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 (조선)
조선 국왕, 왕족, 군주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6:39
조선의 13대 국왕 명종은 중종과 문정왕후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어머니 문정왕후의 20년간의 수렴청정을 겪었습니다. 외척 윤원형의 전횡 아래 을사사화와 을묘왜변 등 격변기를 보냈으며 친정 후 왕권 강화를 시도했으나 뜻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고 승하했습니다. 권력 암투와 혼란 속에서 비운의 삶을 살다 간 군주로 평가됩니다.
1534
[태어나자마자 권력 다툼의 중심에 선 왕자, 명종]
중종의 막내아들이자 문정왕후의 소생으로 태어난 명종(이환)은 훗날 왕위 계승을 둘러싼 치열한 암투의 한가운데 서게 됩니다.
1539년에는 경원대군에 책봉되며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1534년(중종 29년) 7월 13일(음력 5월 22일), 중종과 문정왕후의 아들로 경복궁에서 태어났습니다. 1539년(중종 34년) 경원대군에 책봉되며 왕위 계승의 한 축이 됩니다. 이는 인종의 외척인 대윤(윤임)과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의 외척인 소윤(윤원형) 사이의 치열한 왕위 계승 암투를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1545
[피바람 부는 조선, 외척 간의 처절한 권력 싸움 '을사사화' 발발]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 일파인 소윤이 권력을 장악하며, 전 왕의 외척인 윤임 일파 대윤을 대대적으로 숙청합니다.
명종의 즉위 직후 시작된 이 사화로 6년간 100여 명이 희생되며 조선 정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집니다.
명종 즉위 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윤원형 일파의 소윤이 권력을 장악하여 대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습니다. 윤임이 중종의 여덟째 아들인 봉성군을 왕으로 삼으려 한다는 윤원형의 탄핵이 계기가 되어, 윤임·유관 등이 사사되고 봉성군·이언적·노수신 등이 유배되는 등 을사사화 이래 6년 동안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거나 유배당했습니다.
[어린 나이 왕위에, 문정왕후의 20년 섭정이 시작되다]
이복형 인종의 뒤를 이어 불과 12세의 나이로 조선의 제13대 국왕으로 즉위합니다.
어린 명종을 대신해 막강한 권력을 지닌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며 조선은 외척 중심의 혼란기로 접어듭니다.
1545년 7월 6일(음력), 이복 형 인종에게 후사가 없어 인종이 붕어하기 3일 전에 선위(禪位)를 받아 즉위했습니다. 명종의 나이가 12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여 섭정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중종 말부터 치열하게 전개되던 대윤(윤임 일파)과 소윤(윤원형 일파) 사이의 왕위 계승 암투가 최고조에 달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1553
[명종의 친정 시작, 왕권 강화 시도와 새로운 외척의 등장]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명종이 직접 국정을 돌보는 친정(親政)이 시작됩니다.
명종은 어머니와 외척의 간섭에서 벗어나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자신의 처외숙부 이량을 중용하지만, 또 다른 외척의 전횡을 겪게 됩니다.
1553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명종이 친정을 시작합니다. 명종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견제하고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자신의 처외숙부인 이량을 이조판서로, 그 아들 이정빈을 이조전랑으로 기용했습니다. 그러나 이량 등은 왕의 신임을 믿고 파벌을 형성하며 횡령을 일삼고 사림 출신 관료들을 외지로 추방하며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1555
[조선 해안을 휩쓴 왜구의 대규모 침략, '을묘왜변' 발발]
세견선 감소로 곤란을 겪던 일본 왜인들이 전라도 지방을 대규모로 침입하는 을묘왜변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은 조선 국방 체계에 큰 변화를 가져와, 임시기구였던 비변사가 정식 상설기구로 격상되는 계기가 됩니다.
1555년, 세견선(歲遣船)의 감소로 어려움을 겪던 왜인들이 전라도 지방을 침입하는 을묘왜변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1510년 삼포왜란 때 설치되어 임시기구로 존재하던 군사기관인 비변사가 상설기구로 전환되어, 정1품 아문의 정식 기관이 됩니다. 비변사의 기능 강화는 훗날 임진왜란을 거치며 전쟁 수행을 위한 최고 권력 기관으로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1563
[믿었던 외척 이량의 몰락, 명종의 왕권 강화 좌절]
명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기용했던 외척 이량이 자신의 조카 심의겸에게 탄핵당해 숙청됩니다.
이는 명종의 친정 초기 왕권 강화 시도가 순탄치 않았으며, 여전히 외척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명종이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이량을 이조판서로 기용했으나, 이량은 왕의 신임을 믿고 파벌을 형성하여 횡령을 일삼고 사림 관료들을 축출했습니다. 이에 사림들이 반발하자 이량은 사화(士禍)를 꾀했으나, 결국 자신의 조카 심의겸에게 탄핵당하여 1563년 숙청되었습니다.
1565
[20년간의 섭정 끝, 문정왕후 별세]
20년간 조선 정치를 좌지우지했던 어머니 문정왕후가 승하합니다.
명종은 비로소 오랜 시간 자신을 억압했던 외척의 그늘에서 벗어나 진정한 친정을 펼칠 기회를 얻게 되지만, 이미 깊어진 혼란을 수습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사망하며 20년 동안 지속되었던 수렴청정이 완전히 막을 내렸습니다. 문정왕후가 죽은 뒤 명종은 윤원형과 보우를 내쫓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정치를 바로잡으려 노력했지만, 뜻을 온전히 펼치지 못했습니다. 명종은 재위 기간 내내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 속에서 왕위를 유지해야 했으며, 《명종실록》에는 문정왕후에게 꾸짖음과 억압을 당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1567
[뜻을 채 펼치지 못하고 승하한 비운의 군주 명종]
오랜 스트레스와 이질 등으로 인해 경복궁 양심당에서 33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합니다.
아들 순회세자를 일찍 잃었던 명종은 이복 조카 하성군(훗날 선조)을 후계자로 지목하며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합니다.
1567년 8월 12일(음력 6월 28일) 새벽, 명종은 이질과 그동안 지속되어 온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경복궁 양심당에서 승하했습니다. 아들 순회세자가 요절했기 때문에 중종의 서자인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선조)을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를 계승하게 했습니다. 명종의 묘호는 '명종'이며,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강릉(康陵)에 안장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