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순천 사건
대한민국 근현대사, 군사 반란, 비극적 사건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6:12
대한민국 정부 수립 두 달 만에 발생한 충격적인 군사 반란.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 거부로 시작되어 여수와 순천 일대 대혼란 초래. 반란군과 진압군에 의해 수많은 민간인이 무고하게 희생된 비극.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의 강력한 반공 체제와 숙군 작업 국가보안법 제정으로 이어짐.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남로당 연루 사실이 드러나 체포되고 기사회생하는 극적인 계기가 됨.
1948
[민간인 학살의 비극]
반란 진압 과정에서 진압군과 경찰은 전라남도 동부 지역에서 대대적인 반란군 협조자 색출 작업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약 2,500명에 달하는 무고한 민간인들이 억울하게 살해당하는 대규모 학살이 벌어집니다.
이는 여순 사건이 남긴 가장 비극적인 유산 중 하나입니다.
진압군과 경찰은 여수, 순천 등 전라남도 동부 지역에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반란군 협조자 색출 작업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약 2,500여 명의 민간인이 억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이는 반란군에 의해 희생된 약 90~150명의 민간인보다 훨씬 많은 수치로, 여순 사건의 비극성을 더욱 부각합니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국군의 독립 부대명에 서수 '4'는 들어가지 않게 되었고, 14연대는 없어졌으며, 4연대는 20연대로 재편되었습니다.
[14연대의 비극적 반란]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한 여수 주둔 14연대 군인들이 무장 반란을 일으키며 여수와 순천을 장악합니다.
이들은 경찰과 우익 인사, 민간인 등 70여 명을 살해하며 혼란을 가중시킵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터진 거대한 비극의 서막이 됩니다.
당시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 중이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의 군인 약 2,000명이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 등 남로당 계열 군인을 중심으로 상부의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군은 여수경찰서장과 사찰계 직원 10명, 한민당 여수지부장, 대동청년단 여수지구위원장, 경찰서후원회장 등과 그 가족을 포함해 70여 명을 살해하며 여수를 점령했습니다. 이후 순천시로 이동해 중위 홍순석이 지휘하는 14연대 2개 중대 병력과 결탁, 순천을 장악하고 살인, 약탈, 방화 등을 저질렀습니다.
[반란 확산과 계엄령 선포]
반란군은 벌교, 보성, 고흥, 광양, 구례를 거쳐 곡성까지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합니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여수, 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송호성 준장을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10개 대대 병력을 이끌고 진압을 명령합니다.
한편,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이 사건이 '정권욕에 눈이 먼 몰락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 벌인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하며 김구 등 극우 세력 연루설을 유포하기 시작합니다.
반란군이 벌교, 보성, 고흥, 광양, 구례를 거쳐 10월 22일에는 곡성까지 점령하였습니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10월 21일 여수, 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송호성 준장을 총사령관에 임명해 10개 대대 병력을 이끌게 하고는 진압을 명령하였습니다. 동시에 당시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었던 이범석은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먼 몰락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 벌인 정치적 음모'라며 사실상 김구를 지목했습니다. 서울신문은 '이번 국군이 일으킨 반란의 주요 원인과 폭동 성질은 수식 전에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해서 반국가적 반란을 일으키자는 책동이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진압군, 순천 공격 개시]
진압군이 오후 3시 순천에 대한 총공격을 시작하자, 반란군의 주력 부대는 광양 및 인근 산악지대로 후퇴하기 시작합니다.
진압 작전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며 반란 진압의 서막을 알립니다.
진압군이 오후 3시에 순천 공격을 시작하였습니다. 반란군의 주력은 광양 및 인근 산악지대로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범석은 '반란군에 고한다'는 제목의 포고문에서 '반란군이 일부 그릇된 공산주의자와 음모 정치가의 모략적 이상물이 되었다'면서 '극우정객'을 재차 언급하였습니다. 같은 날 김태선 수도경찰청장도 '혁명 의용군 사건'에 대한 수사발표를 통해 여론몰이를 거들었습니다.
[순천 탈환과 여수 진격]
진압군이 오전에 순천을 완전히 장악하고, 광양 일대의 반란군 주력을 섬멸하며 여수 탈환을 위한 2단계 작전에 돌입합니다.
그러나 여수 입구 미평 근처에서 반란군의 기습을 받아 송호성 준장이 부상당하는 등 진압군 또한 큰 피해를 입습니다.
이 틈을 타 반란군 주력은 백운산과 지리산으로 도피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습니다.
진압군이 오전에 순천을 장악하였습니다. 진압군은 순천 장악 직후 일사천리로 광양 일대의 반란군 주력을 섬멸하고, 여수를 탈환하기 위한 2단계 작전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반란군은 여수의 입구인 미평 근처에 매복, 진압군을 습격했습니다. 이로 인해 사령관 송호성 준장이 철모에 총을 맞고 장갑차에서 떨어져 고막이 터지고 허리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 와중에 반란군의 주력이 백운산과 지리산으로 도망쳤습니다.
[여수 시가전 돌입]
진압군이 여수 시내에 대한 박격포 사격을 시작으로 치열한 시가전이 이틀 동안 이어집니다.
시가전은 반란군 진압의 마지막 고비가 됩니다.
진압군의 여수 시내에 대한 박격포 사격을 시작으로 시가전이 이틀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여수 완전 장악과 김구의 반박]
진압군이 마침내 여수를 완전히 장악하며 반란을 진압합니다.
그러나 사건의 후폭풍은 거세게 몰아쳤습니다.
김구는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극우 세력 연루설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박하고, 반란을 '집단 테러 활동'으로 규정하며 민간인 학살을 비판합니다.
진압군이 여수를 완전히 장악하며 반란 진압 작전이 종료되었습니다. 사건 직후 이범석, 김태선 등이 여순사건의 배후에 극우파가 있다고 지목하자, 김구는 10월 27일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극우라는 용어에 관하여 다른 해석을 내리는 자신만의 사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반박했습니다. 10월 30일 담화에서는 여수, 순천 등지의 반란을 '집단 테러 활동'으로 규정하고 '부녀와 유아까지 참살하였다는 보도를 들을 때에 그 야만적 소행에 몸서리쳐지지 아니할 수 없다'고 발표하며 동족상잔의 비극을 개탄했습니다.
[박정희 체포와 남로당 연루]
여순 사건 진압과 비슷한 시기, 남로당 군사부책 이재복의 체포 과정에서 남로당 조직 명단이 입수되고, 이 명단에서 당시 소령이던 박정희의 이름이 발견됩니다.
수사팀장 김창룡은 박정희를 남로당 고위 간부일 가능성을 의심하여 그를 체포합니다.
이는 박정희의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이자 전환점이 됩니다.
여수 순천 사건이 일어났던 비슷한 시기에 남조선로동당 군사부책이던 이재복과 그의 비서 겸 군사연락책이던 김영식이 체포되는 과정에서 남로당 조직명단이 입수되었고, 여기에서 당시 소령이었던 박정희의 이름이 처음 발견됩니다. 박정희는 남로당 입당원서에 도장을 찍거나 여수 순천 사건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적은 없었으나 가족과 가까웠던 이재복의 재량으로 명단에 이미 이름이 올려져 있었습니다. 수사팀장 김창룡은 박정희가 이재복이라는 남로당 거물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것을 확인한 뒤 남로당 고위간부일 가능성을 의심하여 1948년 11월 11일 박정희를 체포했습니다.
[국가보안법 제정]
이승만 정부는 여순 사건을 계기로 더욱 강력한 반공 체제를 구축합니다.
군 내부의 '숙군작업'을 벌이는 한편,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사회 전반에 걸쳐 좌익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과 처벌에 나섭니다.
이는 대한민국 초기 정부의 통치 기반과 이념적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강력한 반공체제를 구축하였습니다. 군 내부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는 '숙군작업'을 벌이는 한편, 1948년 12월 1일에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사회 전반에 걸쳐 좌익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처벌에 나섰습니다.
1949
[박정희, 수사 협조 후 기사회생]
군사재판에서 감형된 박정희는 수사 측이 이미 가지고 있던 남로당 명단에 조직 구도를 그려내며 적극적으로 수사에 협조합니다.
결국 백선엽 대령, 김안일 방첩과장, 김창룡 대위 세 사람의 보증을 받고 집행정지 판결로 풀려나 민간인 신분이 됩니다.
사형 위기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이 사건은 그의 향후 행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박정희는 수사측이 이미 가지고 있던 남로당 명단에 조직구도 윤곽을 그려내며 수사에 협조하였고, 재심사에서 백선엽 대령, 김안일 방첩과장, 김창룡 대위 세 사람의 보증을 받고 집행정지 판결로 풀려난 민간인 신분이 되었습니다.
[박정희,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 선고]
남로당 연루 혐의로 체포된 박정희는 군사재판 1심에서 무기징역과 파면, 급료 몰수형이라는 중형을 선고받습니다.
이는 그의 군인으로서의 생명뿐 아니라 인생 전체가 위기에 처했음을 의미했습니다.
1949년 2월 8일 군사재판 1심에서 박정희는 무기징역과 파면, 급료 몰수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김점곤 1연대 정보주임, 강측모 전 함경북도지사, 백선엽 육본 정보국장의 노력으로 심사장관의 조치에서 징역 15년으로 감형됩니다.
1954
[박정희, 미국 유학 후 군 복귀]
남로당 연루로 인해 미국 유학 대상자에서 제외되었던 박정희는 1954년에 6개월간의 미국 유학을 마치고 2군 포병단장으로 발령받으며 군 복귀에 성공합니다.
이는 그의 군 경력 회복의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남로당으로 연루되었던 군인 박정희는 미국 유학 대상자로 선발되었음에도 군정보부대의 신원조회 과정에서 대상자에서 제외됩니다. 하지만 1954년 박정희 준장은 6개월간의 미국 유학을 마치고 2군 포병단장으로 발령을 받기도 합니다.
1958
[박정희의 지속된 사상 문제 거론]
박정희는 소장으로 진급했음에도 불구하고, 1958년에 비밀취급 인가가 취소되며 사상과 성분에 문제가 있는 장교로 거론되는 등 과거 남로당 연루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1958년 박정희 소장은 비밀취급 인가가 취소되며 예편되어야 하는 사상과 성분에 문제가 있는 장교로 거론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