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조선)
조선 국왕, 유교 정치, 문화 융성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6:37
조선의 9대 국왕(재위 1469~1494). 13세에 즉위하여 정희왕후의 섭정을 거쳤다. 즉위 후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경국대전』을 완성 반포하여 조선 유교 통치의 기틀을 다졌다. 홍문관을 설치하고 사림파를 등용하며 학문과 문화 발전을 이끌어 문화의 황금기를 열었다. 북방 방비에도 힘썼으나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은 훗날 갑자사화의 비극을 낳았다.
1457
[총명한 왕손, 이혈의 탄생]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와 세자빈 한씨의 둘째 아들, 이혈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남다른 총명함과 침착한 행동으로 조부 세조의 칭찬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특히 궁궐에 벼락이 쳐 환관이 즉사하는 아수라장 속에서도 태연한 모습을 보여 세조에게 "태조와 세종을 닮았다"는 극찬을 들었습니다.
1461
[왕위 계승의 물망에 오르다]
5세가 되던 해 자을산군으로 봉해졌습니다.
아버지 의경세자의 요절로 궁 밖에서 생활하던 어린 이혈은 곤궁한 상황에서도 불평 없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침착함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한명회, 신숙주 등 훈구파 대신들의 눈에 띄어 그를 왕위 계승자로 고려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470
[13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다]
1469년 11월 28일(음력) / 1470년 1월 9일(양력)
예종이 갑작스레 승하하자, 3살의 제안대군과 병약한 월산대군을 제치고 정희왕후와 훈구파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13세의 어린 나이로 왕이 된 그는 즉위 초 할머니 정희왕후의 섭정을 받아야 했으며, 대신들의 영향력 아래 국정 주요 결정에서 제한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1471
[『경국대전』에 담긴 서자 차별 강화]
태종 때 시작된 적서 차별과 서자의 관직 제한을 구체적인 조항으로 명시하여 『경국대전』에 수록했습니다.
이는 사림파 학자들의 건의를 수용한 것으로, 이로 인해 서자들은 이후 더욱 본격적인 차별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1475
[생부 덕종 추존 논의 시작]
예종의 양자로 즉위했던 성종은 생부인 의경세자(덕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영의정 정창손 등 대신들은 왕실 계통에 아버지가 둘이 되는 것이라며 강력히 반대했으나, 성종은 이 문제를 자신의 왕통 정통성과 연결시키며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대신들은 의경세자의 신주를 종묘에 올리면 예경(禮經)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정희왕후는 의경세자가 원래 왕세자였고 예종의 친형이므로 예종보다 위에 두는 것이 마땅하다고 강하게 밀어붙였습니다.
1476
[수렴청정 끝, 왕권 강화와 사림파 등용의 시작]
7년간의 수렴청정이 끝나자, 성종은 원상 제도를 폐지하고 직접 국정을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할아버지 세조가 권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학자들을 등용했던 사례를 참고하여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파 문인들을 대거 중용하며 훈구파를 견제하고 왕권 강화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 사림 정치의 기틀이 됩니다.
[생부 덕종 추존 확정, 왕실 계통을 바로잡다]
정희왕후의 확고한 의지와 성종의 강력한 추진력으로 결국 덕종의 신주를 종묘에 안치함으로써, 성종의 왕위 계승이 덕종의 친자로서 이루어졌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했습니다.
이는 성종의 왕실 내 입지를 굳히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1479
[북방 영토 수호, 여진족 정벌]
국방 강화에도 힘써, 윤필상을 파견하여 압록강 주변의 여진족을 소탕하고 국경 방비를 굳건히 했습니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하며 조선의 북방 영토를 안정적으로 지켜냈습니다.
[왕비 윤씨 폐출, 비극의 씨앗이 되다]
첫 왕비 공혜왕후가 요절하자 후궁 숙의 윤씨를 새 왕비로 맞이했지만, 윤씨는 성종의 다른 후궁들에게 극심한 질투심을 보이고 독약을 숨기는 등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와 대신들의 탄핵이 이어지자, 성종은 결국 윤씨를 왕비에서 폐출시켰습니다.
이 사건은 훗날 그녀의 아들 연산군에 의해 갑자사화의 비극을 낳는 씨앗이 됩니다.
1482
[폐비 윤씨 사사, 씻을 수 없는 상처]
폐출된 윤씨를 사사해야 한다는 언관들의 강력한 탄핵이 이어지자, 성종은 원자의 생모라는 이유로 반대했지만 결국 양사의 거듭된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사약을 내렸습니다.
이 사건은 성종 자신에게도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훗날 연산군이 광폭한 정치를 펼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1485
[조선 유교정치의 정수, 『경국대전』 완성 및 반포]
성종 재위 최대 업적 중 하나로,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을 완성하고 반포했습니다.
이로써 조선은 건국 이래 오랜 기간에 걸쳐 추진된 법전 편찬 작업을 마무리하며 유교적 통치 규범의 기틀을 확고히 다졌습니다.
이는 조선왕조 500년의 통치 기반을 마련한 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경국대전』은 이전의 법들을 집대성하고 시대에 맞게 보완하여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 걸쳐 기준을 제시한 최고 법전입니다. 성종은 이 외에도 『대전속록』(1492),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동문선』 등 다양한 서적을 편찬 및 간행하며 문화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1491
[두만강 일대 여진족 소탕 작전]
허종을 파견하여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 소굴을 성공적으로 소탕하며 북방 국경의 안정을 도모했습니다.
이듬해에는 이계동을 함길도에 파견하여 여진족의 위협에 철저히 대비하는 등 적극적인 국방 정책을 펼쳤습니다.
1494
[39세의 나이로 승하하다]
폐결핵, 천식, 두통, 기허증 등 다양한 질병에 시달리던 성종은 갑작스러운 등창 악화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39세의 나이로 승하했습니다.
그의 유언 중 하나는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을 100년간 공론화하지 말라는 것이었으나, 이는 지켜지지 못하고 훗날 갑자사화의 불씨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