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조선)

무신, 정치인, 국왕, 창업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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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07- 19: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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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격동기에 탁월한 군사적 재능과 뛰어난 리더십으로 홍건적과 왜구를 격퇴하며 전쟁 영웅으로 부상했습니다. 30여 년간 전장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기록적인 무패 신화를 쌓았죠.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장악한 후 신진사대부와 함께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 천도 및 제도 정비를 통해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창업 군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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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5

[금척을 품고 태어나다]

고려 동북면 화령에서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기품과 지략, 용맹을 타고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어린 이성계 본인도 각각 선녀와 신인에게 황금 자를 받는 꿈을 꾸었다고 전해지며, 이는 훗날 삼한 강토를 헤아릴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예언처럼 들렸습니다.

1356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투항하다]

고려 공민왕 5년, 원나라에 부역하던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공민왕에게 투항하여 쌍성총관부 탈환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는 훗날 그가 고려의 주요 무장으로 성장하는 첫걸음이 되었습니다.

1361

[홍건적에게 함락된 수도를 되찾다]

독로강 만호 박의의 반란을 평정한 같은 달, 홍건적 20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침입하여 고려의 수도 개경이 함락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합니다.

이성계는 수많은 전투에서 단련된 2,000여 명의 강력한 친병 조직(대부분 기병)을 이끌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여, 위기에 빠진 고려를 구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1362

[북방의 명장을 꺾고 명성을 떨치다]

공민왕 11년, 심양행성승상 나하추가 수만 군대를 이끌고 함경도 홍원에 침입하자 이성계는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되어 출정합니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함흥 평야에서 원나라 군대를 격퇴하며 그의 명성은 더욱 크게 떨쳐졌습니다.

적장 나하추마저 그의 용맹과 군사적 재능에 감탄했다고 전해집니다.

1364

[원나라와 여진족의 침략을 막아내다]

원나라 기황후가 덕흥군을 옹립하려 군사를 이끌고 침입하자 최영 등과 함께 이를 막아냈습니다.

직후 함주를 침공한 여진족 김삼선·김삼개 형제마저 격퇴하여 밀직부사에 임명되는 등, 북방 영웅으로서의 입지를 굳혔습니다.

1370

[요동성까지 진격하여 국토를 확장하다]

공민왕 19년, 원나라의 동녕부를 원정하여 국토를 크게 확장했습니다.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사흘에 걸쳐 도강한 후 진격하여 요동성을 점령하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여주었습니다.

1380

[기록적인 승리, 황산대첩을 이끌다]

우왕 6년, 진포 해전으로 퇴로가 막힌 왜구가 육지에 상륙하여 대규모 군단을 이루고 내륙을 휘젓자, 이성계는 도순찰사로 임명되어 출전합니다.

지리산 운봉에서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를 만나 신궁(神弓)다운 활솜씨로 적장을 쓰러뜨리고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죽은 왜구의 곡성이 만 마리 소의 울음소리 같았고, 냇물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 승리는 왜구 격퇴의 전환점이 된 역사적인 대첩입니다.

이성계는 황산대첩에서 15~16세 소년 장수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에게 고전했으나, 그의 투구 꼭지를 두 번 맞춰 벗겨낸 뒤 이지란이 화살로 이마를 맞추어 쓰러뜨렸습니다. 또한 활솜씨 대결에서 원나라 순제마저 놀라게 했던 황상과의 대결에서도 50발 이후 승리하며 '신궁'으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습니다.

1383

[국가 개혁의 비전을 제시하다]

동북면에 침입한 호발도에게 승리한 후, 우왕에게 '안변책'이라는 변경 안정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군사 문제의 근본 원인을 사회 구조적 모순과 민생 문제로 지목하며 백성 착취 금지, 토지 제도 복구, 유능한 인재 등용 등 당시 무장으로서는 드물게 사회 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한 정책 건의였습니다.

1388

[역사를 바꾼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다]

명나라가 철령 이북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자, 최영과 우왕은 요동 정벌을 강행하려 합니다.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하는 것, 농번기 동원, 왜구 침입 우려, 여름철 질병 등 '4불가론'을 내세워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압록강 위화도에서 장마와 군량 문제를 구실 삼아 좌군도통사 조민수를 설득하여 회군을 결행했습니다.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와 신진사대부가 결합하여 권문세족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자, 조선 왕조 개창의 결정적 단초를 제공했습니다. 이성계, 심덕부, 이지란이 회군을 결의한 기록화 '장수군도'가 새로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평양부터 위화도까지 19일이 걸렸던 진군과 달리 개경까지 불과 9일 만에 돌아온 것은 그의 치밀한 계획성을 보여줍니다.

[고려의 최고 권력자를 숙청하다]

위화도 회군 후 개경을 점령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최영과의 혈전 끝에 그를 제거했습니다.

결국 최영은 12월 개경으로 압송되어 처형되면서 이성계는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로 부상했습니다.

1389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다]

위화도 회군 직후, 최영의 딸인 영비 최씨 폐위를 거부하던 우왕을 폐위했습니다.

이후 이색과 조민수에 의해 옹립된 9세 창왕을 잠시 받들다가, 1년 후 조준, 정몽주, 정도전 등과 함께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닌 신돈의 아들, 손자라는 조작된 논리를 이용해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했습니다.

1391

[백성들의 삶을 바꾼 토지 개혁, 과전법을 시행하다]

위화도 회군 이후, 대농장 소유와 불법 겸병으로 국고를 고갈시키고 양극화를 심화시켰던 고려 귀족 기득권의 저항에도 굴하지 않고 전면적인 사전(私田)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조준으로 하여금 과전법을 제정하게 하여 고려 말 재정 고갈을 해소하고 신흥세력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과전법은 근본적으로 고려 권문세족으로부터 신흥 사대부로의 부의 이동이 큰 목표였으며, 농민들에게 토지를 직접 분배하는 정도전의 계구수전론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개경 거리 한복판에서 고려의 모든 공사 전적(토지대장)을 소각하며 강력하게 추진되었습니다.

1392

[하여가와 단심가, 그리고 선죽교의 비극]

이성계가 사냥 중 낙마하여 큰 부상을 당하자, 정몽주는 이 틈을 타 역성혁명파 핵심 인물들을 유배 보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성계가 개경으로 돌아오자, 그의 아들 이방원은 정몽주를 만나 하여가로 마음을 떠봤으나, 단심가로 고려에 대한 충절을 밝히자 결국 선죽교에서 제거했습니다.

[475년 고려를 끝내고 조선을 건국하다]

1392년 7월, 조준, 남은, 정도전, 배극렴 등은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마침내 7월 17일, 개경 수창궁에 나아가 왕위를 계승하며 새로운 왕조 조선을 개창했습니다.

이로써 고려는 475년 만에 막을 내리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393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다]

처음에는 민심 동요를 우려하여 국호를 그대로 고려로 두었으나, 즉위 2년이 되는 1393년 3월 27일(음력 2월 15일), 새 왕조의 국호를 '조선'으로 공식 선포했습니다.

1394

[고려 왕족 몰살, 후환을 제거하다]

조선 건국 초기, 개국 공신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고려 왕조의 후환을 없애기 위해 왕씨 일족을 대대적으로 숙청했습니다.

태조 3년(1394년) 여름에는 왕씨들을 바다에 빠뜨려 죽이고 남은 일족을 찾아 모두 죽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살아남은 왕씨들은 변성명을 하며 목숨을 부지했고, 왕(王)자에서 변형된 전(田, 全), 옥(玉), 차(車), 신(申) 등으로 성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왕씨 멸족령은 태종 시대에 이르러 해제되었습니다.

[새로운 수도, 한양으로 천도를 결정하다]

즉위 한 달 만에 수도를 옮길 결심을 하고, 1394년 8월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하여 새 수도 도시 계획을 구상했습니다.

처음 계룡산이 후보지로 지목되었으나 하륜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무학대사와 정도전 등과 함께 둘러본 고려의 남경 터, 즉 지금의 한양으로 최종 천도를 결정했습니다.

“조운이 잘 통하고 사방의 이수도 고르니 사람들에게 편리하다”는 이유로 한양이 선택되었으며, 정도전의 견해에 따라 현재 경복궁 터에 정궁을 지었습니다.

[새로운 왕조의 보금자리를 한양에 마련하다]

1394년 10월, 각 관청당 최소 인원만 남기고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개경을 출발, 새로운 수도인 한양으로 들어왔습니다.

이곳의 이름을 '한성부'로 고치고, 12월부터 본격적인 궁궐 및 도시 건설에 착수했습니다.

1395

[한양 도성을 쌓아 국가의 상징을 세우다]

1395년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정도전을 총책임자로 임명하여 한양 도성 건설을 지시했습니다.

태조 5년(1396년)에 시작된 한양 성곽은 불과 1년여 만에 완성되어 새로운 왕조의 기틀과 상징을 공고히 했습니다.

1398

[피로 얼룩진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다]

정비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과 계비 신덕왕후 강씨 소생 왕자들 사이의 왕위 계승 갈등이 심화되던 중, 태조가 정도전을 앞세워 왕자들이 가진 사병을 혁파하려 했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은 정도전 일파가 세자를 조종해 자신들을 해치려 한다는 조작된 명분으로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비롯한 핵심 관료들과 신덕왕후 소생 왕자들을 살해하는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충격 속에서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사랑하는 아들과 사위, 오랜 신하를 잃은 태조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미 실권마저 잃은 그는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태상왕으로 물러나면서, 자신이 세운 조선의 미래를 장남 이방원의 손에 맡기게 됩니다.

1400

[두 아들의 권력 다툼, 제2차 왕자의 난]

태종으로 즉위한 이방원과 넷째 아들 방간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대립이 발생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이 발발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이방원이 최종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며 조선 초기의 왕권 확립에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1402

[함흥차사의 전설이 시작되다]

퇴위 후 함경도로 돌아간 태조가 돌아오지 않자, 아들 태종은 여러 차례 사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태조는 오는 사신마다 활을 쏘아 죽였다는 야사가 전해지며, 이로 인해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이는 조사의의 난과도 연관된 태조의 아들에 대한 깊은 불만을 보여줍니다.

야사에 따르면 태종의 아내 원경왕후 민씨의 천거로 무학대사가 차사로 가서 겨우 서울로 오게 하였으며, 오는 길에도 두 차례 이방원을 살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체념했다고 합니다.

1408

[조선 건국의 초석을 다지고 승하하다]

태상왕으로 7년을 더 살며 조용한 나날을 보내던 태조는 1408년 6월 27일(음력 5월 24일), 지병인 중풍이 악화되어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의 나이로 승하했습니다.

그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의 건원릉입니다.

1898

1898 사후 490년

[대한제국 고황제로 추존되다]

광무 원년(1898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에 의해 조선의 개국 시조로서 '고황제'로 추존되었습니다.

동시에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 '강헌'을 삭제하고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라는 정식 시호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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