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 (조선)
조선 국왕, 군인, 정치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09-20- 08:20:58
조선의 제2대 국왕 정종은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로 뛰어난 무예와 지략으로 왜구 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이라는 격동의 시기에 왕위에 올랐으나 권력욕 없이 왕위를 동생에게 선양하며 혼란스러운 정국을 안정시킨 인물입니다. 재위 기간 동안 백성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며 실질적인 국가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했으며 이후 평화로운 상왕으로서 여생을 보내 흥미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 조선 2대 국왕, 정종 이방과의 탄생!
- 정종의 첫 전공! 지리산 왜구 토벌!
- 친원파 축출! 고려 정치 지형을 바꾸다!
- 조선 건국, 영안군 이방과로 책봉!
- 조선 군권의 핵심! 중군절제사에 오르다!
- 제1차 왕자의 난, 영안군 왕세자에 오르다!
- 조선 2대 국왕 정종, 왕좌에 오르다!
- 수도 개경 천도와 집현전 설치!
- **세계 최초**의 '정·경 분리' 원칙! 분경금지법 제정!
- 제2차 왕자의 난, 정안공 왕세자 책봉!
- **최대**의 개혁! 사병 혁파와 '군·정 분리'!
- 억울한 노비들을 구제하다! 노비변정도감 설치!
- 정종, 태종에게 왕위를 선양하고 상왕으로 물러나다!
- 평화로운 여생을 마친 정종, 승하하다!
- 250년 만에 추존된 묘호, '정종'!
1357
[조선 2대 국왕, 정종 이방과의 탄생!]
조선의 제2대 국왕 정종 이방과가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온화한 성품과 용맹함, 뛰어난 지략을 겸비하여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공민왕 6년(1357년) 음력 7월 1일,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이방과는 성품이 온화하고 용맹하며 지략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1377
[정종의 첫 전공! 지리산 왜구 토벌!]
21세의 젊은 나이에 아버지 이성계를 따라 지리산까지 침입한 왜구를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후 21년 동안 전쟁터를 누비며 왜구 토벌에 앞장서 조선 건국의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습니다.
우왕 3년(1377년) 음력 5월, 이성계를 수행하여 지리산에 진출한 왜구를 토벌하는 데 일조했으며, 이때부터 국왕 즉위까지 약 21년간 왜구 토벌 등 전쟁터에서 활약했습니다. 이 공로로 추충여절익위공신에 책록되고 요직을 역임하며 무장으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았습니다.
1386
[친원파 축출! 고려 정치 지형을 바꾸다!]
고려 우왕과 최영의 주도 아래, 조정을 농단하던 친원파 이인임 일당을 축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사건은 고려 말기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고 새로운 정치 국면을 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왕 12년(1386년), 순군만호부의 부만호가 되어 도만호 왕안덕과 함께 고려 조정을 농단하던 친원파 이인임 등을 축출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이는 고려 말 국내적으로 권문세족의 전횡이 심화되고 국외적으로 왜구 침략이 위태로운 시기에 이루어진 중요한 정치적 전환이었습니다.
1392
[조선 건국, 영안군 이방과로 책봉!]
아버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정종은 '영안군'으로 책봉되었으며 태조의 친위부대인 의흥친군위 절제사에 임명되어 조선 초기의 혼란 속에서 국방을 책임지는 핵심 인물로 부상했습니다.
조선 태조 1년(1392년), 아버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영안군으로 책봉되고, 태조의 친위부대인 의흥친군위 절제사에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1393년에는 황해도 문화현과 평안도 영녕현에 출군하여 왜구를 물리치며 공훈을 세웠습니다.
1395
[조선 군권의 핵심! 중군절제사에 오르다!]
태조가 의흥삼군부를 개편하며 조선의 병권을 3군으로 나누었는데, 영안군 이방과는 핵심 군사 조직인 '중군절제사'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경기좌우도 및 동북면을 관할하며 요동 공격을 위한 훈련에 깊이 관여하게 됩니다.
태조 3년(1395년), 태조는 의흥삼군부를 개편하고 10위를 중, 좌, 우의 3군으로 나누었으며, 각 군마다 종친과 대신들을 절제사로 임명했습니다. 영안군 이방과는 중군절제사(경기좌우도 및 동북면 관할)에 임명되어 병권에 관여하게 되었고, 이는 정도전 등이 요동 정벌을 청한 데서 나온 조치였습니다.
1398
[제1차 왕자의 난, 영안군 왕세자에 오르다!]
동생 정안군(이방원)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왕위에 뜻이 없던 영안군 이방과는 태조의 장자가 이미 사망했기에 왕세자로 책봉되는 운명적인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태조 6년(1398년) 음력 8월, 동생 정안군(태종)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본래 왕위에 뜻이 없었으나, 태조의 장자 진안대군이 이미 사망하였기에 영안군은 왕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조선 2대 국왕 정종, 왕좌에 오르다!]
왕세자로 책봉된 지 불과 한 달 뒤, 태조의 양위로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의 제2대 국왕으로 등극했습니다.
그는 왕위에 큰 관심이 없었으며, 오히려 동생 정안군에게 왕위를 추천했을 정도로 겸손한 인물이었습니다.
1398년 음력 9월 5일, 태조의 양위로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 제2대 국왕으로 등극했습니다. 그는 우왕 3년(1377년)부터 21년 동안 전쟁터를 누빈 군인 출신이며, 일찍이 정안군(태종)이 창업 대의에 가장 열정적이었음을 인정하여 직접 왕위에 오를 것을 추천하는 등 왕위에 관한 관심이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1399
[수도 개경 천도와 집현전 설치!]
정종은 재위 원년, 수도를 한양에서 고려의 옛 수도인 개경(개성)으로 천도했습니다.
이는 '왕자의 난'으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고 정국의 안정을 꾀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동시에 학문 연구를 위한 '집현전'을 설치하며 문치 기반을 다졌습니다.
정종 원년(1399년) 3월, 한양에서 개성으로 천도하였고, 집현전을 설치하여 경적(유교 경전)의 강론을 담당케 하여 학문 진흥에 힘썼습니다.
[세계 최초의 '정·경 분리' 원칙! 분경금지법 제정!]
관인들이 권세가에게 청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분경금지법'을 제정했습니다.
이는 '정치와 경제의 분리원칙'을 최초로 법제화한 것으로, 조선의 투명한 국정 운영을 위한 매우 중요한 개혁이었습니다.
정종 원년(1399년) 8월,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을 제정하여 관인들이 권세가에 청탁하는 것을 방지했습니다. 이는 '정치와 경제의 분리원칙'을 최초로 제정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1400
[제2차 왕자의 난, 정안공 왕세자 책봉!]
다시금 '제2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자, 정종은 혼란을 수습하고 왕위 계승을 명확히 하기 위해 동생 정안공(이방원)을 왕세자로 책봉했습니다.
이는 그의 왕위 계승에 대한 무욕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결정이었습니다.
정종 2년(1400년) 2월, 제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태종(정안공)을 왕세자로 책봉하였습니다.
[최대의 개혁! 사병 혁파와 '군·정 분리'!]
개인의 사병을 혁파하고 군사권을 의흥삼군부로 집중시켰습니다.
이는 '정치인과 군인의 겸직을 금지'시켜 군무와 정무의 분리원칙을 최초로 제정한 중요한 개혁으로, 조선의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정종 2년(1400년) 4월, 사병(私兵)을 혁파하여 군사권을 의흥삼군부로 집중시켰습니다. 이는 '정치인과 군인의 겸직을 금지'시켜 군무와 정무의 분리원칙을 제정한 것으로,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중추원을 삼군부와 승정원으로 분리 개편하는 등 국가 기구를 정비했습니다.
[억울한 노비들을 구제하다! 노비변정도감 설치!]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고려 말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양인으로 환원시켰습니다.
이는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 국가의 생산력을 증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중요한 민생 안정책이자 사회 개혁이었습니다.
정종 2년(1400년) 6월, 노비변정도감(奴婢辨正都監)을 설치하여 고려 말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양인으로 환원시켰습니다.
[정종, 태종에게 왕위를 선양하고 상왕으로 물러나다!]
재위 2년,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겪으며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왕세자 이방원(태종)에게 스스로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났습니다.
맏형으로서 형제간의 반목을 해소하려는 그의 대범한 결단이었습니다.
정종 2년(1400년) 음력 11월 13일, 왕세자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습니다. 그는 맏형으로서 남아있는 형제들 간의 반목을 일소하고 정치를 안정시키기 위한 선택이었으며, 재위 중에는 형제간의 친목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1419
[평화로운 여생을 마친 정종, 승하하다!]
상왕으로 물러난 후 인덕궁에서 사냥, 격구, 연회, 온천 여행 등으로 평화롭고 자유로운 여생을 보냈습니다.
세종 1년, 63세의 나이로 승하했으며, 그의 사후에는 왕위 계승자인 태종이 아닌 장자 의평군이 대리 상주가 되는 이례적인 절차가 따랐습니다.
세종 1년(1419년) 음력 9월 26일, 인덕궁에서 63세의 나이로 승하했습니다. 상왕으로 물러난 정종은 인덕궁에서 거주하면서 사냥과 격구, 연회, 온천여행 등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사후 국상을 치를 때, 왕위계승자인 태종이 아닌 장자 의평군 이원생이 섭상주(대리상주)가 되는 이례적인 절차가 따랐습니다.
1681
[250년 만에 추존된 묘호, '정종'!]
정종 승하 후 약 250여 년이 지난 숙종 7년, 비로소 '정종(定宗)'이라는 묘호가 정식으로 추존되었습니다.
'정종'은 '태조의 업적을 계승하여 정국을 잘 다스렸으며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크게 염려하였다'는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정종(定宗)이라는 묘호는 사후 250여 년 후인 1681년(숙종 7년), 제6대 단종과 함께 정해졌습니다. 정종(定宗)의 의미는 '태조의 업적을 계승하여 정국을 잘 다스렸으며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크게 염려하였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