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합작운동

정치 운동, 통일 운동, 민족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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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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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운동, 통일 운동, 민족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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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극심한 좌우 대립 속에서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중도파가 주도한 운동입니다. 모스크바 3상 회의와 미소공위 결렬로 인한 분단 위기감 속에서 시작되었으며 토지개혁 친일파 청산 등 7원칙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극좌우 세력의 반대와 여운형 암살 미소공위 재결렬로 결국 좌절되었습니다. 이는 분단 위기 속 통일 정부 수립 노력의 상징으로 기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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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신탁통치 논란 격화와 중도파의 입장 변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 문제가 조선을 뒤흔들었습니다.

동아일보의 잘못된 보도(소련 찬성, 미국 반대)로 논란은 더욱 뜨거워졌고, 좌우익은 격렬하게 대립했습니다.

처음에는 반대했던 김규식, 안재홍 등 중도파 인사들은 전문을 읽어본 후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며 입장을 선회했습니다.

이는 향후 좌우합작운동의 중도적 입장을 형성하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박헌영의 좌익 세력은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섰고, 김구와 이승만을 주축으로 한 우익은 맹렬히 반대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도파의 입장 변화는 좌우 합작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중요한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한민당 송진우 암살 사건]

신탁통치에 신중한 입장을 보이던 한민당의 송진우가 경교장 회의에 참석한 뒤 다음날 새벽 자택에서 암살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해방 정국의 혼란과 극심한 좌우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향후 정치 세력 간의 폭력적인 대립이 심화될 것임을 예고했습니다.

1946

[최초의 좌우 합의 '4당 코뮤니케'의 좌절]

여운형의 조선인민당을 중심으로 좌우 4개 정당 지도자들이 모여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 및 '신탁통치 문제는 장래 수립될 우리 정부가 해결'한다는 합의, 즉 '4당 코뮤니케'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해방 정국에서 좌우 주요 정당이 유일하게 합의한 사항으로 큰 의의를 가졌으나, 임시정부 세력과 한민당 보수파의 반발로 하루도 못 가 파기되며 통합의 어려움을 드러냈습니다.

[통일 정부 수립의 꿈, 1차 미소공위 결렬로 좌절]

통일 임시 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참여 자격을 두고 미국과 소련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결국 결렬되었습니다.

소련은 모스크바 3상회의 협정 지지 세력만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미국은 모든 정치 세력의 참여를 주장하며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습니다.

이는 남북 분단의 위기감을 한층 고조시켰습니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 남한 단독 정부 수립론 불씨 지피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직후, 이승만이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이른바 '정읍 발언'을 했습니다.

이 발언은 분단 정부 수립의 가능성을 현실화하며 한반도 내 좌우익 세력 간의 갈등을 극대화시켰습니다.

이는 통일 국가 수립을 열망하던 중도파에게 큰 위기감을 안겨주었고, 좌우합작운동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분단 위기 속 '좌우합작위원회' 탄생]

극심해지는 좌우 대립과 미소공위 결렬로 분단 위기감이 고조되자,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 등 중도파 인사들이 주도하여 '좌우합작위원회'를 수립했습니다.

위원장에는 김규식이 선출되었으며, 이 위원회는 좌우 이념을 넘어 조선 내 모든 조직이 통합된 중도적 통일 정부 수립을 목표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한반도의 분단을 막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습니다.

중도 우익 계열에는 김규식, 안재홍, 원세훈, 최동오, 김붕준, 김약수 등, 중도 좌익 계열에는 여운형, 허헌, 성주식, 장건상, 이영, 정노식, 정백, 이강국 등이 참여했습니다. 미군정도 이승만과 김구 대신 중도파를 지지하며 간접적인 지원을 시작했습니다.

[사상 초월 대타협의 결실, 좌우합작 7원칙 합의]

좌우합작위원회는 좌파의 5원칙과 우파의 8원칙을 절충하여 '좌우합작 7원칙'을 합의하고 제정했습니다.

이 원칙에는 '통일 임시정부 수립', '미소공위 속개 요청', '토지 개혁',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 처리' 등 당시 한반도의 핵심 쟁점들이 담겼습니다.

이는 극도로 분열된 상황에서 좌우 세력이 한 걸음씩 양보하여 얻어낸 소중한 결실로, 사상과 이념을 넘어선 협력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제3조 토지개혁'과 '제4조 친일파 청산'은 가장 주요한 내용으로, 한민당(유상 몰수 주장)과 조선공산당(무상 분배 주장)의 반대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극좌 및 극우 세력은 이 합의를 '미제의 술책'이나 '적화통일'이라 비난하며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대중은 좌우합작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를 보냈습니다.

[좌우합작 정신 담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 탄생]

미군정의 간접적인 지원과 좌우합작운동의 탄력을 받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구성되었습니다.

이는 미군정의 과도 입법기구로,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합리적이고 중도적인 좌우 세력의 결집이 전면에 급부상했음을 보여주는 결과였습니다.

이는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실질적인 발판 마련으로 기대를 모았습니다.

당시 미군정은 이승만과 김구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새로운 방도를 모색하기 위해 여운형과 김규식을 지지했습니다.

1947

[통일 정부 수립의 마지막 희망, 2차 미소공위 재개]

냉전 체제 심화와 미국의 대한정책이 반공 노선으로 급선회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었습니다.

우익 진영은 참가를 거부하기도 했으나, 좌우합작위원회는 '합작 7원칙'에 명시된 목표인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미소공위 참가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며 협력을 결의했습니다.

이는 통일 정부 수립을 향한 마지막 시도였습니다.

미국 정가에서는 매카시즘 열풍이 불며 진보적 관리들이 투옥되었고, 미군정기 조선에서도 중도파 정치세력은 수차례 테러를 당했습니다. 이러한 압력 속에서도 좌우합작위원회는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중간파 세력을 광범위하게 결집하려 노력했습니다.

[좌우합작의 구심점, 여운형 암살로 좌절]

좌우합작운동의 핵심 구심점이자 중도좌파 세력의 중심 인물인 여운형이 암살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암살은 좌우 대립이 극심해지면서 중도파 인사들이 겪던 신변 위협과 테러의 정점이었으며, 좌우합작운동은 이로 인해 결정적인 구심점을 잃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통일 정부 수립의 희망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통일의 꿈 좌절, 2차 미소공위도 결렬]

여운형 암살로 이미 구심점을 잃어가던 좌우합작운동에 결정타를 날린 사건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최종 결렬이었습니다.

이 결렬로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국제 연합(UN)으로 이관하게 되었고, 이는 결국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한반도 통일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한 모든 노력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승만과 극우세력은 미소공위의 성공이 중도파의 입지 강화를 의미하므로, 반탁운동을 거세게 진행하며 단독정부 수립을 통해 권력 획득을 우선시했습니다.

[좌우합작운동의 마지막, 위원회 공식 해체]

여운형 암살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최종 결렬 이후, 좌우합작운동은 더 이상 동력을 얻지 못했습니다.

미군정 역시 냉전 심화로 지원을 철회하고 우익 세력을 옹호하는 노선으로 바뀌면서, 1947년 12월, 좌우합작위원회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습니다.

통일 임시 정부 수립이라는 숭고한 목표는 좌절되었으나, 그 취지는 김규식 등을 통해 남북협상으로 이어지며 후대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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