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 (조선)
조선 국왕, 왕족, 역사 인물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6:39
- 연산군 폐위 후 반정으로 즉위했으나 재위 초 공신들의 막강한 권력에 눌려 실권이 미약했습니다. - 조광조 등 사림파를 등용해 개혁을 시도했으나 급진적인 개혁과 훈구파의 반발로 기묘사화가 발생하며 좌절되었습니다. - 작서의 변 가작인두의 변 등 궁중 암투가 끊이지 않았고 외척 세력이 등용되며 대윤과 소윤의 분열로 혼란한 정국이 이어졌습니다. - 재위 38년간 개혁 의지에도 불구하고 우유부단한 성격과 주변 세력에 휘둘려 안정적인 치세를 이루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1488
[진성대군 이역 탄생]
조선 성종과 정현왕후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 적 아명은 구등은금이었습니다.
1494년 진성대군으로 봉해지고 신수근의 딸 신씨(단경왕후)와 혼인하며 출궁했습니다.
1506
[중종반정 성공 및 왕위 추대]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 반정공신들의 추대를 받아 조선의 제11대 임금으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중종 즉위 및 단경왕후 폐위]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한 후, 반정 세력의 주장에 따라 왕비 신씨(단경왕후)를 폐위하고 사가로 내보냈습니다.
이후 장경왕후, 문정왕후를 차례로 왕비로 책봉했습니다.
중종은 즉위 초 공신들의 위세에 눌려 실질적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지만, 연산군이 폐지한 법제를 복귀시키고 홍문관 기능을 강화하며 왕도정치와 공신 세력 억제를 시도했습니다.
1515
[사림파 등용과 개혁 정치 시작]
박원종, 성희안 등 훈구 공신들의 죽음으로 훈구파의 세력이 주춤하자, 남곤을 등용하고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 인사를 홍문관, 사간원 등 요직에 등용했습니다.
이를 통해 현량과를 실시하는 등 유교적 개혁 정치를 추진하며 비대해진 공신 세력을 견제하려 했습니다.
조광조의 급진적 개혁 정책은 보수적 훈구 세력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조광조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던 중종마저도 피로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특히 위훈 삭제로 다수의 공신이 제명되면서 훈구파의 위기감은 극에 달했습니다.
1519
[기묘사화 발생과 주초위왕 사건]
남곤, 심정, 홍경주 등 훈구 세력이 희빈 홍씨를 사주하여 궁궐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조씨가 왕이 된다)이라는 글자를 써서 벌레가 파먹게 했습니다.
이를 본 중종은 조광조를 불신하게 되었고, 마침내 조광조를 실각시키고 많은 사림들을 사사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조광조가 추진하던 개혁 정책들도 모두 폐지되었습니다.
중종은 당초 조광조의 개혁 정치를 지지했으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도학적인 조광조의 방식에 점차 거부감을 느끼고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1520
[외척 세력의 등장과 권력 다툼]
조광조 등 사림파가 몰락한 후 견제 세력이 사라지자 공신들의 세력이 다시 부활할 조짐을 보였습니다.
중종은 공신들의 권력 집중을 막기 위해 외척인 윤여필, 윤여해, 윤지임, 김안로 등을 등용했고, 이들의 자녀들까지 출사하며 새로운 권력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중종 치세 중기와 후기에는 새로 등장한 외척 세력과 기존 반정 공신들 간의 정권 다툼으로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1531년에는 심정, 이항 등이 화를 당했고, 1537년에는 김안로 등이 주살되는 등 재위 내내 화옥(禍獄)이 끊이지 않는 혼란 정국이 지속되었습니다.
1527
[작서의 변 발생]
세자(인종)의 생일 무렵, 죽은 쥐의 사지를 찢어 불에 지진 다음 동궁전 창가에 매달아놓고 세자를 저주하는 끔찍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의 배후로 중종의 서장자 복성군과 그의 어머니 경빈 박씨가 지목되어 폐서인되었습니다.
1533
[가작인두의 변 발생]
동궁의 빈청에서 사람의 머리 모양을 한 물건이 발견되었고, 여기에 '세자의 몸을 능지할 것', '세자 부주(父主)의 몸을 교살할 것', '중궁을 참할 것' 등의 저주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6년 전 폐출되었던 복성군 모자가 다시 연루되어 결국 사사되었습니다.
이 저주 사건의 실제 배후는 인종의 누나 효혜공주의 남편 김희와 그의 아버지 김안로의 소행이었음이 나중에 밝혀졌습니다. 이후 인종은 중종에게 복성군 모자의 신원 회복과 폐출된 두 옹주의 작호 회복을 청했습니다.
1543
[대윤과 소윤 파벌 형성]
인종의 외숙부인 윤임 세력은 '대윤', 경원대군(명종)을 지지하는 문정왕후와 그녀의 동생 윤원형 일파는 '소윤'이라 불리며 파를 나누어 갈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훗날 을사사화로 이어지는 씨앗이 됩니다.
중종은 이들이 파당을 형성한다는 것에 대해 해괴하고 경악스러운 일이라며, 간사한 소인들이 조정을 어지럽히는 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1544
[조선 제11대 국왕 중종 승하]
1544년 12월 9일(음력 11월 15일)
중종은 세자(인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겠다는 뜻을 밝힌 후, 창경궁 환경전에서 승하했습니다.
묘호는 '중종'으로, 연산군으로부터 나라를 중흥시켰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능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정릉(靖陵)입니다.
정릉은 본래 고양시에 있었으나 풍수지리 문제로 명종대에 현재의 위치로 천장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훼손되었으며, 훼손된 능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으나 중종의 시신인지 확인이 불분명하여 논란이 있었습니다. 중종의 외모 기록과 시신 모습이 달라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일단 정결한 곳에 묻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