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조선 국왕, 폐위된 군주, 폭군, 예술 애호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6:40
조선 역사상 가장 파란만장하고 논란의 중심에 선 10대 국왕 연산군! 즉위 초 국방과 민생에 힘쓰며 기대를 모았으나 생모 폐비 윤씨의 비극적인 죽음을 알게 된 후 광폭한 복수를 시작하며 폭군으로 변모했습니다. 두 차례의 잔혹한 사화로 수많은 신하들을 숙청하고 언론을 탄압했으며 사치와 향락에 빠져 흥청망청의 어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유배지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한 그의 드라마틱한 삶은 오늘날까지 수많은 이야기와 작품 속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1476
[폭군의 탄생: 성종의 장자 이융, 연산군으로 태어나다]
조선 제10대 국왕이 될 연산군 이융이 성종의 맏아들이자 폐비 윤씨의 소생으로 경복궁 강녕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 이름은 무작금입니다.
그는 훗날 드라마틱한 삶을 살며 조선 왕실 역사에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로 기록됩니다.
1482
[생모 폐비 윤씨의 비극적인 죽음]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가 아버지 성종의 명으로 사사(賜死)되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이 사건은 훗날 연산군의 폭정에 결정적인 원인이 됩니다.
윤씨는 성종과의 불화와 투기 문제로 왕비에서 폐위된 후, 궁궐 밖으로 축출되었다가 결국 사사되었습니다.
1483
[조선의 왕세자로 책봉되다]
성종의 장자 이융이 14세의 나이로 조선의 왕세자에 책봉되었습니다.
허침, 조지서, 서거정 등 당대 최고 학자들에게 학문을 배웠습니다.
그는 유학보다 독립적인 중앙집권국가를 꿈꿨으며, 스승들과의 마찰도 잦았습니다. 특히 조지서에게는 '소인배'라는 낙서를 하고 훗날 갑자사화 때 처형하는 비극을 낳았습니다.
1494
[조선 제10대 국왕으로 즉위하며 개혁 정치 시작]
아버지 성종의 승하로 세자 이융이 창덕궁 인정전에서 조선 제10대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즉위 초에는 비변사의 전신인 비융사를 설치하고 국방을 강화하는 등 개혁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빈민 구제와 서적 간행 등 다수의 업적을 이룩하며 기대를 모았습니다. 특히 사창, 상평창, 진제창을 설치하여 백성의 어려움을 덜어주었고, '국조보감', '여지승람' 등의 증보를 지시했습니다. 유배 중이던 외할머니와 외숙을 석방하기도 했습니다.
1495
1498
[훗날 폐세자가 될 이황 탄생]
왕비 신씨 소생의 왕자 이황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훗날 폐세자가 되어 사사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합니다.
[조선 역사상 첫 번째 대규모 사화, 무오사화 발생]
연산군 4년, 실록 편찬 과정에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세조의 정통성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사림파가 대거 숙청된 사건입니다.
김종직은 부관참시되고, 김일손 등 수많은 사림파 인사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며 훈구파가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이 사건은 훈구파가 사림파를 일망타진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중 터졌습니다. 당시 연산군은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목을 베는 '부관참시'를 집행하는 등 잔혹함을 보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성희안, 유순정 등은 연산군에게 원한을 품고 훗날 중종반정에 적극 가담하게 됩니다.
1499
1500
[조선 최초, 현실 한자음 표기 서적 간행]
연산군 재위 중, 인수대비의 명으로 '육조법보단경 언해' 등 현실 한자음으로 표기된 서적들이 최초로 간행되었습니다.
이는 기존의 인위적인 한자음 체계를 벗어난 중요한 언어사적 기록입니다.
이 문헌들로부터 현실 한자음이 표준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하며, 16세기 이후 거의 모든 문헌에서 현실 한자음이 사용됩니다. 이는 조선 후기 언어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역사적인 전환점입니다.
1501
1502
1503
연산군은 지리관의 부주의를 탓하며 산소 자리를 본 관원을 국문하기도 했습니다.
1504
[생모 윤씨의 복권을 추진하다]
연산군은 생모 폐비 윤씨를 왕후로 복권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사후 백년간 언급하지 말라'는 선왕 성종의 유지를 내세운 사림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며 연산군의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이 갈등은 연산군이 경연과 사헌부를 축소하고 사간원, 홍문관 등 언론 기관을 폐지하는 등 독단적인 공포정치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성균관과 일부 사찰을 유흥장으로 바꾸는 등의 행태도 이때부터 나타났습니다.
[궁인 전향과 수근비, 잔혹한 능지처사 당하다]
연산군의 명으로 궁인 전향과 수근비가 능지처사라는 잔혹한 형벌로 처형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공포정치를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한글 투서 발각 후 한글 탄압 시작]
연산군의 패륜적 행위를 질책하는 한글 투서가 발견되자, 연산군은 한글 서적을 불사르고 한글 사용을 금지하는 극단적인 탄압을 시작했습니다.
위반 시 참수형까지 처하도록 하여 많은 한글 관련 책들이 소실되었습니다.
이 조치는 한글을 아는 자는 한성오부(漢城五部)에 신고하도록 하고, 이를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으면 이웃까지 연좌하여 처벌하는 등 전례 없는 수준의 탄압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조정 내에서는 한글 역서 번역이나 궁인의 제문 번역 등에 한글을 허용하는 모순적인 모습도 보였습니다.
[생모 복수극, 피로 물든 갑자사화 발생]
연산군은 생모 폐비 윤씨 사태에 관련된 훈구파와 사림파 대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갑자사화'를 일으켰습니다.
살아있으면 처형하고 죽었으면 부관참시했으며, 윤씨를 주도했던 후궁들을 직접 살해하고 시신으로 젓갈을 만들라고 명하는 등 극악무도한 복수를 감행했습니다.
이 사건은 훈구파 내의 분란을 틈타 연산군이 어머니의 한을 풀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엄귀인, 정귀인 등 성종의 후궁들을 직접 살해하고 그 자녀들까지 유배 후 사사했습니다. 심지어 할머니 인수대비와도 언쟁 중 다툼이 있었고, 결국 병석에 있던 인수대비의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하자 3년상 대신 '이일역월제'로 25일장을 치러 큰 논란을 빚었습니다. 압슬, 포락, 물고문 등 가혹한 고문 방식도 이때 자행되었습니다.
1505
['흥청망청'의 어원이 된 사치와 향락]
연산군은 채홍사·채청사를 파견해 미녀와 양마를 구해오게 했고, 성균관과 사찰을 유흥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때 선발한 기생 '흥청'들과의 방탕한 생활은 국가 재정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흥청망청'이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왕의 음탕함은 날로 심해져, 족친과 선왕의 후궁까지 불러들여 간음했으며, 심지어 신하의 아내까지 겁탈하는 등 선을 넘는 행동을 일삼았습니다. 이는 왕손 번식이라는 공무적 성격이 강했던 왕의 성생활에서 벗어나 개인적 욕망을 무분별하게 채운 것으로 비판받았습니다.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 존호, 마지못해 수락]
신료들이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이라는 존호를 올렸으나, 연산군은 처음에는 과분하다며 물리쳤다가 결국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그의 오만한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1506
[폭군 연산,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유배되다]
성희안, 유순정, 박원종 등은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의 측근들을 살해하고 궁을 장악했습니다.
연산군은 민가에 숨어있다가 체포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추방되었고, 그의 어린 아들들과 후궁 장녹수 등도 살해당하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연산군은 유배지에서 별감과 상궁들에게 조롱당했으나 묵묵히 참았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열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교동도로 배소가 옮겨졌습니다. 반정 세력은 명나라에 연산군이 병으로 동생 중종에게 왕위를 양보했다고 거짓말을 보고하기도 했습니다.
[유배지 강화도 교동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다]
강화도 교동에 유배된 지 2개월 만에 연산군은 역질과 화병 등의 후유증으로 31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폐세자 황의 사사 소식에 식음을 전폐하며 괴로워했다고 전해지며, 죽기 직전 부인 신씨를 보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사망 후 민중들 사이에서는 독살설이 퍼지기도 했습니다. 그의 묘소는 강화도에 안장되었다가 1513년 양주 해촌(현 도봉구 방학동)으로 이장되었으나, 왕자군의 예우로 '연산군지묘'라는 석물만 있고 능호가 없습니다. 조선 왕실 족보에도 왕자로 기록되며, 재위 기간 실록도 '연산군일기'로 통칭됩니다. 강화도와 교동도에서는 훗날 무속의 신으로 숭배되기도 했습니다.
1512
[강화도 묘소, 홍수에 침식되다]
연산군의 강화도 묘소가 홍수에 침식되자, 부인 거창군부인 신씨가 양주 해촌으로 이장을 요청했습니다.
1513
[묘소, 양주 해촌으로 이장되다]
거창군부인 신씨의 요청에 따라 연산군의 묘소가 양주군 노해면 해등촌(현 도봉구 방학동)으로 이장되었습니다.
왕자군의 예우로 장사되었습니다.
1516
[연산군 제사 문제, 논의 시작]
중종은 폐위된 형 연산군의 제사를 왕자군보다는 상향해서 지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그러나 후사 문제에 대한 우려로 결정을 미루었습니다.
조선 왕실은 고려 국왕의 제사까지 이어가던 명분이 있었기에, 연산군의 제사를 끊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종은 후사가 문제를 일으킬까 우려하여 선뜻 종실을 후사로 세우지 못했습니다.
1537
[거창군부인 신씨 사망, 외손봉사로 제사 계승]
연산군의 부인 거창군부인 신씨가 사망하자, 연산군의 제사는 외동딸 휘신공주의 아들인 외손자 구엄에게, 이어 구엄의 외손자인 이안눌에게 계승되었습니다.
구엄은 연산군의 외손으로서 왕실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았으며, 범죄를 저질러도 제사를 끊을 수 없다는 이유로 감형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구엄의 외손 이안눌이 제사를 이어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