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민주화 운동, 고문 사건, 인권 운동

num_of_likes 84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6:29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no image
민주화 운동, 고문 사건, 인권 운동
report
Edit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전환점이 된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경찰의 잔혹한 고문과 은폐 시도는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고 결국 6월 항쟁의 불씨가 되어 민주화를 이끌어냈습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인권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정의 실현을 향한 국민들의 열망을 폭발시킨 상징적인 역사로 기록됩니다.

연관 연혁
  1. 등록된 연관연혁이 없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1986

[박종철 학생, 학생 운동 참여 및 구속]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은 1986년 청계피복노조 시위 참여로 구속된 이력이 있으며, 출소 후에도 학생 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민주화를 위한 목소리를 냈다. 이는 그가 치안본부에 연행되는 배경이 된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 재학생 박종철은 1986년 청계피복노조의 합법화를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출소한 이후에도 그는 학생 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하며 당시 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활동을 지속했다.

1987

[박종철 학생, 대공분실에 강제 연행]

1월 13일 자정 무렵,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강제로 연행되었다. 이는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한 명목이었다.

1987년 1월 13일 자정경,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재학생 박종철은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강제로 연행되었다. 당시 연행의 명목은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추위' 지도위원으로 수배 중이던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박종철 학생, 경찰 고문으로 사망]

1월 14일,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서 박종철 학생이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진술하지 않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물고문 등을 가했고, 결국 박종철은 고문으로 사망했다. 경찰은 즉시 사건을 은폐하고 시신을 화장하려 시도했다.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박종철은 박종운의 소재를 묻는 경찰의 취조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했으며, 결국 박종철은 같은 날 11시 45분경 고문으로 인해 요절했다. 경찰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14일 밤에 시신을 화장할 계획을 세웠으나, 최환 부장검사가 사체보존명령을 내려 저지되었다. 사건 지휘는 그날 밤 당직이었던 안상수 검사가 맡았다.

[언론, '경찰 조사 대학생 쇼크사' 보도]

1월 15일,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의 단독 보도로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 기사가 석간에 실리면서 박종철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소식은 다른 언론과 방송을 통해 확산되었다.

1987년 1월 15일,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가 한 검찰 간부의 말을 단서로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2단 기사를 작성, 석간에 단신으로 실었다. 이 보도는 다른 국내 언론과 외국 언론에서도 인용되었고, KBS와 MBC 저녁뉴스에서도 단신으로 보도되면서 박종철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박종철 학생 시신 부검, 고문의 흔적 확인]

1월 15일 오후 6시가 넘어 한양대 병원에서 박종철 학생의 시신 부검이 실시되었다. 부검 결과 온몸에 피멍과 출혈 흔적, 훼손된 신체 부위 등이 확인되었고, 폐에서 수포음이 들리는 등 고문의 정황이 명백히 드러났다.

1987년 1월 15일 오후 6시가 넘어 한양대 병원에서 박종철 학생의 시신에 대한 부검이 실시되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황적준 박사와 한양대 박동호 교수가 부검을 맡았으며, 부검 결과 박종철의 온몸에 피멍이 들고 엄지와 검지 간 출혈 흔적, 사타구니와 폐 등이 훼손되어 있었으며 복부가 부풀어 있고 폐에서 수포음이 들리는 등 심각한 고문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치안본부, '책상을 탁 치니 억' 고문 은폐 시도]

1월 16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박종철이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책상을 탁 치니 억소리를 지르며 쓰러져 쇼크사했다"고 거짓 발표하며 고문을 은폐하려 했다. 그러나 동아일보가 사건 현장에 물이 흥건했다는 부검의의 진술을 확보하며 고문치사 의혹을 제기했다.

1987년 1월 16일, 강민창 당시 내무부 치안본부장과 박처원 치안감이 기자회견을 열고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 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책상을 '탁' 치니 갑자기 ‘억’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쇼크사했다"고 발표하며 고문을 은폐하려 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당시 부검의 오연상 의사로부터 "사건 현장에 물이 흥건한 것을 목격했다"는 진술을 확보하여 고문에 의한 요절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황적준 박사, 고문 정황 담긴 부검 보고서 작성]

1월 17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황적준 박사는 군부와 경찰의 회유와 협박을 물리치고 박종철의 사망이 고문에 의한 것임을 암시하는 부검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이후 진실 규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87년 1월 17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황적준 박사는 군부와 경찰의 협박과 회유를 뿌리치고 박종철의 사망 원인에 대한 부검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는 1년 뒤 부검 과정에서 경찰의 회유와 협박을 받은 내용을 적은 일기장을 언론에 공개하기도 하며, 고문에 의한 사망이라는 진실을 밝히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치안본부, 뒤늦게 고문 인정하며 사건 축소 발표]

1월 19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4일 만에 기존 입장을 뒤집고 박종철이 '가혹행위'로 질식사했다고 시인했다. 그러나 조한경, 강진규 두 명의 경찰관만을 주도자로 지목하며 사건을 축소하려 했고, 시신을 강제 화장하며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

1987년 1월 19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다시 특별 기자회견을 열어 기존의 입장을 뒤집고 "박종운 군의 소재를 묻는 심문에 답하지 않자 머리를 한 차례 잠시 집어넣고 내놓았으며, 계속 진술을 거부하자 다시 집어넣는 과정에서 급소인 목 부위가 욕조 턱에 눌려 질식사했다"고 "가혹행위"로 인한 요절을 시인하였다. 이후 조한경과 강진규 등 고문 경찰관 2명만을 사건 주도자로 지목해 구속하며 사건을 축소하려 했고, 부검을 거친 박종철 군의 시신을 가족 허락 없이 벽제 화장터에서 강제 화장하는 등 증거인멸을 시도했다. 당시 내무부장관 정호용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며 고문 사실을 부인했다.

[구치소 재소자 통해 박종철 사건 은폐 진상 확인]

서울남부구치소 보안계장 안유는 고문 경찰관들이 추가 경찰관 3명이 고문에 관여했음을 알게 되고, 이를 당시 수감 중이던 이부영에게 전달했다. 이부영은 쪽지에 이 사실을 적어 교도관 한재동을 통해 외부에 알렸고, 이는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에 전달되어 진상 폭로의 단초가 되었다.

사건 주도자로 구속된 경찰 두 명이 서울남부구치소에 수감되자, 당시 안유 구치소 보안계장은 그들 외에 추가로 경찰관 3명이 고문에 관여하였고 경찰이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한다는 정황을 포착했다. 안 계장은 마침 수감 중이던 이부영 당시 전민련 상임의장에게 그 사실을 전달하였고, 이 씨는 쪽지에 추가 관여 및 은폐 사실을 적은 뒤 친분이 있었던 한재동 교도관을 통해 외부에 전달토록 하였다. 해당 쪽지는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와 함세웅 신부에게까지 전달되어 폭로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천주교 사제단, 박종철 고문치사 진상 조작 전면 폭로]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도미사 중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음을 폭로했다. 그는 대공경찰 5명이 고문에 가담했으며, 경찰이 이를 은폐하고 2명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며 거액을 주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혔다. 이 폭로는 6월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도미사 도중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음을 전면 폭로하였다. 그는 대공경찰의 핵심 인물인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의 주도 아래 모두 5명이 고문에 가담했으나, 경찰이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하여 단 2명만이 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꾸미고 총대를 멘 2명에게는 거액의 돈을 주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새롭게 밝혔다. 이 폭로는 통일민주당의 진상조사 착수와 함께 국민적 분노를 폭발시키며 6월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1988

[황적준 박사, 경찰 회유·협박 일기장 공개]

박종철 사건 부검을 맡았던 황적준 박사는 1988년, 부검 과정에서 경찰의 회유와 협박을 받았던 내용을 담은 일기장을 언론에 공개하며 사건의 진실 규명에 다시 한번 힘을 실었다.

박종철 사건의 부검을 담당했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황적준 박사는 1987년 부검 보고서 작성 당시 군부와 경찰로부터 받았던 회유와 협박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일기장을 1988년에 언론에 공개했다. 이는 정부의 은폐 시도와 맞서 진실을 밝히려는 용기 있는 행동으로 평가받으며,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데 기여했다.

2000

[박종철이 구하려 했던 박종운, 한나라당 입당]

박종철이 고문 사망으로까지 지켜주려 했던 선배 박종운은 2000년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에 입당하며 극우-뉴라이트 계열로 변절, 이명박, 박근혜를 지지하는 등 논란의 정치 행보를 걸었다.

박종철이 고문으로 요절하면서까지 그 소재를 밝히지 않으려 했던 선배 박종운은 2000년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에 입당한 후 극우-뉴라이트 계열로 변절하여 이명박과 박근혜를 지지하는 등 논란이 되는 정치 행보를 걷게 되었다. 이는 이 사건의 아이러니한 후일담으로 많은 이들에게 회자된다.

2019

[SBS 런닝맨, 박종철 사건 희화화 자막 논란]

2019년 6월 2일 SBS 예능 프로그램 '런닝맨'에서 "1번을 탁 찍으니 억 사례 들림"이라는 자막이 삽입되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희화화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2019년 6월 2일 일요일 오후에 방송된 SBS 예능 프로그램 《런닝맨》에서는 이날 방송 내용 중 전소민이 사레 들린 기침을 하자 ‘1번을 탁 찍으니 억 사례 들림’이라는 내용의 자막이 삽입되었다. 이 자막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경찰이 고문을 은폐하기 위해 사용한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거짓 발표를 희화화한 것으로 해석되어 시청자들에게 큰 논란을 자아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댓글 게시판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