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 (조선)

조선 국왕, 조선 왕세자,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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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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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 조선 왕세자,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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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2대 국왕으로 재위 7개월 만에 승하한 비운의 군주. 효심 깊고 학문 뛰어나 이상적 유교 군주로 칭송받음. 기묘사화 관련자 신원 등 도학정치를 추구했으나 단명으로 뜻을 이루지 못함. 외척(대윤-소윤) 간의 권력 다툼 속에서 즉위하였고 그의 죽음은 을사사화의 도화선이 됨. 갑작스러운 죽음을 두고 독살설 등 의문이 제기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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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5

[조선 중종의 적장자, 이호 탄생]

조선 중종의 넷째 아들이자 적장남으로 경복궁 자선당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억명(億命)'으로, 어머니 장경왕후가 임신 중 꾼 태몽에 따라 지어진 이름이다.

인종을 낳고 일주일 뒤 장경왕후는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친할머니인 정현왕후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이후 외숙부 윤임을 중심으로 한 대윤 세력의 정치적 지지를 받게 된다.

1520

[왕세자 이호로 개명]

왕세자 책봉에 앞서 아명 '억명'을 '호(峼)'로 개명하였다.

[이호, 조선의 왕세자로 책봉]

중종의 적장남 이호가 조선의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왕실의 중요한 근본을 다지는 의미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국가의 중요한 의례를 맡을 적합한 원량(元良)으로 인정받았다.

세자는 도를 즐기고 스승을 높이며 현명한 자를 가까이하고 간사한 자를 멀리하여 국가의 평안을 이끌어야 한다는 교서를 받았다.

1522

[관례 후 성균관 입학]

왕세자가 성년식인 관례를 치른 후,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을 익혔다.

1524

[박용의 딸 박씨, 세자빈으로 책봉]

금성부원군 박용의 딸 박씨(훗날 인성왕후)를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1527

[동궁전 저주 사건 '작서의 변' 발생]

세자인 인종의 생일 무렵, 동궁전 창가에 죽은 쥐의 사지를 찢어 불에 지진 후 매달아놓고 인종을 저주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의 배후로 중종의 서장자 복성군과 그의 어머니 경빈 박씨가 지목되어 폐서인되었다.

경빈 박씨의 딸들인 혜순옹주와 혜정옹주 또한 폐서인되었다.

1531

[동복 누나 효혜공주 사망에 슬퍼함]

동복 누나인 효혜공주가 사망하자, 인종은 병이 날 정도로 깊은 슬픔을 표현하며 지극한 우애를 보여주었다.

1533

[두 번째 저주 사건 '가작인두의 변' 발생]

동궁의 빈청에서 사람 머리 모양의 물건이 발견되었다.

여기에 머리카락과 이목구비를 새기고 '세자의 몸을 능지할 것', '세자 부주의 몸을 교살할 것', '중궁을 참할 것' 등의 저주 내용을 적은 목패가 함께 있었다.

이 사건으로 6년 전 폐출된 복성군 모자와 혜정옹주의 남편 홍려가 연루되어 복성군과 경빈 박씨는 사사되었다.

후에 이 사건의 배후가 인종의 누나 효혜공주의 남편 김희와 그의 아버지 김안로로 드러났다. 인종은 나중에 중종에게 복성군 모자의 신원 회복과 폐출된 두 옹주의 작호 회복을 청하였다. 그는 형제간의 정을 강조하며, 어린 자녀들이나 연루된 인물들이 겪은 비극에 대한 애통함을 표했다.

1538

[중종, 인종에게 양위 시도]

중종이 자신의 재위 연수와 나이가 세종과 비슷해지자 태종과 세종의 고사를 들며 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려 했다.

그러나 인종이 음식을 끊고 극구 반대하며 울부짖는 지극한 효심을 보이자, 중종은 뜻을 거두었다.

이는 인종의 순수한 효성과 지극한 정성이 왕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평가받았다.

1543

[외척 간 '대윤'과 '소윤'의 권력 갈등 심화]

인종의 외숙부인 윤임 일파를 '대윤'으로,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의 오빠 윤원형 일파를 '소윤'으로 지칭하며 외척 간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고 있다는 논의가 조정에 제기되었다.

이는 인종의 즉위 후 발생할 을사사화의 전조였다.

1544

[중종, 인종에게 전위 뜻 밝힘]

중종이 공식적으로 왕위를 인종에게 넘겨줄 뜻을 밝혔다.

이튿날 중종이 승하하면서 인종의 즉위가 임박하게 되었다.

[인종, 조선 제12대 국왕으로 즉위]

1544년 12월 14일(음력 11월 20일)

중종 승하 일주일 후, 인종은 창경궁 명정전에서 조선의 제12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즉위 이후 기묘사화 때 숙청된 조광조의 신원 회복을 요구하는 상소가 잇따랐으며, 인종은 도학정치를 추구하려 노력했다.

1545

[인종, 고열과 혼절 증세로 병세 급격히 악화]

인종의 건강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고열에 시달리고 혼절하는 등 위중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는 짧은 재위 기간과 함께 그의 이른 죽음의 전조가 되었다.

[인종, 대사면 교서 반포 후 명종에게 전위 뜻 밝힘]

병세가 위독해진 인종은 대역죄인과 강상죄 등 중대범죄를 제외한 일반 범죄자들의 죄를 용서하는 대사면 교서를 발표했다.

같은 날 밤 병세가 더욱 악화되자 이복 동생인 경원대군(훗날 명종)에게 왕위를 넘기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는 자신의 병이 위중하여 종사가 위태로울까 염려한 조치였다.

[인종, 경복궁 청연루에서 31세로 승하]

재위 7개월 만에 경복궁 청연루 소침에서 31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그는 훙서 직전 붓을 잡고 유서를 쓰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부모 능 곁에 묻히고 검소한 장례를 치러 백성의 폐해를 덜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두고 문정왕후에 의한 독살설이 야사로 전해진다.

명종실록에서도 인종의 병이 문정왕후의 원망에서 비롯되었다고 언급하는 부분이 있어 그의 죽음이 단순한 병사가 아닐 수 있다는 추측을 낳았다. 승하 당시 도성 사람들이 밤새도록 궐문 밖에서 인종의 증세를 묻고, 승하 소식에 마치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며 애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인종의 덕이 백성에게 깊이 스며들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종 승하 후 '을사사화' 발생]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윤원형 일파(소윤)가 권력을 장악했다.

이들은 인종의 외숙부 윤임 및 대윤 세력을 역모로 몰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왕실 종친과 윤임의 당여들이 사사되는 등 조선 시대 4대 사화 중 하나인 을사사화가 발생하여 정치적 혼란이 극에 달했다.

[인종의 묘호와 시호 결정]

대행왕의 묘호는 '인종(仁宗)'으로, '인(仁)'은 인(仁)을 베풀고 의(義)를 행함을 의미한다.

시호는 '영정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으로 결정되었다.

처음 시호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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