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조선)

조선 국왕, 왕족,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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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20- 08: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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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 왕족,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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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 이성계의 5남이자 조선 3대 국왕. - 왕자의 난을 통해 권력을 잡은 철혈 군주. - 사병 혁파 6조 직계제 호패법 등으로 강력한 왕권 확립. - 공신과 외척을 과감히 정리 세종대왕 치세의 튼튼한 기반 마련. - 혼란을 끝내고 조선의 기틀을 다진 개혁가이자 냉철한 승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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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

[조선 3대 국왕, 태종 이방원 탄생!]

1367년 고려 함흥에서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무예보다는 학문에 더 흥미를 보였습니다.

1382

[뛰어난 학문적 재능으로 과거에 급제하다.]

1382년 진사시에 합격하며 학문적 재능을 보였고, 이듬해인 1383년에는 문과 병과 7등으로 급제하여 관료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훗날 냉철한 정치를 펼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1388

[격변의 시대를 겪고 명나라와 외교적 교류를 시작하다.]

1388년 위화도 회군 당시 가솔들과 동북면으로 피신했습니다.

이후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주원장과 훗날 영락제가 되는 인물을 직접 대면하며 국제적 안목을 넓혔습니다.

1391

[어머니 상중, 정몽주 제거 계획을 세우다.]

1391년 어머니 신의왕후의 상을 치르던 중, 정몽주 일파가 아버지 이성계를 제거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개경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조영무와 함께 정몽주 제거 계획을 구체화하며 혁명의 선봉에 섰습니다.

1392

[조선 건국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정안군'에 봉해지다.]

정몽주 등 고려 왕조 유지 세력을 제거하며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새 왕조 조선 건국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습니다.

1392년 이성계가 태조로 등극하자, 이방원은 '정안군'에 봉해지며 조선 왕실의 주요 인물이 되었습니다.

개국의 공로를 따지면 이방원이 태조의 아들 중 가장 컸으나, 신권 중심의 정치를 주창하던 정도전은 왕권 강화를 우려하여 이방원 대신 태조의 막내아들이자 계비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의안대군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습니다. 이 결정은 훗날 '왕자의 난'의 씨앗이 됩니다.

[정몽주 암살]

이성계가 사냥 중 낙마(황해도 해주)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정몽주는 이 변고를 틈타 정도전, 조준 등을 탄핵하여 유배 보내는 등 역성혁명 세력의 제거를 시도하며 고려 왕조의 수호를 위해 최후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당시 생모의 상을 치르며 속촌에 머물던 이방원은, 집안의 생존이 걸린 위기 상황임을 인지하고 상을 중단, 개경으로 급히 돌아와 가족들을 은신시키고 정몽주를 제거 대상으로 결정했습니다.

결국 이방원은 자신의 부하 조영규 등을 자객으로 보내 정몽주의 집 근처인 태묘동 입구(주류학설)에서 정몽주를 암살하는 데 성공하며 이는 조선 건국을 실질적으로 완성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정몽주 사살 당시 이방원이 직접 선죽교에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은 매우 타당하며, 오히려 정설에 가깝습니다.


1. 역사 기록 속 이방원의 행적

1) 정몽주 암살의 주모자: 정몽주 암살을 지시한 것은 이방원이 맞으며, 실제 암살은 조영규 등이 실행했습니다.


2) 이방원의 개경 복귀: 당시 이성계가 사냥 중 낙마하여 중상을 입고 개경으로 돌아오지 못하자, 정몽주는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이방원은 이러한 위기를 감지하고 상(喪) 중임에도 불구하고 급히 개경으로 돌아왔습니다(일부 기록에서는 포천에 은신 중이었다는 내용도 언급됨).


3) 하여가와 단심가: 정몽주를 설득하기 위해 이방원이 찾아가 '하여가'를 읊고 정몽주가 '단심가'로 답하며 절교를 확인한 것은 사살 직전의 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이 만남의 장소가 선죽교였다는 사서 기록은 없으며, 이방원이 은신한 사저 등과는 다른 장소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4) 사건 직후의 행적: 정몽주가 살해된 직후 이방원은 곧바로 아버지 이성계에게 찾아가 정몽주를 제거한 사실을 보고하고 호통을 들은 것으로 《태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방원이 암살 현장인 선죽교나 그 근처에 머물기보다는, 사건을 지시하고 개경에서 급변하는 정세의 핵심부에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2. 정몽주 피살 장소에 대한 기록

'하여가'와 '단심가'의 일화와 선죽교에서의 피살은 워낙 극적이라 후대에 널리 알려지고 형상화되었지만, 실제 역사 기록(《고려사》, 《태조실록》 등)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실제 피살 장소: 정몽주를 살해한 주체는 조영규 등이며, 피살 장소는 선죽교가 아닌 정몽주의 집 근처인 태묘동 입구였다는 주장이 유력합니다.


2) 선죽교 전설의 형성: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고 사건의 상징성을 높이기 위해 조선 후대에 이르러 선죽교가 유명한 암살 장소로 굳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이기 위해 부하를 보냈을 때 자신은 개경으로 돌아와 급변하는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은신처에 있었을 가능성은 크지만, 부하들의 실행 현장인 선죽교에 직접 나타나 정몽주와 시조를 주고받은 뒤 암살을 지켜보았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후대의 극적 서사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1398

[피로 얼룩진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다!]

태조의 와병을 틈타, 사병 혁파에 반대하는 세력 및 처가, 종친들과 결탁하여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 난을 통해 신권 강화를 주창하던 정도전, 남은 등 개국공신들과 세자 방석, 이복동생 방번을 살해하고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세자 자리를 두고 정비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이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특히 개국에 큰 공을 세웠던 이방원의 불만이 컸습니다. 정도전이 왕권보다 신권을 주창하며 계비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막내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방원은 사병 혁파 반대 세력, 종친, 외척 등과 연합하여 거병했습니다. 이 사건 후 태조는 권력에 회의를 느끼고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떠났습니다.

1400

[형제간의 마지막 혈투,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다.]

1400년, 넷째 형 회안대군 방간이 왕위에 오를 목적으로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방원은 우수한 병력을 바탕으로 쉽게 난을 진압하고 박포를 처형했으며, 회안대군은 유배 보냈습니다.

같은 해 음력 2월, 정종으로부터 왕세자로 책봉되며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했습니다.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 국왕으로 즉위하다.]

왕세자로 책봉된 지 9개월 만인 1400년 음력 11월 13일, 둘째 형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의 제3대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이방원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새로운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1401

[명나라로부터 조선 국왕으로 공식 인정받다.]

즉위 이듬해인 1401년 음력 6월 12일, 명나라로부터 '권지고려국사'가 아닌 '조선 국왕'으로 공식 책봉받으며 조선의 국제적 지위를 공고히 했습니다.

이는 불안정했던 왕권의 대외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1402

[백성의 소리를 듣는 '신문고'를 설치하다.]

1402년 백성의 억울한 사정을 듣기 위해 '신문고'를 설치했습니다.

또한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옮기는 등 국가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며 왕권 강화와 유교 정치에 힘썼습니다.

1403

[인쇄술 발전을 위한 '주자소'를 설립하다.]

1403년 주자소 설치를 명하여 '계미자' 활판을 제작하게 했으며, 직접 이를 감독했습니다.

이는 조선의 인쇄술 발전에 큰 획을 그었습니다.

또한 호포를 폐지하고 지폐인 '저화'를 발행하여 경제 안정화를 꾀했습니다.

1405

[왕권 강화를 위한 관제 개혁을 단행하다.]

1405년 관제 개혁을 통해 의정부와 6조의 관료들이 왕에게 직속되는 6조 직계제를 정비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제거했던 정몽주에게 영의정부사 등을 추증하며 충절의 상징으로 현창했는데, 이는 정치적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406

[국가 재정 강화를 위해 숭유억불 정책을 펼치다.]

1406년 사원 혁파를 단행하여 사찰 소속의 노비와 전답을 압수하고, 승려들을 천인으로 취급하는 등 강력한 숭유억불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이는 국고를 안정시키고 새로운 왕조의 이념적 기반을 다지기 위함이었습니다.

1409

[계모 신덕왕후의 정릉을 파괴하고 도성 밖으로 이장하다.]

태조 사후, 계모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능의 봉분을 깎아 흔적을 없앴습니다.

또한 능의 석상과 석물을 철거하여 1410년 홍수로 무너진 광통교 보수에 사용하게 하는 등 강한 불만을 표출했습니다.

태종은 자신이 세자로 책봉되지 못한 것에 대한 분풀이로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키고, 그녀의 능묘를 파괴하여 백성들이 그 석물을 밟고 지나가도록 했습니다. 제례 또한 왕비가 아닌 후궁의 예로 올렸습니다. 이러한 곡절은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 병풍석이 발견되며 사실로 드러났고, 250여 년 후인 1669년(현종 10년) 송시열의 주도로 신덕왕후는 비로소 왕비로 복위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정릉 훼철일에 쏟아진 비를 신덕왕후의 원혼이 흘리는 눈물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1411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코끼리가 일본에서 들어오다!]

1411년 2월 22일, 일본왕이 진기한 동물인 코끼리를 조선에 바쳤습니다.

이는 기록상 한반도에 최초로 들어온 코끼리였으며, 태종은 이를 사복시에서 기르도록 명했습니다.

이 희귀한 동물은 이후 조선의 궁궐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듬해 12월 10일, 전 공조전서 이우가 코끼리에게 침을 뱉았다가 밟혀 죽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1413년 병조판서 유정현의 건의로 코끼리를 전라도 해도(海島)로 귀양 보냈습니다. 하지만 귀양 간 코끼리가 풀을 먹지 않고 수척해진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1414년 5월 3일 태종은 다시 육지로 불러오도록 했습니다. 이 코끼리는 세종대왕 때까지 살았으며, 관리의 어려움으로 여러 지방을 돌아가며 키워졌고, 1421년에는 충청도 공주에서 기르는 사람을 또 죽이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1413

[국가의 법전 '경제육전'을 재편찬하다.]

즉위 이후 추진한 국가의 법령과 제도를 총괄하여 '경제육전'으로 재편찬했으며, '원집상절'과 '속집상절' 2권을 간행했습니다.

이는 조선의 법치 기반을 더욱 굳건히 하는 작업이었습니다.

1414

[조선의 역사 정립을 위해 '고려사'와 '삼국사' 편찬을 명하다.]

1414년 정도전이 중단했던 '고려사' 편찬 작업을 조준, 권근, 하륜 등에게 명하여 계속하게 했습니다.

또한 권근과 하륜에게는 '삼국사'도 새로이 편찬하도록 명하며 조선의 역사 정립에 힘썼습니다.

1417

[미신 타파를 위해 예언서적 등을 소각하다.]

1417년부터 퇴위 직전까지 서운관에 소장된 각종 예언 서적, 무속, 비기도참서 등을 혹세무민의 이유로 소각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는 미신을 배격하고 유교적 통치 이념을 강화하려는 의도였습니다.

1418

[철혈 군주의 마지막 결단! 세종의 장인 심온을 포함한 외척을 숙청하다.]

상왕으로 물러난 후에도 세종의 왕권 안정을 위해 며느리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을 비롯한 외척 세력을 과감하게 숙청했습니다.

강상인 사건을 빌미로 심온을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낸 사이 강상인 등을 처형하고, 귀국한 심온을 사사하는 등 철저한 방식으로 왕실 외척의 발호를 막았습니다.

태종은 왕권 안정을 위해 공신들을 유배 보내거나 처형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특히 자신의 등극에 공을 세운 이건이, 이숙번 부자를 유배 보냈고, 아내 원경왕후의 친정인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 등 처남들을 모두 제거하며 왕실의 외척 세력을 뿌리 뽑았습니다. 이러한 강력한 숙청은 세종이 강력한 왕권을 지닌 왕이 되어 태평성대를 열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충격! 방탕한 양녕대군 폐위, 세종대왕을 새 세자로 책봉하다.]

1418년 6월, 학문 연마를 게을리하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던 장남 양녕대군을 왕세자에서 폐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신하들의 찬성과 소수의 반대 속에 셋째 아들 충녕대군(훗날의 세종)을 새로운 왕세자로 삼으며, 후계 구도를 안정시키려는 결단력을 보였습니다.

양녕대군은 기생들을 궁궐로 데려오는 등 자유분방한 행동으로 태종의 노여움을 샀습니다. 폐위 과정에서 양녕대군 폐위에 반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그의 장인 김한로도 외지로 유배 보냈습니다. 반면 병석에 누워서도 책을 놓지 않던 충녕대군의 모습은 태종의 눈에 들었습니다.

[미래를 위한 큰 그림, 세종대왕에게 왕위를 물려주다.]

1418년 8월 10일, 재위 17년 10개월 만에 옥새를 충녕대군에게 넘기고 수강궁으로 물러나 상왕이 되었습니다.

신하들의 양위 철회 청을 거절하며 강력한 왕권 이양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상왕이 된 후에도 4년간 국정을 감독하며 병권과 인사권을 장악, 세종의 왕권 안정을 위해 힘썼습니다.

1421

['성덕신공태상왕'으로 존숭되다.]

1421년 9월 12일, 의정부의 주청으로 개국의 공을 인정받아 이미 상왕이었던 태종의 휘호를 올려 '성덕신공태상왕'으로 존숭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권위와 업적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1422

[조선의 기틀을 다진 태종, 56세의 나이로 승하하다.]

태상왕으로 존숭된 지 7개월 후인 1422년 5월 10일, 천달방 신궁(수강궁)에서 56세를 일기로 승하했습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가뭄 해소를 위해 기우를 노력하며 "내가 죽어 영혼이 있다면 반드시 이 날만이라도 비를 내리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그의 기일에는 어김없이 비가 내렸는데, 사람들은 이 비를 '태종 우(太宗 雨)'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태종은 1422년 4월 세종과 함께 사냥을 즐기는 등 건강한 모습을 보였으나, 낙천정에서 쉬던 중 병석에 눕게 되었습니다. 보름이 넘게 투병하다가 세종, 양녕대군, 효령대군 등 아들들과 후궁,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묘호는 '태종', 시호는 '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이며, 능은 원경왕후와 합장된 '헌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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