殺弟)'의 중요한 부분으로 인조반정의 결정적인 명분을 제공했습니다.

1615

[왕권을 위한 또 다른 희생, 능창군 숙청]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의 동생 능창군을 폐서인하여 교동에 안치하고 자결하게 했습니다.

이는 왕권을 위협하는 모든 잠재적 세력을 제거하려는 광해군의 의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비극적인 숙청 사건입니다.

1617

[화려한 존호 상정 (폐위 후 추탈)]

신하들이 광해군에게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이라는 존호를 올렸습니다.

이는 그가 왕으로서 지닌 덕목과 업적을 기리는 의미가 담겨있지만, 폐위 후 추탈되었습니다.

1618

[인목대비 폐비 및 서궁 유폐]

영창대군 살해 직후부터 허균 등 강경파 관료와 유생들의 상소 릴레이를 동원해 '인목대비 폐비 공작'을 전개했습니다.

결국 인목대비를 폐비시켜 서궁에 유폐시켰습니다.

이 사건은 '폐모살제'의 핵심으로, 조선 정국을 들끓게 만들었으며 인조반정의 결정적인 명분을 제공했습니다.

[후금의 부상에 대비한 국방력 강화]

만주에서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후금(청나라)을 건국하자, 북방의 성과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를 양성하는 등 국경 방비에 힘썼습니다.

이는 다가오는 명-후금 전쟁을 대비한 실리적 조치였습니다.

1619

[조선의 생존을 위한 명-후금 사이 실리 외교 전개]

명나라가 후금과의 전쟁에 원군을 요청하자 강홍립과 김경서를 파견했으나, 강홍립이 후금에 항복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강홍립은 광해군의 밀지를 전달하여 본의 아닌 출병이었음을 알리며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이처럼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펼쳐 조선의 안전을 도모했으나, 서인 세력은 명에 대한 배은망덕한 행동이라며 크게 반발했습니다.

1622

[명나라 모문룡의 가도 주둔으로 긴장 고조]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가도(철산군)에 주둔하며 조선의 대외 관계에 긴장감을 고조시켰습니다.

이는 명-후금 갈등의 여파가 조선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상황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1623

[인조반정으로 폐위되다: 조선 역사상 두 번째]

새벽, 서인들이 주도하고 남인들이 동조한 '능양군반정'이 발생하여 광해군은 왕비 유씨, 세자 지와 함께 폐위되었습니다.

반정 세력은 광해군을 인목왕후 앞에 끌고 갔고, 인목왕후는 처형을 주장했으나 반정의 명분인 '폐모살제'를 유지하기 위해 광해군을 유배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했습니다.

그는 조선 역사상 연산군에 이어 반정으로 폐위된 두 번째 왕이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유배지에서의 비극: 세자와 세자빈 자결]

폐위 후 강화도에 위리안치된 지 두 달 만에, 세자 지와 세자빈 박씨는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자결했습니다.

세자는 땅굴을 파고 도주하려다 발각되었고, 능양군의 자진 명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세자빈 박씨는 남편의 죽음을 보고 사흘 뒤 자살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습니다.

[유배 생활 중 왕비 유씨 사망]

유배 생활 중 광해군의 부인 유씨도 화병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녀 역시 폐위된 왕의 배우자로서 고난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1624

[이괄의 난으로 인한 유배지 이동]

이괄의 난이 발생하자, 능양군(인조)은 광해군의 재등극을 우려하여 그를 충청도 태안으로 옮겼다가 다시 강화도로 옮겼습니다.

이는 폐위된 왕의 존재가 여전히 정치적 불안 요소였음을 보여줍니다.

1636

[병자호란 발발로 교동도 유배]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광해군은 강화도 옆 교동도로 유배되었습니다.

이는 전시 상황에서 폐위된 왕이 적에게 이용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1637

[조선 최남단, 제주도에서 시작된 유배 생활]

병자호란이 끝난 후, 광해군은 제주 어등포로 입항하여 제주 주성 망경루 서쪽 또는 서성 안에 '위리안치'되었습니다.

외부 출입이 엄격히 차단된 채 포졸과 상궁들로부터 '영감'이라는 모욕적인 호칭을 들으며 고독한 유배 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1641

[제주 유배지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다]

기나긴 유배 생활을 지내던 광해군은 67세의 나이로 독살로 인해 사망했습니다.

그가 죽은 음력 7월 1일 무렵 제주도에 비가 자주 오면 이를 '광해우'라 칭하며 그의 비극적 삶을 기억하기도 합니다.

그의 딸은 폐옹주가 되었으나 인조의 배려로 혼수를 받아 결혼하고 그의 제사를 모셨습니다.

1643

[광해군묘 이장 및 사적 지정]

제주도에서 장례를 지냈던 광해군의 묘는 1643년에 현재 위치인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로 이장되어 부인 유씨의 묘와 쌍분으로 조성되었습니다.

그의 묘소는 1991년 사적 제36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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