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정부, 독립운동 단체, 망명 정부, 근현대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6:14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여 설립된 한국의 망명 정부입니다. 상하이에서 수립된 이래 국내외 독립운동을 주도하며 끈질긴 항일 투쟁을 벌였고 여러 위기와 갈등 속에서도 끊임없이 재편과 통합을 거듭했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법통으로 계승되며 광복된 조국의 기틀을 마련한 한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독립운동 기관입니다.
- 전국을 뒤흔든 '3.1 운동' 발발
-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하이에서 위대한 시작을 알리다
- 역사적인 대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탄생
- 가장 뼈아픈 비극,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 와해
- 국제공산당 자금사건과 김구의 김립 암살
- 내부 혼란 극에 달하다, '국민대표회의' 결렬
- 재정난과 갈등 속, 이승만 대통령직 탄핵 면직
- 일왕에게 던진 폭탄, 이봉창 의거
- 세계를 놀라게 한 영웅, 윤봉길 의거
-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의 대장정 피난 시작
- 김구-장제스 극비 회담, 한중 연합의 초석 마련
- 피로 얼룩진 통합 노력, '남목청 사건' 김구 피격
- 임시정부의 군사력, '한국 광복군' 공식 창설
- 김구, 임시정부 주석으로 강력한 리더십 구축
- 임시정부, 일본에 '대일선전성명서' 발표
- 한국 광복군 통수권 환수, 김구 중심의 삼위일체 체제 확립
- 자주적 광복을 위한 최후의 계획, '서울 진공 작전' 좌절
- 미군정, 임시정부의 '정통성' 공식 불인정 선언
-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감격의 조국 귀환
-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 결정, 전국적 '반탁 파업' 확산
- 한반도 분단의 서막,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 통일정부의 꿈 좌절,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최종 결렬
- 장덕수 피살 사건, 한민당과 임시정부의 결별
- 김구, 남한 단독 총선거 반대하며 통일 호소
- 통일을 향한 마지막 시도, '남북협상'과 4김 회동
- 분단의 현실화,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 실시
- '대한민국 제헌 헌법' 제정으로 임정 법통 계승 명시
-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임시정부의 위대한 해산
1917
[미국의 민족자결주의 제기와 독립 열기 고조]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며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기했습니다.
이는 '각 민족은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타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내용으로, 전 세계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주며 한국 독립운동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독립운동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1919년 1월 18일 프랑스에서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었고, 신한청년당은 김규식 등을 대표로 파견하여 독립 탄원서를 제출했으나, '정부 대표가 아니면 안 된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당했습니다.
1919
[고종 독살설과 국내외 독립선언 확산]
대한제국 고종이 일제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조선 민중의 반일 감정이 폭발적으로 고조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만주 지린에서는 해외 독립운동가 39명의 이름으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고, 일본 도쿄에서는 조선 유학생들이 '2.8 독립 선언'을 발표하며 독립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1919년 2월 1일 발표되었으며, 2.8 독립 선언은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 YMCA 강당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3.1 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됩니다.
[전국을 뒤흔든 '3.1 운동' 발발]
고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서울 탑골공원에서 '3.1 독립선언서'가 발표되며 조선이 독립국가임을 알리는 3.1 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격렬하게 일어났습니다.
약 202만 명의 민중이 참여한 이 운동은 독립 의지를 대표할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습니다.
이는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비폭력 만세 시위였습니다.
당시 3.1 만세 운동 참가자는 조선 전체 인구의 10%에 달했으며, 사망자 7,500여 명, 부상자 16,000여 명, 체포·구금된 사람이 46,000여 명에 달했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이 일제 경찰에 연행·구금되면서 사실상 지도부가 부재한 상황이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첫 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 탄생]
3.1 운동 직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전로한족중앙총회가 개편되어 한국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노령 임시정부)가 설립되었습니다.
이는 각지에서 임시정부 수립 움직임이 일어나는 시발점이 됩니다.
대한국민의회는 한군명, 문창범, 이동휘 등의 주도하에 설립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상하이와 국내 서울에서도 각각 '상해 임시정부'와 '한성정부' 수립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하이에서 위대한 시작을 알리다]
3.1 운동의 뜨거운 열기를 바탕으로 일제의 식민 통치를 부정하고, 한반도 안팎의 항일 독립운동을 이끌기 위해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 공화제 정부를 지향하며,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골간으로 한 '대한민국 임시 헌장'을 채택했습니다.
초대 국무총리로는 이승만이 추대되었습니다.
상하이의 민족지도자들이 4월 10일 밤새 논의를 거쳐 29인의 임시의정원 제헌의원을 구성했습니다. 이들은 한성정부의 각료 구성을 수정하는 형식으로 절차를 밟아나갔습니다. 이 임정 수립일은 이후 공식적으로 기념되었습니다.
[국내에 수립된 또 다른 희망, '한성정부' 탄생]
서울(경성)에서 '공화국 만세!'를 외치며 13도 대표 23명의 이름으로 '한성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이동휘를 국무총리총장으로 하는 민주공화 체제를 선언했으며, 이승만은 워싱턴 D.C.에 대한공화국 활동본부를 설치하고 각국에 독립 선포 공문을 발송하며 외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한성정부를 주도한 인사들은 이미 4월 2일 인천에서 13도 대표자 회의를 통해 각 책임자 명단을 선정했으며, 4월 8일에는 임시헌법 초안과 각원 명단을 상하이로 전달했습니다. 이후 한성정부 인사들은 상하이로 건너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임시정부, '대통령' 직함 둘러싼 첫 내부 갈등 폭발]
임시정부 내에서 이승만의 '대통령' 직함 사용을 두고 안창호와 이동휘 등 주요 인사들 사이에 첨예한 논란이 시작되었습니다.
안창호는 이승만에게 '대통령' 직명이 아닌 '집정관 총재' 직함을 사용하라고 요구했고, 이승만은 대외 외교 활동의 효율성을 들어 대통령 명의를 유지하겠다고 맞섰습니다.
이는 임정 초기의 내부 권력 다툼과 갈등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이동휘와 안창호는 이승만이 대통령 직함을 사용하는 것을 '대가리가 썩었다', '정신병자'라고 비난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승만은 자신은 '집정관'을 'President'로 이해했다고 해명하며, 국내외 동포들의 단합을 호소했습니다. 이 논란은 1920년 2월 18일 이승만이 대통령 직함을 사용하겠다고 통보하며 일단락되었으나, 이후의 내부 갈등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역사적인 대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탄생]
3.1 운동 직후 각지에서 설립되었던 대한국민의회, 상해 임시정부, 한성정부를 포함한 국내외 7개의 임시정부들이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원칙하에 상하이를 거점으로 마침내 하나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개헌 형식을 통해 통합되었습니다.
이로써 국호는 '대한민국', 정치 체제는 '민주공화국'으로 확립되었으며, 대통령제와 삼권분립이 도입되는 등 근대 국가의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초대 대통령으로는 이승만이 추대되었습니다.
통합 과정에서 상해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 간의 통합 문제가 쉽게 결론 나지 않았으나, 1919년 8월 18일 제6회 임시의회에서 한성정부를 '표준'으로 삼아 통일 임시정부를 조직하기로 가닥이 잡혔습니다. 이는 한성정부의 국민적 절차에 의한 정통성과 상하이의 지리적 이점을 모두 살린 결정이었습니다. 이동휘가 상하이에 도착하면서 통합이 성사되었습니다. 이때 제정된 임시 헌법은 대한제국의 영토를 계승하고 구 황실을 우대한다고 명시했습니다.
1921
[이동휘, 내부 갈등 속 국무총리직 사임]
국제공산당 자금사건과 임시정부 내부의 노선 갈등이 심화되자, 국무총리 이동휘는 자신의 쇄신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국무총리직에서 사임했습니다.
이는 임시정부 내 좌익과 민족진영 간의 대립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동휘는 임정을 시베리아로 옮길 것을 주장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비슷한 시기 안창호도 노동국총판 직을 사임하며 임정 각료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이승만, 워싱턴 군축회의 외교 활동 나서다]
임시정부 내부 문제 해결을 위해 상하이에 밀항했던 이승만이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에 한국 대표단으로 참석하기 위해 미국으로 출국했습니다.
임정은 이승만에게 전권대사 신임장을 발송하며 그의 외교 활동을 전폭적으로 후원했습니다.
하지만 국제 정세와 열강의 이해관계로 인해 한국 대표단은 회의에 공식적으로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국제연맹 위임통치를, 김규식은 파리에서 전승국의 추인 하 독립을 추진했었습니다. 이승만이 워싱턴에서 한국 사정을 알리기 위한 기자회견을 열었지만, 임시정부가 한국민 전체를 대표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한국 문제가 논의되지 못하자 이승만은 열강의 외면을 강하게 비판하며 국제 정세에 대한 독립운동가들의 기대를 꺾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장 뼈아픈 비극,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 와해]
자유시(스보보드니)에서 공산진영 내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파 간의 극심한 권력 다툼이 발생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민족진영의 '대한독립군단'이 소련 붉은 군대에 의해 포위, 학살당하는 비극적인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이 참변으로 수천 명의 항일 독립부대가 사라지고, 홍범도와 같은 뛰어난 무장들을 잃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사건은 한국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공산주의에 대한 깊은 배척감을 심어주었고, 한국 반공주의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독립군 960명이 전사하고 1,800여 명이 실종되거나 포로가 되어 소련 적군에 편입되었습니다. 대한독립군단의 총재 서일은 책임을 통감하고 1924년 8월 28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김좌진, 이범석 등은 참변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1922
[국제공산당 자금사건과 김구의 김립 암살]
국제공산당으로부터 받은 임정 군자금 횡령 문제로 김구는 임정 공금 횡령범으로 지목된 김립을 암살했습니다.
이는 임시정부 내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 간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임정의 대외적 신용을 크게 실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1919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는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국제공산당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결의했습니다. 1920년 9월 코민테른은 임정 군자금 40만 루블을 한형권에게 지원했으나, 한형권은 이 자금을 김립에게 전달했고 김립이 이를 임정에 보내지 않고 횡령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후 코민테른이 20만 루블을 추가 지원했으나 이 또한 불투명하게 사용되자 김구는 김립을 암살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습니다.
1923
[내부 혼란 극에 달하다, '국민대표회의' 결렬]
임시정부의 기능 마비와 심각한 재정난, 그리고 내부 계파 갈등으로 인해 임시정부를 새로 만들거나(창조론) 개조하자(개조론)는 논의가 불거지며 200여 명의 지역 대표가 참여한 '국민대표회의'가 상하이에서 개막했습니다.
창조파와 개조파는 임정의 존폐와 개혁 방안을 두고 격렬하게 대립했으나, 결국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회의는 결렬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 탄핵안이 제출되기도 했습니다.
박은식, 김창숙 등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했고, 1월 31일부터 김동삼을 의장으로 본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4월 28일 창조파는 이승만 탄핵안을 제출했으나 실행은 보류되었습니다. 5월 16일 개조파인 만주 대표들이 사임하며 회의는 사실상 결렬되었고, 결국 6월 2일 김구가 내무부령을 선포하여 국민대표회의를 강제 해산했습니다. 임정에서 축출된 창조파는 연해주에서 조선공화국을 수립하려 했으나 소련 당국의 불인정으로 해체되었습니다.
1925
[재정난과 갈등 속, 이승만 대통령직 탄핵 면직]
임시정부의 고질적인 재정난과 내부 갈등, 그리고 이승만의 장기간 미국 체류로 인한 공백 등으로 인해 임시 의정원은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탄핵 면직했습니다.
이는 임정 초기의 혼란과 약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이승만은 자금난을 이유로 사실상 탄핵에 대한 항거를 포기했습니다.
이시영은 이승만에게 임정 내 혼란을 보고하며 귀국을 요청했으나, 이승만은 '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이승만 탄핵 후 박은식이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이후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개헌했습니다.
1927
[새로운 시작, 이동녕 주석 체제로 임정 안정화]
이승만 탄핵과 지도체제 개편의 혼란을 거쳐 이동녕을 주석으로 하는 국무위원제 제1기 내각이 조직되면서 비로소 임시정부의 지도 체제가 안정화되었습니다.
김구는 내무부장으로서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지도권을 행사하며 임정을 이끌었습니다.
이승만 탄핵 후 박은식, 이상룡, 홍진, 김구가 차례로 수반을 맡으며 국무령제를 거쳐 국무위원제로 개편되었습니다. 이 안정화는 이후 한인애국단의 활약을 위한 기반이 됩니다.
1930
[민족주의 세력의 결집, '한국독립당' 창당]
좌파 세력의 재편 움직임에 대응하여 이동녕, 안창호 등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임시정부의 기초적 정당이자 여당 역할을 할 '한국독립당'을 상하이에서 결성했습니다.
한국독립당은 임정 출범 초기에는 '이당치국'(以黨治國) 체제를 표방하며 임시정부와 사실상 일체화되었습니다.
이는 1926년부터 진행된 '전민족유일당 운동'이 결국 분열로 끝난 후 민족주의 세력이 독자적으로 재결집한 결과였습니다. 한국독립당은 광복 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으로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31
[김구, 결사의 특무 조직 '한인애국단' 결성]
김구가 국내외 동포들의 모금 활동을 기반으로 일제에 대한 보다 직접적이고 강력한 항일 투쟁을 추진하기 위해 특무 조직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했습니다.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가 이 단체에 소속되어 의열 투쟁을 펼쳤습니다.
한인애국단은 1931년 12월 13일 이봉창을 제1호 단원으로 가입시켰고, 이후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거와 4월 29일 윤봉길 의거를 성공시키며 전 세계에 한국 독립운동의 존재감을 각인시켰습니다.
1932
[일왕에게 던진 폭탄, 이봉창 의거]
한인애국단 소속 이봉창 의사가 일본 도쿄에서 히로히토 천황에게 폭탄을 투척하는 '이봉창 의거'(사쿠라다몬 사건)를 감행했습니다.
비록 암살에는 실패했으나, 일제의 심장부에서 천황을 직접 겨냥한 이 의거는 세계를 놀라게 하고 한국 독립운동의 의지를 강력히 보여주었습니다.
이 의거는 1932년 1월 28일 제1차 상하이 사변 발발 직후 일본이 중화민국을 제압하고 상하이를 무장해제시키는 상황에서 발생했습니다. 유진만, 이덕주 의사도 1932년 3월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세계를 놀라게 한 영웅, 윤봉길 의거]
한인애국단 소속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군 승전기념 및 천장절 행사에 참석한 일본군 고관들을 대상으로 폭탄 투척 의거를 감행하여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을 암살했습니다.
이 의거는 중국의 장제스로부터 "중국의 백만대군이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용사가 능히 하였으니 장하도다"라는 극찬을 받으며 전 세계에 한국 독립운동의 의지를 각인시켰습니다.
이는 한인애국단의 가장 빛나는 활약 중 하나입니다.
윤봉길 의거 직후인 4월 30일, 일본 영사관 경찰의 요청으로 상하이 프랑스 조계 당국은 안창호를 이춘산으로 오인하여 체포하고 조선으로 압송했습니다. 안창호는 1935년 5월 10일 대전형무소에서 가출옥되었습니다. 한인애국단은 1936년까지 추모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의 대장정 피난 시작]
이봉창, 윤봉길 의거 후 일제의 추적과 현상금 60만원이 걸린 상황에서 김구가 상하이를 탈출, 항저우를 거쳐 자싱에 피신하면서 임시정부의 고난에 찬 피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1940년 충칭에 정착할 때까지 여러 차례 거점을 옮겨 다니며 힘든 이동기를 겪게 됩니다.
김구는 5월 9일 상하이 각 신문에 윤봉길 의거의 주모자가 자신임을 발표했습니다. 김구는 이후 장제스의 보호를 받아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임시정부의 주요 이동 경로는 상하이, 항저우, 전장, 난징,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 순이었습니다.
1933
[김구-장제스 극비 회담, 한중 연합의 초석 마련]
김구가 박찬익을 통해 장제스와 역사적인 면담을 추진하여 성공시켰습니다.
이 자리에서 장제스는 중국 국민당 산하 낙양군관학교 내에 조선인 군관학교를 설치할 것을 흔쾌히 합의했습니다.
이는 한국 독립군 양성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1934년 2월 한국인 92명이 제1기생으로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이범석이 낙양군관학교의 대장을 맡았습니다. 이 협력은 1934년 12월 난징에서 한국특무대독립군을 조직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1935
[독립운동 세력 통합과 '조선민족혁명당' 결성]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주도하에 5개 주요 독립운동 단체(의열단,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대한독립당)가 해소되고 '조선민족혁명당'이 결성되었습니다.
이로써 김원봉과 의열단 계열이 임시정부 내 당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나, 이후 김원봉파의 전횡으로 민족주의 세력의 반발을 사게 됩니다.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은 1932년 11월 10일 상하이에서 독립운동 세력 통일을 목적으로 결성되었으나, 김구 계열은 김원봉 중심의 좌파적 색채를 이유로 불참했습니다. 1935년 9월 25일 노종균, 박창세, 조소앙 등은 민족주의적 주장을 지키기 위해 조선민족혁명당에서 탈퇴하고 '한국독립당'의 재건을 선언했습니다.
1938
[피로 얼룩진 통합 노력, '남목청 사건' 김구 피격]
후난성 창사 남목청에서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의 통합을 논의하는 회의장에 조선혁명당 소속 이운한이 난입하여 총격을 가하는 비극적인 '남목청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김구, 현익철, 유동열 등이 중상을 입었고, 특히 현익철은 사망했습니다.
김구는 심장 옆에 총탄을 맞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나, 이후 가슴에 남은 총알로 평생 불편함을 겪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중국 국민당과의 임정 담당자가 천궈푸에서 주자화로 교체되기도 했습니다.
김구는 이운한의 공범으로 강창제와 박창세를 지목했습니다. 이 사건은 독립운동 세력 내부의 극심한 갈등을 여실히 보여주는 아픈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됩니다.
1939
[좌우 대통합의 꿈, '전국연합진선협회' 결성 실패]
김구 계통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김원봉 계통의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장제스의 권고를 받아들여 '전국연합진선협회'로 통합하는 획기적인 시도를 했습니다.
이는 1926년과 1935년의 좌우합작 운동 실패를 극복하고 독립운동 역량을 결집하려는 중요한 노력이었으나, 당원 자격 문제와 주도권 다툼으로 인해 결국 조직이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1939년 5월 10일 김구와 김원봉은 공동명의로 기존 조직 해체와 단일당 수립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8월에 열린 7당 통일회의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청년전위동맹이 이탈하고 결국 조선민족혁명당까지 탈퇴하면서 단일당 조직은 무산되었습니다. 1940년 5월 9일,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의 3당은 '한국독립당'으로 통폐합되어 임정의 여당이 되었고, 김구가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습니다.
1940
[27년간의 대장정 끝, 임시정부 충칭에 정착]
오랜 피난 생활 끝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인 충칭에 최종 정착했습니다.
이곳에서 임정은 재건기를 맞이하며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충칭 정착 직후인 1940년 10월 1일 제32회 의정원 회의에서는 '임시약헌 개정안'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조례'가 심의, 의결되었습니다. 이는 충칭 시기 임정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임시정부의 군사력, '한국 광복군' 공식 창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 당군을 모태로 하고, 이후 기타 독립군 및 만주 독립군 세력을 통합하여 대규모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했습니다.
총사령에는 지청천을, 참모장에는 이범석을 임명하며 임정의 군사력 확장의 큰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이는 임시정부가 대일 항전의 직접적인 주체임을 천명한 사건입니다.
1941년 5월 조선민족혁명당이 임정에 참여하기로 결정했고, 중국 외교부장은 임정 승인을 위해 김구와 김원봉의 합작을 종용했습니다. 1941년 10월 말, 중국 군사위원회는 한국 광복군을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시키고 직접 통제하도록 명령했습니다. 1942년 4월 20일 국무회의에서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의 통합이 결의되었고, 5월 15일 김원봉이 광복군 부사령에 임명되며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되었습니다. 이로써 좌우 통합을 통한 독립운동 역량 강화의 노력이 이루어졌습니다.
[김구, 임시정부 주석으로 강력한 리더십 구축]
충칭 정착 후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 약헌'을 개정하여 국무위원제를 '주석제'로 개편했습니다.
이어서 김구를 주석으로 선출하고 이시영, 조완구, 조소앙 등 6명의 국무위원을 선출하며 '김구 중심 체제'를 확립했습니다.
이는 임시정부 재건기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주석제는 임정의 지도력을 강화하고 통일된 의사 결정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로써 임정은 재건기인 충칭 시대를 본격적으로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1941
[임시정부, 일본에 '대일선전성명서' 발표]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곧바로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할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며, 전 세계에 한국 독립의 의지를 다시 한번 각인시킨 중요한 외교적 선포였습니다.
이 선언은 임시정부가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주권을 주장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1941년 12월 10일 조선민족혁명당도 임정 참여를 공식 선언했습니다.
1944
[한국 광복군 통수권 환수, 김구 중심의 삼위일체 체제 확립]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한국 광복군의 통수권을 마침내 되돌려 받았습니다.
김구는 즉시 광복군 통수부 주석에 취임하여 임시정부 주석,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까지 겸하며 당권, 정권, 군권을 모두 장악하는 '삼위일체 지도체제'를 확립했습니다.
이는 임정의 독립운동 역량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중요한 사건입니다.
1944년 임정은 제5차 개헌을 단행하여 주석의 권한을 강화했고, 4월 24일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출되었습니다. 김구는 이후 9월 장개석 주석을 만나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하는 등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1945
[자주적 광복을 위한 최후의 계획, '서울 진공 작전' 좌절]
김구는 한국 광복군의 한반도 진주를 독자적으로 추진하며, 미군 OSS와의 합동 훈련을 통해 '독수리 작전'으로 알려진 '서울 진공 작전'을 계획했습니다.
이범석을 총지휘관으로 편성된 국내정진군 선발대가 국내 침투 준비를 마쳤으나, 안타깝게도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으로 인해 실행 직전에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한국인이 스스로의 힘으로 조국을 해방시키려 했던 마지막 노력이었습니다.
김구는 미국에 체류 중이던 이승만에게 수시로 연락하여 광복군과 미군 간의 합동훈련 계획 진행 상황을 독촉했습니다. 훈련은 3개월 동안 진행되었으며, 국내 요소 파괴 및 일본군 교란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미군정, 임시정부의 '정통성' 공식 불인정 선언]
미군이 맥아더 포고령을 발표하며 미군정 외 어떠한 정권도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로써 38선 이남에 주둔한 미군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임정 요인들의 귀국을 '개인 자격'으로 제한하며 해방 후 한국의 정치 상황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미국은 추축국 점령 하 망명정부 불승인 원칙과 임정을 한국민을 대표하는 '정부'가 아닌 '한인 그룹들' 중 하나로 간주했습니다. 또한 소련, 영국, 중국과의 한반도에 대한 관점 차이, 특히 소련의 반감과 미국의 신탁통치 구상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임정은 공식 승인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승만은 하지 중장을 수없이 찾아가 임정 요인들의 귀국을 종용했고, 결국 '무장을 해제하고 개인 자격으로 입국'한다는 조건 하에 허용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감격의 조국 귀환]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요인들이 미군 수송기편으로 꿈에 그리던 조국 땅을 밟았습니다.
비록 미군정의 지침에 따라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으나, 김구는 "내가 귀국할 때 한국의 정부도 돌아오는 것이다"라고 선언하며 임시정부의 정통성과 법통성을 강력히 강조했습니다.
임시 숙소는 조선호텔이었고, 이후 광산 재벌 최창학이 기부한 죽첨정(경교장)에 이주하여 사저 겸 임시정부 청사로 활용했습니다.
11월 5일 김구 등 임정 환국 제1진은 상하이로 출발했고, 11월 12일과 13일 두 차례에 걸쳐 미군 수송기편으로 상하이를 출발했습니다. 12월 1일에는 조소앙, 홍진 등 임정 환국 제2진이 귀국했습니다. 이날 서울운동장에서 대규모 임시정부봉영회가 열려 수많은 인파가 임정 요인들을 뜨겁게 환영했습니다.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정개선환영대회에는 15만 군중이 모여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제창하며 임정을 환영했습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 결정, 전국적 '반탁 파업' 확산]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미·소·영·중 4개국에 의한 '5년간 신탁통치' 협의가 결정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긴급 국무회의를 열고 강력한 '반탁 결의문'을 채택했습니다.
이와 함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설치하고, 임정을 지지하는 전국의 정치·사회단체, 관공서, 회사들이 대규모 파업을 일으키는 등 강력한 반대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미국 국무부 장관 번즈가 조선 탁치 불필요 가능성을 시사하자, 1946년 1월 1일 임정 선전부장 엄항섭은 김구를 대리하여 파업 중지 및 복업을 방송하며 평화적인 반탁 운동으로 전환을 모색했습니다.
1946
[한반도 분단의 서막,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한반도의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개최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모스크바 3상회의 협정 지지' 서명 여부를 둘러싼 논란과 소련의 강경 입장으로 인해 결국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습니다.
이는 남북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될 가능성을 높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46년 1월 16일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이 개최되자 각 정당과 사회단체는 반탁진영과 찬탁진영으로 나뉘었습니다. 1월 23일 임정 측 혁신계인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해방동맹은 '임시정부가 우익 편향'이라며 비상국민회의주비회에서 탈퇴, 임정과의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4월 18일 '공동성명 제5호'가 발표되어 모스크바 3상회의 협정 지지를 약속하는 선언서에 서명해야 과도정부 구성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으나, 소련은 반탁 포기 없이는 협의할 용의가 없다고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이로써 미소 양측의 입장 차이로 회의는 결렬되었습니다.
1947
[통일정부의 꿈 좌절,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최종 결렬]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양 진영의 반목과 합의 실패로 결국 결렬되었습니다.
이로써 한국에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통합 정부를 수립하려던 노력이 최종적으로 무산되었고, 이는 남북 분단의 길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947년 2월 17일 민족통일총본부 등이 통합하여 '국민의회'를 결성하고, 3월 3일 임시정부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에 김구를 추대하는 등 임정의 법통을 계승하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군정은 임정 승인을 거부했습니다. 제2차 미소공위 참가 여부를 놓고 우익 진영 내부에서도 이승만, 김구 계열, 한국민주당 등으로 분열되는 혼란을 겪었습니다.
[장덕수 피살 사건, 한민당과 임시정부의 결별]
한국민주당의 핵심 인물 장덕수가 자택에서 박광옥, 배희범의 총격을 받고 피살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에 임시정부 관련 인사가 연루되면서, 한국민주당은 임정 봉대론을 철회하고 임시정부와 사실상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이는 해방 후 남한 정치 지형의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박광옥과 배희범은 체포되었고, 1948년 1월 16일에는 한독당 중앙위원이자 임시정부 관련 인물인 김석황까지 체포되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피의자들은 장덕수 등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한 대한혁명단을 조직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결국 8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존 하지 미군정 사령관의 조치로 감형되었습니다.
1948
[김구, 남한 단독 총선거 반대하며 통일 호소]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가 유엔에서 가결되자,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이라는 성명을 통해 "단독정부를 중앙정부라고 명명하여 자기위안을 받으려 하는 것은 군정청을 남조선 과도정부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라고 강력히 비판하며 남한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고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을 호소했습니다.
이는 이승만의 단선단정론과 대립각을 세우는 중요한 선언이었습니다.
김규식도 남조선 선거에는 불참하겠다고 밝혔습니다. 3월 1일 김구는 3.1 기념식에서 남한 단독 총선거에 불응할 것임을 천명했으나, 이승만 박사를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하겠다고 언급하며 통일 운동 내의 복잡한 역학 관계를 보여주었습니다.
[통일을 향한 마지막 시도, '남북협상'과 4김 회동]
남한 단독 총선거가 가결되자, 김구, 김규식 등 남북협상파 인사들이 통일 정부 수립을 목표로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향했습니다.
4월 30일 평양 김두봉의 집에서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의 '4김 회동'이 열렸습니다.
이들은 수리조합 개방, 전력 송전 등 여러 문제를 논의했으나, 협상은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고, 이후 이들 통일정부수립노선을 택하였던 인사들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배제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남북연석회의는 '조선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와 '전조선동포에게 보내는 격문'을 결정했으나, 이 내용이 남북협상의 근본 이념과 거리가 멀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승만은 남북협상을 '소련에게 이용당한 결과'라고 혹평했습니다. 5월 2일 북한은 남북협상을 근거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했습니다. 김구와 김규식이 서울로 돌아온 며칠 뒤, 북한은 수리조합과 전력 송전을 중단하며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분단의 현실화,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 실시]
김구와 한국독립당 등 남북협상파가 불참한 가운데, 남한 단독으로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이 선거는 이승만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등 단선단정파가 최다 당선자를 배출하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직접적인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설 것이 확실시되었습니다.
선거 결과,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범우익 사회단체였기에 실질적인 국회 제1당은 한국민주당이 되었습니다. 이후 헌법 제정 과정에서 김구와 이승만은 '대통령 책임제'와 '임시정부 법통 계승'을 강조하며 '내각 책임제'를 주장하는 한국민주당 중심의 국회와 대립했습니다.
['대한민국 제헌 헌법' 제정으로 임정 법통 계승 명시]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는 내용이 명시된 '대한민국 제헌 헌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제헌 국회 의장 이승만은 국회개원식 축사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함을 확실히 밝혔습니다.
이는 임시정부의 역사적 정통성을 현대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헌법 기초위원장은 '임시정부 정신을 계승한다는 말이지 제도를 계승한다는 말은 아니다'고 밝혔으며, 제헌 헌법은 임시정부 헌장의 '개정'이 아닌 별도의 '제정' 절차를 밟은 것입니다. 하지만 1987년 개정된 대한민국 헌법 제10호에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이 직접 명시되어 오늘날 임정 법통 계승을 더욱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임시정부의 위대한 해산]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27년간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이어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공식적으로 해산되었습니다.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주석이었던 이승만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이시영이 초대 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함을 천명하고 연호를 '민국 30년'으로 기산하며, 임시정부의 정신과 업적이 현대 대한민국으로 이어짐을 선포했습니다.
이는 길고 긴 독립운동의 결실이자,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알리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임정 출신 남북협상파 중 일부는 월북하거나 남한에 잔류하여 친북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1949년 김구 피살과 1950년 김규식 납북 이후, 대한민국의 주류 세력은 개화파 및 임정 우익의 정통성을 잇는 계보와 한국민주당을 전신으로 하는 계보로 나뉘어 현대의 양당 구도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